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쯤 남도에는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한동안 보리를 심지 않다가 보리가 쌀보다 비싸지자,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다시 보리를 심는다고 한다. 보리가 익어갈 때면 천지에 아카시아 향기 진동하고 먼 산 뻐꾸기는 산을 흔들어댄다. 이토록 멋진 계절에 연인과 함께 푸른 청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풋풋한 봄날의 정취를 느꼈던 추억이 아련하다.
1960년대로 기억된다. 보리밭 속에 문둥이가 숨어 있다가 애들을 잡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10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에게는 은근히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인환의 거리가 그리워 보리피리를 불며 끝없는 황톳길을 넘어갔다. 경상도에서는 '보리 문둥이'라는 정겨운 말도 있다.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 문둥아, 그동안 우째 지냈노?"라며 얼싸안는다.
요즘 보리피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환갑을 넘긴 노장들 중에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야 보리피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 것이다. 이삭이 핀 보릿대를 살짝 뽑아 적당히 잘라낸 뒤에 부드러운 끝부분을 이빨로 살짝살짝 깨물어 피리를 만든다. 다른 악기처럼 음계를 조작할 필요도 없이 자유자재로 무슨 노래든 연주할 수 있는 것이 보리피리다.
보리피리를 만든다고 다 자란 보릿대를 쏙쏙 뽑다가 농부에게 걸리면 욕을 먹는다. 그래서 보리 대신 뽑은 것이 깜부기였다. 깜부기는 보리밭에 듬성듬성 하나씩 나는 것인데, 줄기와 잎이 보리와 똑같이 생겼다. 다만 새까만 이삭이 보리와는 전혀 다르고 먹을 수도 없는 골칫거리였다. 수확할 때 깜부기가 섞이면 이듬해 농사 때에도 귀찮은 깜부기가 보리밭에 많이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농부들은 미운 오리 새끼를 골라내듯 보리밭에서 새까만 깜부기를 뽑아 없앴다.

아이들은 보리밭에서 깜부기를 보면 얼른 뽑아 깜부기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농부도 좋고 아이들도 즐거우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깜부기피리였다. 쓸모없는 깜부기도 멋진 악기가 되어 봄노래 한 곡조 뽑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개똥도 약으로 쓰려면 구하기 어렵고, 못생긴 꼽추도 노트르담의 성자가 되었다. 보리피리든 깜부기피리든 소리만 잘 나면 된다. 이번 주말엔 남도의 보리밭길을 걸으면서 한하운 시인을 만나봐야겠다.
[이봉수 논설주간]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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