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는 길은 어디일까? 따스한 햇살이 스미는 숲길, 부드러운 바람이 손등을 감싸는 너른 초원, 붉은 단풍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벤치.
익어가는 가을 정취를 찾으려면 어디로 떠나면 좋을까.
순산순수(順山順水)의 길지로 간택된 한양 서쪽 고양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 서삼릉(西三陵), 서오릉(西五陵)이 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왕릉의 분위기는 가을의 낭만을 한층 더 깊게 한다.
만추의 계절에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치열했던 역사와 함께 불타는 가을 단풍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왕릉을 찾아 떠난다.
지하철 3호선 원흥역에서 출발하여 주택가와 상가를 벗어나자마자 가을 단풍으로 치장한 한적하기 그지없는 숲길을 만난다.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은사시나무가 양쪽에 빼곡히 서 있는 이 길은 드라마와 영화로 잘 알려진 길이자 숱한 사람들의 추억이 쌓인 아름다운 길이다.
은사시나무길이 끝나는 곳에 서삼릉이 있다. 서삼릉 입구에 한국 마사회에서 관리하는 종마장이 있다. 능역에 바짝 붙어 있어 보기에도 민망하고 목장이 능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면서 능역이 어수선한 분위기다.
서삼릉은 한양의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3개의 능이라는 뜻이다. 그중에서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哲宗)과 철인황후의 예릉(睿陵),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두 곳만 공개된다. 나머지 인종의 효릉(孝陵)은 개인 사유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출입이 불가능하고 문화재청이 지정한 날에만 개방된다.
조선시대 왕조를 이끌었던 왕족의 무덤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곳은 '왕릉(王陵)',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묻혀있는 곳은 '원(園') ,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 등이 묻힌 곳은 '묘(墓)'라고 부른다.
왕릉 외에도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昭慶園),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의 묘인 의령원(懿寧園),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있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와 태실이 있다. 서삼릉 태실에는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비극의 역사가 담겨 있다. 풍수가 좋은 각지에 보관돼 있던 조선 왕실 왕족의 태묘를 한데 모아 서삼릉 태실에 안장한 것이다. 이는 왕실에서 사용하던 태항아리를 비롯해 함께 묻었던 부장품들을 빼돌리기 위한 일제의 만행이었다고 한다. 서삼릉 태실에는 왕족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이 공동묘지처럼 늘어서 있어 조선 왕실의 비극적 최후를 연상시킨다.
능과 능 사이에는 숲길이 조성돼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다. 바스락거리며 밟히는 단풍 소리가 왕릉의 분위기를 호젓하게 만든다. 포플러 나무가 열 지어 서있는 숲길을 걸으며 잠시 능에서 나온 강화도령 철종과 청에 볼모로 잡혀가 수모를 당했던 소현세자와도 이야기를 나눈다.
서삼릉을 뒤로 하고 서오릉에 잠든 또 다른 조선의 왕들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1개의 묘가 있다.
세조의 세자 덕종의 경릉(敬陵), 덕종의 동생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쳐 부르는 명릉(明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을 서오릉이라 부른다.
그 밖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빈 윤씨(恭嬪尹氏)가 묻힌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를 신촌에서 옮겨온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숙종은 부인 5명과 함께 서오릉에 묻혀 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이 사약을 내려 사사한 장희빈 묘도 있다.
왕릉 탐방이 끝나면 유순하고 넉넉한 서어나무길과 소나무길이 2시간 정도 이어져서 오백년 조선왕실의 역사를 회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조선 왕릉은 조선의 산 역사다. 이 가을에 유네스코에서 ‘신들의 정원’이라 극찬했던 ‘왕릉’으로 고즈넉한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추억 하나를 더 쌓고, 지나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을 듯싶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