
“신이여, 바꿀 수 없는 것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바꿔야 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오바마 대통령도 좋아한다는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의 유명한 기도문이다. 이런 지엽적인 구두선보다 보다 근본적인 자각이 있어야 하는 이 절박한 지구촌 만백성에게 전하는 절실한 메시지가 있다. 한국일보 칼럼 ‘사람들’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1827-1898)의 사상을 소개한다.
정치가 바뀐다고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배와 종속으로 얼룩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 최시형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 최제우는 ‘시천주’라 하여, 자아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 인격신으로서의 하늘을 모셨지만 최시형은 ‘양천주’라고 자아의 내부로 들어온 하늘, 즉 내재하는 천주를 기르자고 했다는 설명이다. 천주의 내재성에 대한 그 신념은 확고해 마침내 ‘이천식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인간은 자신만큼이나 존귀한 만물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자각을 일깨운다는 말이다.
최시형이 강조한 우주 자연과 인간의 관계 회복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이상기후와 전대미문의 질병을 극복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늘과 땅과 사람, 천天 지地 인人이 하나임을 깨닫고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리. 고영민 시인의 ‘손등’을 음미해보자.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어떤 미동으로 꽃은 피었느니
곡진하게 피었다 졌느니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
울고 싶을 때 울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마음이 불러
둥근 알뿌리를 인 채
듣는 저녁 빗소리
이 시에 장석주 시인은 또 이렇게 주석을 단다.
배롱나무와 자귀나무의 꽃은 손꼽을 만한 여름꽃이다. 둘 다 붉고 아름다운 꽃들이다. 배롱나무꽃을 보다가 문득 ‘꽃은 당신이 쥐고 있다 놓아버린 모든 것’이라는 시구를 떠올렸다. 생물 종들이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자기 복제다. 꽃과 열매는 식물 종들이 다음 세대에게 제 생명을 복제해 넘겨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꽃은 식물적 생명의 파동이자 존재의 융기다. 꽃이란 동물의 생식과 섹스의 범주에 드는 일이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다. 꽃이 그렇듯이 사랑은 존재의 본성이자 열락이다. ‘둥근 알뿌리를 인 채’ 저녁 빗소리를 듣는 이는 사랑에 빠진 자다.
‘인생은 심각하나 예술은 유쾌하다’
스페인 작가 엔리케 빌라-마타스는 말한다. 최근 영문판으로 처음 출간된 그의 반 소설 ‘카셀시의 비논리적인 불합리성’에서 1인층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엔리케는 독일어도 중국어도 모르는데 주위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할 때 자신이 문득 모든 것을 판독하고 해독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며 그가 보는 것,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개방하고 개통함으로서 창의적인 연상작용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철학적인 사유와 경쾌한 오락 사이의 균형을 잡는다. 또 1985년 나온 이후 이미 고전이 된 엔리케 빌라-마타스의 ‘휴대용 문학 약사’도 최근 처음으로 영문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에서도 인생과 예술은 모험성을 공유하고 있다. ‘휴대용 문학’의 중량은 여행용 백에 담을 만큼 가볍지만 예술이 생존감을 격화시킨다. 공간 속에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시간 속에서는 너 자신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중앙일보 칼럼 ‘잊혀진 남자’란 글에서 서량(시인-정신과 의사) 씨는 이렇게 말한다.
“망상은 꿈과 비슷하다. 간절한 소망이 망상으로 전개되는 수가 있고 절실한 기원이 꿈속에서 성취되는 수도 많다.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는 충고도 맞는 말이지만 꿈을 간직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꿈이 현실화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은 꿈이 이루어지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의 여성화가 마리 로랑셍(1883-1956)의 시 ‘잊혀진 여인’을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 최금녀 시인의 ‘물드무’를 같이 읊어 보자.
물드무엔 늘 물이 가득했다
자식들이 오면 물이 모자라지 않게
옹배기로 길어다 부으시던
어머니,
한 생애, 가없는 수평선만 넘실거렸을
수심 깊은 물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볼 겨를이 없었다.
몇십 년 만에 무위도를 찾아간다.
수평선 가득 물을 품어 안고
한평생 외로이 떠 있는
물항아리 같은 섬,
물길을 열어놓고 기다리며
내가 놓친 수평선까지 물을 재우고 있는
섬, 어머니를 향해 떠난다.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또 이렇게 의역해 패러프레이즈 한다.
‘드무’는 ‘드므’의 사투리다. 신기철-신용철이 편저한 새우리말 국어사전은 ‘드므’가 넓적하게 생긴 물독이라고 일러준다. 물드무가 어머니의 바다라면, 저, 가없는 한 줄 수평선까지 차오른 바다는 신의 드므다. 뭇 생명이 물에서 나오고,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나온다. 둘 다 생명의 원천이다. 어머니를 잃는 것은 영혼의 피난처를 잃는 것! 오늘 어머니를 찾아 떠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어머니를 잃은 자들은 세상을 유랑한다. 어머니를 잃은 나는 그를 부러워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쓴다.
우리가 우리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우리는 각자의 ‘짝’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운명적으로 선택을 받게 되는 것 같다. 스탕달이 말했듯이 본래 우리는 모두 더할 수 없이 완전한 한 쌍의 행복한 커플이었는데 신(또는 여신)의 질투로 분리돼 흩어진 이산가족이기에 잃어버린 제짝을 평생토록 그리워하며 찾아 헤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양자역학에서 ‘양자 얽힘’은 두 부분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비고전적인 상관관계로 얽힘은 두 부분계가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학설을 말한다. 이 물리적인 이론을 과학자가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그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너무도 신비로운 ‘인연’으로 얽힌 우 마음의 입자들은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쩜 이런 우리 인연의 얽힘과 상호작용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도 “죽음을 피하는 사람은 삶을 피하는 사람이다. 죽음도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지 않나.
최근 출간된 ‘굶주림 시장기가 나를 현대 여성으로 만들어 준다.’란 자서전을 쓴 미국 작가 겸 배우와 음악가인 캐리 브라운스틴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기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멀리하게 한다. 나는 개방적이고 낙관적인 감흥을 느끼고 싶다. 그러는 것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지라도 말이다.”
강형철 시집 ‘환생’에 수록된 시 ‘재생’의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돌며 눈앞에 떠오른다.
명경으로 누운 호수
튀어 오르는 단치 한 마리
나도 처음 인간으로 지상에 올 때
그랬으리
이 시를 오민석 시인은 이렇게 주석을 단다.
티 없이 맑은 호수 위로 어느 한순간 온몸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존재 선언. 우리는 모두 그렇게 지상에 왔다. 세월의 두께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우리는 저 푸른 시작에서 얼마나 멀어지는가. 그러나 매순간 번개처럼 튀어 올라 다시 시작을 선언(재생)하는 삶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간의 칼날은 시간의 푸른 힘줄 대신 권태의 실, 죽음의 실을 짠다. 죽음을 거부할 수 없지만, 처음처럼 다시 튀어 오르는 생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운다. 그 혼종성이 우리 삶의 두께이고 깊이다. 그러므로 의연하게 살고 싶은 자들이여, 늘 다시 태어나자. 헤밍웨이의 말처럼 우리는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