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운동을 계승한 전국적 만세운동인 6·10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박하균(2020년 애국장), 강달룡(1990년 애족장), 박내홍(1995년 애족장) 선생을 ‘202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보훈부가 밝혔다. 1926년 6월 10일 순종황제의 장례일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3·1운동 이후 다시 전개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이었다.
순종의 승하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울분과 독립의 열망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주의계· 민족주의계·천도교·학생계가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격문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계획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독자적으로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배포하며 시위를 이어갔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비록 전국적 봉기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항일민족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박하균(1902년~미상) 선생은 1919년 함흥과 홍원의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활동 하며 6·10만세운동 준비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격문과 태극기를 제작‧배포 하고 시위를 이끌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에도 항일 출판물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강달룡(1888년~1940년) 선생은 진주 3·1운동을 주도하여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에도 노동·농민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노동자‧농민‧ 백정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 향상에 힘썼다. 이후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로 활동하며 천도교,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하여 6·10만세운동을 준비했고, 독립이 라는 공동 목표 아래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였다.
박내홍(1894년~1928년) 선생은 천도교 청년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로, 천도교 청년세대가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민족운동으로 나아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으나, 천도교청년동맹 대표 위원으로서 6·10만세운동 준비 과정에서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담당하며 전국적 봉기를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이후 신간회 창립에도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1920년대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사회주의계, 민족주의계, 천도교계, 학생계가 연대한 독립운동으로, 이후 신간회 창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학생층이 항일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정신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잇는 역사적 징검다리이자, 이념을 초월한 민족협동과 학생 주도 항일운동의 지평을 연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정부는 애국지사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하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강달룡, 박내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