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7년 3월 9일 통제사 원균 휘하 고성현령 조응도가 판옥선에 140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출전하였다가 패전하고 전사한 것이 기문포 해전이다. 그 당시 이순신 장군은 파직 압송되어 한양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 대신으로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기문포 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현재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있다. 기문포라는 지명의 위치를 명확히 언급한 문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기문포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문포 해전의 전투 경과와 지명 ‘기문포’는 『선조실록』 1597년 기사에 등장한다. 그 내용이 상당히 많으므로 지명과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자.
『선조실록』 권86, 선조30년(1597년) 3월 24일 갑인 2번째 기사
3월 19일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따르면,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급히 올려 보낸 보고에 따르면 ‘3월 8일 왜선 대·중·소 3척이 거제 기문포(器問浦)에 와서 정박·상륙하였다고 하기에 통제사(원균)가 즉시 수군을 거느리고서 일시에 배를 출발하여 밤새도록 노를 저어 (3월) 9일 이른 아침 기문포(器問浦)에 급히 도착하니, 왜선 3척이 해안에 매여 있고 왜적은 모두 상륙하였으며 <<중략>> 왜적 20여 명이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의 배로 올라와 싸웠는데, 조응도와 사부(射夫: 활을 쏘는 군사)·격군(格軍: 노를 젓는 군사) 등이 적의 칼날에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였으나, 혹은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배로 구제되기도 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적의 칼을 맞고 물로 뛰어든 조응도는 (안골포만호) 우수(禹壽)의 배로 건졌으나 잠시 뒤에 죽었다. <<후략>>' ... " 라고 하였다.
위 기사에 따르면 기문포 해전은 1597년 3월 9일에 벌어진 전투이다. 지명 '기문포(器問浦)'는 위 기록을 제외한 다른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위 기사는 기문포에 대해 거제 소속이라는 점만을 서술하고,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다른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기문포의 위치는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런데 『선조실록』의 같은 해 기사에는 기문포 해전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그 전투가 일어난 곳의 지명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 권86, 선조30년(1597년) 3월 18일 무신 2번째 기사
경상 감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에 따르면
"금년 3월 10일 성첩(成帖)하여 당일 도착한 고성(경남 고성군)에 머물고 있는 장수의 급보에 따르면 ‘본현(고성)의 판옥선에 사수(射手: 활을 쏘는 군사)·격군(格軍: 노를 젓는 군사) 등 휘하에 거느린 140여 명을 싣고 현령(고성현령 조응도)이 직접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가 3월 9일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에서 왜적과 접전할 때 전선(全船)이 패전하고 현령(고성현령 조응도)도 전사하였으므로 시체를 싣고 당일 돌아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위 기사는 비록 기문포라는 지명은 명시하지 않았지만, 전투가 벌어진 날짜(1597년 3월 9일)와 전사한 장수(고성현령 조응도)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있으므로 기문포 해전 기록임이 틀림없다. 위 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전투가 벌어진 곳을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로 서술한 것이다.
조라포는 조선시대에 조라포만호진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조라포진은 처음에 지금의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에 설치되었다가 이후 옥포진(지금의 거제시 옥포동) 밖으로 옮겼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거제시 옥포동에는 '조라' 지명이 남아 있다.
조라포진을 옮긴 시점은 기록에 따라 다른데, 다음은 이에 관한 연구 자료이다.
『조선시대수군진조사3 - 경상우수영』,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225쪽
『대동지지』에는 선조 25년(1592)에 옥포진성 밖으로 진을 옮기고, 1651년(효종 2)에 다시 지세포의 예전 자리로 옮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증보문헌비고』제32권에선 조라포를 1592년(선조 25)에 옥포진 주변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영남읍지』와 『증보문헌비고』제27권에선 1604년(선조 37)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연구 자료에 따르면 『선조실록』 1597년 기사에 언급된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의 조라포는, 지금의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리 또는 거제시 옥포동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거제도 동쪽에 있던 만호진인 옥포, 지세포, 조라포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으므로 『선조실록』 1597년 기사의 조라포는 지금의 일운면 구조라리로 볼 수 있다.
고다포(古多浦)는,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들의 송환에 관한 기록인 『표인영래등록(漂人領來謄錄)』(1641~1751)에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전라도 나주 주민이 1745년 12월 15일 '경상도 거제 고다포(慶尙道巨濟古多浦)'에서 곡물을 판매한 뒤 통영으로 향하다가 거친 바람을 만나서 일본으로 표류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정성일, 「표류기록을 통해서 본 조선후기 어민과 상인의 해상활동」, 『국사관논총』 99, 2002, 국사편찬위원회)
즉, 고다포는 실록이나 등록(謄錄)과 같은 관찬(官撰) 자료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공식 지명이었다. 현재 거제도에는 이와 비슷한 지명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고다포의 위치를 추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거제시 남부면 다대리 다대항 또는 다포리 다대다포항이 바로 그 지역이다. 게다가 다대항과 다대다포항은 구조라리 구조라항과 대략 1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라는 기록과 잘 부합한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는 다대항과 다대다포항 일대 지명을 '다대포리(多大浦里)'로 기록하였으며, 『1872년지방지도』는 이를 '고다대리(古多大里)'로 표기하였다. 특히 1890년경에 편찬된 『거제소다포염곽전절목(巨濟少多浦鹽藿田節目)』이라는 자료는 지금의 다포리를 '소다포(少多浦)'로 기록한 점이 흥미롭다. 이 절목은 경상도 관찰사가 거제군 남부면 소다포(少多浦)의 염전과 곽전(미역밭)의 세금 징수에 관한 문서로서, 그 내용은 인터넷뉴스(http://www.newsngeo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82)에서 자세히 소개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경상남도지지조서』는 다포리의 속칭을 '자근다대(작은다대)'로 기록하였으며, 1959년에 작성된 『경상남도지명조사철』은 다포리의 현지 지명을 '작은다대'로 기록하였다.
지금의 다포리가 예전에 '소다포(少多浦)' 또는 '작은다대'로 불렸던 사실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지금의 다대리의 본래 지명은 '대다포(大多浦)/큰다포'였다가 나중에 그 발음이 변이하여 '다대포(多大浦)'로 바뀐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조선시대 부산 부근 다대포(多大浦)가 『승정원일기』에 ‘대다포(大多浦)’라는 지명으로 등장하는 점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추정된다. 만일 이러한 추정이 옳다면 고다포(古多浦)는 지금의 다대리와 다포리를 함께 가리키는 지명일 것이다.
지명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고다포(古多浦)는 최소한 지금의 다포리 또는 그 주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현대 지도에 조선시대 옥포, 조라포, 고다포(추정)를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기문포 해전이 일어난 곳을 옥포 지역으로 서술한 기록이 있어서 조금 혼란스러워진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86, 선조30년(1597년) 3월 25일 을묘 4번째 기사
3월 22일 성첩(成貼)한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서장에 따르면,
"금월(3월) 19일 김해의 섬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 풍무수(豊茂守)가 휘하 왜인 3명을 보내어 신에게 통문하기를 ‘우리 군대의 왜 32명이 중선(中船) 1척을 타고 나무를 벨 일로 거제 옥포경(巨濟玉浦境)에 가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조선 수군이 유인하여 은밀히 다 죽여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었다. <<후략>>' ... "라고 하였다.
위 기사는 전투가 벌어진 날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와 내용으로 보아 기문포 해전에 관한 기록이 거의 확실하다. 이 기록은 기문포 해전이 일어난 곳을 '거제 옥포경(巨濟玉浦境)'으로 서술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본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거제 옥포경(巨濟玉浦境)'이라는 지명은 일본군 장수가 보낸 통문에서 처음 언급된 것이다. 조선의 거제 지명을 상세히 알기 어려웠던 일본군 장수가 거제도 동부 지역을 단순히 ‘옥포경(玉浦境)’으로 서술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에 비해 '조라포경 고다포(助羅浦境古多浦)는 고성에 있던 조선군 장수가 보낸 급보에 기록된 것이므로 보다 신빙성이 높다. 게다가 이 급보는 ‘조라포’와 ‘고다포’ 두 가지 지명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더욱 구체적이다.
따라서 기문포는 고다포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며, 지금의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 일대로 비정(比定)하고자 한다.
[이봉수 논설주간]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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