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들어가기
디카시는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의 합성으로 시성(詩性)을 추구한다.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문화 현상임이 분명하다. 디카시 창시자 이상옥은 사진의 ‘침묵성’을 문자로 ‘재현’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가 말한 사진의 ‘침묵성’을 문자로 ‘재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래와 같은 주장을 읽어 본다.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한 날시는 여전히 침묵하는 언어인데, 시인이 그 침묵의 언어를 듣고 옮겨 놓으면 디카시는 완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디카시는 날시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라고 정의한 것이다.
- 이상옥, 『앙코르 디카시』, 19쪽.
이는 롤랑 바르트가 사진 이론에서 주장한 관점과 정반대의 방향을 추구하는 주장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과거 시간성’, ‘침묵성’, ‘언어의 불가능성’을 강조했다. 이상옥의 디카시론은 ’언어의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는 롤랑 바르트 사진 이론을 재해석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오해석의 성격이 강하다.
디카시론의 요구가 문자와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감각적 경험과 서정적 경험을 창출하려는 시도임은 부인할 수 없다. 디카시가 사진의 본질적 특성까지 규정하거나, 존재론적 침묵을 언어로 대체 가능하다고 주장할 때는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다. 이 글에서는 디카시의 예술적 정당성 자체를 전면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롤랑 바르트 이론을 근거 삼아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에서 심각한 개념적 오독을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 디카시론이 차용한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
디카시가 사진 기호와 문자 기호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사진 이론의 정합성이 필요하다. 디카시 옹호론자들의 글을 보면, 사진 이론을 오해하는 듯하다. 특히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오해한다. 이런 이론적 해석 오류의 글이 인터넷상에 수없이 떠돌아다닌다. 롤랑 바르트와 관련한 대표적인 세 예문을 든다. 다음은 디카시 옹호론자들이 롤랑 바르트를 해석한 방식이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스투디움이고 주관적 개입이 들어간 것이 푼크툼이라 했는데 디카시는 피사체가 스투디움의 범위를 넘어 푼크툼이라는 주관적 개입이 활자로 나타나 시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스투디움이라는 단순한 피사체에서 푼크툼이란 메시지를 얻고 이미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시와 마찬가지로 피사체를 편리상 대상과 배경으로 나눈다면 대상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디카시는 완전 달라진다.
- - 김왕노, 「김왕노의 시와 디카시 시작법(詩作法)」, 웹진 『시인광장』 2022년 5월호.
구조주의 철학자고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을 보는 법 2가지를 말했다. 작가적 시점에서 보는 스투디움과 독자가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 보는 푼크툼이다. 당연 디카시를 쓸 때는 푼크툼 즉 피사체를 두고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키거나 자신의 창의력을 쏟아붓거나 감정을 이입해 디카시를 완성시킨다.
- - 김왕노, 「디카시의 사진 찍기」,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푼크툼과 스투디움이란 말에서 디카시의 이론으로 사진을 액면 그대로 보는 스투디움 즉 포토 포엠 측면이나 주관 개입으로 해석되는 푼크툼에 가까운 것으로 디카시를 구분한다.
- - 배선숙, 「사진과 5줄의 힘- 생활시로 시인이 되는 법」, 블로그 『다올 메시저의 책』.
이들 예문은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을 차용한 디카시론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보는 법, 즉 사진 해석 이론 용어를 끌어와 디카시 창작이나 해석 이론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과연 이론적 정합성이 있을까?
한국에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를 번역한 책은 두 권이다. 조광희가 번역한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설화당, 1986), 김웅권이 번역한 『밝은 방』(동문선, 2006)이다. 또한,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5)를 토대로 하여 살펴본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La Chambre claire)』(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에서 사진의 “함축 의미는 스투디움에 존재한다.”(42쪽)라고 강조한다. 이는 사진을 사회적(정치적)·문화적(역사적, 교양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지식, 교양, 의미의 층위에 속하므로 언어적 설명이 가능하다. 반면, 푼크툼은 관람자가 예기치 않게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42쪽)라고 강조한다. 이는 사진이 던지는 비언어적 충격을 지칭한다. 롤랑 바르트는 이 푼크툼이 사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언어로 포획하거나 체계화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강조한다. 즉, 사진은 존재의 증거임과 동시에 말로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정서적 여백을 품는다는 관점이다.
디카시론은 이 스투디움을 언어의 생산적 자원으로 전환한다. 사진이 주는 감각적 ‘찌름’을 시인의 의식 속에서 번역하고, 5행 이내의 언어로 완결시키는 것을 디카시의 핵심으로 본다. 이는 사진의 침묵과 비언어성에 머물기를 요구한 롤랑 바르트의 철학과 달리, 푼크툼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의미화하며 언어적 결과물로 환원하려는 시도이다. 롤랑 바르트가 푼크툼을 ‘말해지지 않는 상처’로 남겨 두려 했다면, 디카시는 그것을 언어적 서정으로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두 입장은 사진이 지닌 존재론적 침묵과 언어적 해석 가능성 사이에서 서로 다른 철학적 길을 택한 것이다.
디카시론은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과 푼크툼 개념을 차용하여 사진에서의 주관적 경험을 언급한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은 사진이 주는 감정적 충격과 직관적 경험을 말한다. 그 자체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디카시론에서는 푼크툼을 시와 결합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를 언어적 해석의 과정으로 연결시킨다. 롤랑 바르트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의 해석이다. 푼크툼을 주관적이고 창의적인 표현으로 치환한 것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의 본래 의미를 훼손한 것이다.
또한, 디카시 옹호론자들은 “푼크툼이라는 주관적 개입이 활자로 나타나 시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표현은 매우 모호하다. 학술적 엄밀성을 위해 정확한 용어 사용이 필요한 지점임에도 이를 외면한 듯하다. 이는 단순한 오독이 아니다. 개념의 철학적 핵심을 해체하는 오류이다.
3.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 핵심
롤랑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민음사, 2025)에서 “사진의 노에마(Noema)는 ‘그것이 있었다(Ca-a-été)’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136쪽)라고 강조한다. 또한, 아래와 같이 사진이 영화와 다른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있었다’라는 노에마의 관점에서 본 사진은 허구인 경우가 아주 드물다. 베르나르 포콩의 연출 사진과 활인화(活人畫) 사진은 항상 ‘그것이 있었다’ 쪽인 반면 영화는 ‘그것이 있었던 듯하다(Ça a l’air d’avoir été)’ 쪽입니다(136쪽).
롤랑 바르트의 주장을 잘 읽어 보면, 사진은 과거의 존재 증거, 즉 피사체가 ‘존재했다.’라는 사실 자체를 강조한다. 사진의 본질은 존재론적 증명이라는 것이다. 시간의 단절과 과거에 대한 기록임을 말한 것이다. 과거의 기록이지만, 사진에 내재한 현재와 미래 지향적 시간성도 중요하게 다룬다.
현상학에서 노에마(Noema)는 ‘인식 대상의 본질’이다. 노에시스(Noesis)는 ‘인식하는 주체의 행위’이다. 이는 사진을 보는 행위이다. 보는 사람은 사진을 통해 존재의 흔적을 직관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갖는 직접적이고 비언어적인 충격(punctum)을 강조했다.
또한, 롤랑 바르트는 아래와 같이 사진의 복제 불가능성과 함께 텍스트로 복제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사진의 노에마는 ‘복제 가능성’일 수 없습니다.(그림에 대해서는 유효합니다.) 인쇄술 이후 물질적으로, 매번 이루어지는 독서에 의해 현상학적으로, 텍스트는 복제 가능합니다(135쪽).
전체 문맥을 보면 사진이 가진 의미는 언어로 완전히 해석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복제한 텍스트는 설명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진을 언어로 해석하는 순간, 사진의 순수한 ‘그것이 있었다’라는 과거 존재의 시간성은 사라진다는 주장이 내포해 있다.
디카시가 사진의 비언어성을 어떻게 변형하려는가? 그 과정에서 푼크툼을 언어로 변환하려는 시도에 관해 설명했다. 이것이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과 어떻게 충돌하는가? 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이론적 오류를 논의할 것이다.
4. 디카시 이론과 롤랑 바르트 이론 간 불일치
디카시는 사진을 언어(詩)와 결합하여 의미를 완성하거나 확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진의 언어 불가능성, 침묵성, 존재 증거성과 본질적으로 충돌한다.
디카시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인용해 “사진은 과거를 언술하는 기록”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롤랑 바르트의 복합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의 오류로 이론의 부정합성을 보인다.
가. 노에마/노에시스 관점에서 본 디카시 언어화 문제
현상학적 관점에서 노에마(Noema)는 인식 대상의 본질적 의미, 노에시스(Noesis)는 이를 인식하는 주체의 행위를 뜻한다. 사진의 경우, 노에마는 ‘그것이 있었다(Ca-a-été)’라는 존재 증거 자체이다. 노에시스는 관람자가 사진을 직관하고 경험하는 과정이다.
디카시론은 사진 속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언어화하여 시적 이미지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관람자의 주체적 경험(노에시스)은 언어적 산출물로 환원한다. 사진이 담고 있는 존재론적 침묵(노에마)은 희석되고 만다. 즉, 디카시가 사진을 언어로 완결시키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비언어적인 사진의 존재 증거와 충돌한다.
따라서 디카시의 언어화 과정은 단순한 서정적 변환일 수 없다. 사진 본질(노에마)과 관람자의 주체적 경험(노에시스) 사이의 긴장을 축소·재해석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디카시론은 롤랑 바르트 사진 이론과 철학적 부정합성을 드러낸다.
나. 디카시와 롤랑 바르트의 침묵성과 언어화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침묵성과 푼크툼의 비언어적 충격을 강조했다. 예컨대 그가 『카메라 루시다』(설화당, 1997)에서 “나는 이 소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어머니를 되찾았다.”(70쪽)라고 언급한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담은 ‘유리 온실 정원 사진’이 대표적이다. 이 사진은 단순한 초상을 넘어, 어머니의 죽음과 존재의 깊이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충격으로 롤랑 바르트에게 전달했다. 롤랑 바르트는 이 감정을 언어로 온전히 옮길 수 없다고 본다. 이 사진은 그에게만 의미 있는 푼크툼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했다. 이는 사진의 침묵이 비언어성의 증거라고 보았다.
디카시론은 이러한 침묵을 언어로 대체하고자 한다. 사진에서 비롯된 주관적 경험과 감정을 시로 번역하려고 한다. 이는 푼크툼이 가진 비언어성과 노에마적 존재 증거를 희석시킨다. 롤랑 바르트가 경계한 언어 불가능성, 즉 푼크툼의 설명 불가능성을 무시하는 접근이다. 디카시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모두 언어적 기호 체계로 환원한다.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 경험을 생산하려고 한다. 이는 사진의 철학적 본질, 즉 존재의 잔재로서의 사진성과 상충한다.
다. 푼크툼의 언어적 변환
디카시론에서 푼크툼은 사진 속의 감각적 상처를 서정적인 언어로 전환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한 사진에서 푼크툼으로 작용하는 ‘불안감’이나 ‘고독’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사진의 감각적 충격을 해석하고 언어화하는 것이다. 이는 롤랑 바르트가 강조한 것처럼 푼크툼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충격임을 간과한 접근이다. 이 과정에서 디카시론은 사진의 본질적 충격을 서정적인 언어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는 사진이 전달하는 비언어적 감각을 흐리게 만든다.
디카시론이 푼크툼을 언어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롤랑 바르트의 의도와는 다르다. 롤랑 바르트에게 푼크툼은 언어적 설명이 불가능한 비언어적 충격이다. 이 지점에서 디카시의 언어화 과정은 사진이 주는 직관적 감정을 서정적으로 변환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이란, 예기치 않게 마음속 깊이 찌르는 감각적 상처이다. 예를 들어, 한 젊은 여성의 사진에서 푼크툼을 찾는다면, 사진 속 여성의 눈빛에서 불안감이나 고독을 느끼는 감각이 푼크툼이다. 디카시론은 이를 언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 비언어적 충격이므로 언어로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부분에서 디카시론이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언어화하려는 방식은 사진의 존재론적 특성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라. 사진의 기록성과 언어의 확장성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과거’의 증거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진이 과거의 순간을 고백하는 기록적 성격을 가진다. 그 본질적 특성은 언어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디카시론은 사진을 시적 이미지로 변환하려 한다. 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롤랑 바르트의 철학에서 말하는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비행기 추락 사고 사진이 있다면, 그 사진은 ‘그것이 있었다’라는 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단순한 기록 ‘이미지’로 보지 않는다. 과거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디카시론이 이를 시적인 언어로 변환하려는 시도는 롤랑 바르트의 의도와 상반하는 접근이다.
디카시론이 사진을 언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론적 부정합성은 단순한 오독을 넘어선다. 사진의 철학적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의 핵심 개념을 잘못 적용한 결과이다. 본래의 사진이 주는 감각적 충격이나 존재론적 증거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적 오류에 해당한다.
마. 사진 이론의 복제 불가능성
디카시론에서 사진의 ‘언어화’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트가 사진에서 강조한 복제 불가능성과 충돌한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이 복제 불가능한 존재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그 자체로 비언어적인 정서를 전달한다고 주장했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노에마는 ‘그것이 있었다’라고 강조한다. 사진의 본질적 의미는 비언어적이고 비복제적임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진의 감각적 충격이 언어화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디카시는 사진을 언어로 해석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의 본질적 의미를 왜곡할 수 있다. 사진의 ‘복제 불가능성’을 언어로 복제하려는 시도는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바. 디카시와 롤랑 바르트의 차이점
디카시가 사진과 언어의 결합을 주장하면서, 롤랑 바르트의 철학을 차용한 부분에서 이론적 오해를 범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디카시론은 사진의 ‘침묵’을 해체하여 언어로 대체하려고 한다. 롤랑 바르트의 철학적 의도를 훼손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디카시론은 사진의 비언어적 본질을 희석시키므로 언어적 결과물로 환원하는 방식은 오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 개념 차용 오류의 문제점
디카시론이 내세우는 사진과 언어의 결합 문제는 타당한가? 디카시론에서 주장하는 사진의 노에마를 언어로 설명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전제에 주목해 본다. 롤랑 바르트 이론을 대입하기는 하였으나, 완전하게 오해석한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경계한 사진의 본질적 ‘침묵’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런 진술은 롤랑 바르트의 ‘그것이 있었다’라는 노에마 개념과 본질적으로 배치한다. 디카시론은 롤랑 바르트 이론을 오해석한 것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전제를 무효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디카시론이 차용한 개념의 부정합성은 사진의 철학적 본질을 흐리는 행위이다. 이는 디카시 창작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롤랑 바르트라는 권위를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롤랑 바르트 사진 이론을 부정합하게 해석하여 디카시 도구로 사용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표적 세 예문과 같은 이론적 부정합성의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디카시는 사진의 침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도, 그 여백을 시적 언어가 조심스럽게 스쳐 갈 수 있는 지점에서 롤랑 바르트 이론과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더는 오해석, 오류의 주장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디카시론은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차용하면서 핵심 개념을 축소·오독한 측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그것이 있었다’라는 존재 증거와 언어화가 불가능한 침묵성에서 찾았다. 디카시는 이를 언어적 서정으로 환원하여 사진의 철학적 깊이를 희석한다.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롤랑 바르트의 논지를 충실히 이해하고, 사진과 언어의 경계를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디카시가 창작 원리를 정립하려면 권위 차용이 아니라 개념의 정합성 위에 서야 한다.
디카시의 사진을 언어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철학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한 결과임을 지적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디카시가 사진의 비언어적 특성과 서정적 언어화 사이의 관계를 더욱 명확히 해야 한다.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을 충실하게 반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디카시가 사진의 ‘침묵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언어와의 결합을 시도할 수 있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상호 작용, 상호 침투성을 토대로 하면서도, 과거 기록의 사진을 설명하는 문자 기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디카시가 사진의 ‘침묵성’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언어적 서정을 탐색하려면,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의 ‘말해지지 않음’의 ‘침묵성’을 존중하는 창작 기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진의 침묵을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상호 침투할 수 있게 시 창작의 다양성의 영역을 의도적으로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디카시가 사진의 ‘침묵성’을 온전히 존중하면서도, 언어적 서정을 병치하거나 여백으로 남겨 두는 새로운 기법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의 비언어성과 언어적 표현이 대립보다는 공존할 수 있게 디카시만의 방법론을 정교하게 설계하여야 할 것이다. 비언어적 특성과 언어화 사이의 긴장을 탐색하는 것이 이론적 성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를 구현한다면 롤랑 바르트 이론과의 부정합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디카시 담론이 롤랑 바르트의 사진 이론, 특히 ‘푼크툼’과 ‘침묵성’ 개념을 언어화 가능한 창작 원리로 오독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바르트에게 사진의 본질은 ‘그것이 있었다’라는 존재 증거이며, 이는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에 속한다. 디카시론은 이 침묵을 시적 언술로 대체함으로써 사진의 철학적 전제를 무효화한다. 그 결과, 바르트 이론은 해석의 근거가 아니라 장식적 권위로 소비된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