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이 오면 거리마다 카네이션 향기가 번진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가정의 날-달력은 온통 '가족'이라는 단어로 채워진다. 그런데 나는 오래전 중동에서 살아가면서 이 '가정'이라는 단어가 문명마다 얼마나 다른 무게와 색깔로 존재하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이 두 세계는 각자의 방식으로 집을 짓고, 각자의 언어로 사랑을 말한다. 두 신앙이 그리는 가정의 초상화를 나란히 놓고 들여다보면, 거기에 놀라운 공명과 섬세한 차이가 함께 담겨 있다.
기독교가 그리는 가정: 언약의 집
기독교 신앙에서 가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제도다. 창세기 2장은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장면으로 인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결합이 아니다. 신학자들은 이 결합을 '언약'이라고 부른다.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 위에 집이 세워진다는 뜻이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5장은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빗댄다. 남편은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주님을 신뢰하듯 남편을 존중한다는 구조다. 이 구절은 역사 속에서 숱한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핵심에는 '희생적 사랑'이라는 엔진이 놓여 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 소유가 아니라 헌신—기독교 가정 신학의 뿌리는 거기서 자란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잠언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말하고, 신명기 6장은 말씀을 집 문설주에 새기고, 길을 걸을 때도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가정은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살아있는 교실'인 셈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가정은 종종 '작은 교회'로 불렸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의 세포이자 사회의 근간인 셈이다.
흥미로운 건 기독교가 가정을 닫힌 울타리가 아닌 열린 공동체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초대교회는 가정집에서 모였고, 식탁을 낯선 이들과 나눴다. 환대는 기독교 윤리에서 가족 사랑과 동등한 덕목으로 취급된다. 가정의 온기가 담장 밖으로 흘러넘쳐야 한다는 것—이것이 기독교 가정론의 사회적 차원이다.
이슬람이 품은 가정: 수카나의 집
한편, 이슬람에서 가정을 이해하려면 아랍어 단어 하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수카나(Sakinah)’—평온, 고요, 안식이라는 뜻이다. 꾸란 30장 21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께서 너희를 위해 너희 중에서 배우자를 창조하셨으니, 너희가 그들과 함께 평안(Sakinah)을 얻고, 너희 사이에 사랑(Mawaddah)과 자비(Rahmah)를 두셨노라.” 이슬람 가정 신학의 핵심 단어 3개가 이 짧은 구절에 모두 들어있다. 수카나(안식), 마왓다(사랑), 라흐마(자비)—이 세 기둥 위에 이슬람의 가정이 세워진다.
이슬람에서 결혼은 '니카(Nikah)'라고 불리는 계약이다. 이 계약에는 반드시 신부에게 주어지는 '마흐르(Mahr)', 즉, 혼납금이 포함된다. 이것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장치로, 현대 페미니즘의 언어로 해석하면 꽤 진보적인 제도이기도 하다.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여성에게 재산권과 혼납금을 법적으로 보장한 종교적 제도는 당시 문명 세계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이슬람 가정에서 아버지는 '카왐(Qawwam)', 즉, 가족을 책임지고 보호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를 단순한 가부장제로 읽는 건 성급하다. 이슬람 법학에서 카왐은 권력이 아니라 의무에 가깝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이혼을 요구받을 수 있다. 의무 없는 권위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이슬람은 단호하다. 하디스(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식을 구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아이의 귀에 아잔(이슬람의 기도 소리)을 불어넣는 관습이 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듣는 소리가 신의 이름이 되도록—이 작은 의례 하나에 이슬람 가정교육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닮은 듯 다른, 두 얼굴의 가정
기독교와 이슬람, 두 신앙의 가정론을 나란히 놓으면 공통점이 먼저 눈에 띈다. 가정은 신이 설계한 제도라는 것, 결혼은 단순한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성스러운 언약이라는 것, 자녀는 재산이 아니라 맡겨진 선물이라는 것—이 3가지 인식은 두 신앙이 거의 동일하게 공유한다.
그러나 차이 역시 선명하다. 기독교는 결혼의 불가해소성(Indissolubility)을 강조한다. 특히, 가톨릭 신학에서 혼인성사는 인간이 끊을 수 없는 신의 계약으로 간주된다. 이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며, 재혼은 더욱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수반한다.
이슬람은 이혼을 허용하되, 이를 "허용된 것 중 알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혼은 가능하지만, 가능하면 피해야 할 최후의 선택이다. 또한 이슬람은 조건부로 일부다처를 허용한다. 꾸란 4장 3절은 최대 4명까지의 결혼을 허용하되, 반드시 '공정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조건을 명시한다. 그러나 같은 꾸란에서 "너희는 절대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학자들 사이에서 이 두 구절은 사실상 일부다처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가정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혁명이다
나는 이스탄불의 한 무슬림 친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다. 할머니가 만든 콩 수프가 식탁 가득했고, 손자는 할머니 무릎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아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 집에서는 이슬람의 라흐마, 즉 자비가 음식 냄새처럼 배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한번은 서울 변두리의 작은 교회 공동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다 함께 밥을 먹는 가족들을 보았다. 혈연이 아닌 믿음으로 엮인 사람들이 서로의 아이를 안아주고, 서로의 슬픔을 들어주었다. 기독교의 '작은 교회'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신앙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가정이 품어야 할 것은 결국 같다. 안식, 사랑, 자비. 이스탄불의 할머니도, 서울의 성도들도, 그 이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매년 5월은 가정을 기념하는 달이다. 그러나 가정은 기념일에만 빛나는 게 아니다. 매일 밤, 불을 켜고, 밥을 짓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가정은 조용하고 깊게 존재한다. 어쩌면 기독교가 말하는 언약도, 이슬람이 말하는 수카나도 결국은 이 평범한 하루를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에 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