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들어가기
1. 문제 제기
2022년 황순원 문학제 발표 원고인 김겸의 「디카시의 철학적 가능성에 관한 시론」은 사진과 시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문학 형식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디카시를 언어 이전의 정동이 언어적 응답을 촉발하는 대화의 장으로 설정하여 설명한다. 이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의 대화 이론,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마수미(Brian Massumi, 1956~ )의 정동 이론을 통해 해석한다.
이 시도는 감각과 언어, 비언어와 의미 사이의 경계를 사유하는 실험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바흐친의 언어 철학(발화 주체, 언어 사회적 관계, 대화적 생성), 들뢰즈와 마수미의 정동 이론(탈주체적 생성, 비언어적 강도, 차이의 생성)이 내포한 존재론적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에 이론적 정합성의 긴장을 드러낸다. 특히 두 이론을 동일한 층위에서 병합하는 과정과 바흐친의 ‘구심과 원심’ 개념을 미학적 은유로 이동한 점에서 다수의 철학적 전제의 차이가 나타난다.
이 글은 이론적 혼용과 개념적 병치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디카시의 철학적 탐구를 위한 보다 정합적인 대안을 모색한다.
2. 이론 분석
김겸은 디카시를 언어적·비언어적 층위의 상호 대화로 파악한다. 사진은 언어 이전의 감각적 정동을 대표한다. 시는 이에 대한 언어적 응답으로 의미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바흐친의 ‘응답성(responsivity)’, ‘구심성(centripetal)’, 원심성(centrifugal)’ 개념을 차용하여, 디카시 내부 감각 흐름과 언어적 응답의 긴장을 설명한다.
또한, 들뢰즈와 마수미의 정동 이론을 인용하여 사진을 언어 이전적 감각의 촉발점으로 해석한다. 시를 그 감각을 언어화하는 행위로 해석한다. 결과적으로 디카시를 감각과 언어, 이미지와 발화가 교차하는 예술적·존재론적 장으로 제시한다.
바흐친 대화 이론이 전제하는 언어적·사회적 발화와 정동 이론이 전제하는 비언어적 신체 존재론 사이의 근본 간극을 간과한다. 이 글에서 이 두 이론의 접합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 전유 차원에서 존재론적 전제 차이에 대한 매개 논증이 없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단일 논리 구조로 병합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여러 수준의 이론적 긴장을 초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물론 김겸의 논의는 바흐친 개념을 은유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그러한 확장이 성립하려면, 언어적 발화 이론이 비언어적 매체로 이행되는 논리적 경로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Ⅱ. 바흐친 대화 이론과의 비정합성
김겸이 2022년 황순원 문학제 논문으로 발표한 「디카시의 철학적 가능성에 관한 시론」은 바흐친 이론 적용 부분에서 이론적 긴장이 드러난다.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본다.
핵심은 ‘바흐친의 대화 이론과 다성성 개념’을 디카시의 미학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개념 부정합과 논리적 비약이 발생했다.
1. 바흐친의 ‘대화성’과 ‘다성성’ 개념의 부정합
김겸의 논문은 디카시의 특성을 사진과 시가 대등하게 결합하여 서로 대화적 관계를 이루는 다성성의 장르라고 설명한다. 이를 바흐친의 ‘다성성(polyphony)’과 ‘대화적 관계(dialogic relation)’에 대응시킨다.
바흐친의 ‘다성성(polyphony)’ 개념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에서 비롯한다. 서사 속 다중 화자의 독립적 발화를 강조한다.
비록 변증법적이라 할지라도 독백적 결론으로서의 이념이 아니라, 목소리들의 상호 작용의 사건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최후의 소여성이다.
이것이 토스토예프스키의 대화가 플라톤의 대화와 구별되는 점이다. 후자 속에는 비록 그것이 독백화되고 교육적인 대화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목소리들의 다성성이 이념 속에서 효력을 잃게 된다.
- 미하일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7, 283쪽.
이와 같이 ‘발화적 주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비언어적 기호인 사진은 바흐친의 대화 이론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다. 김겸이 주장하는 바흐친의 ‘다성성(polyphony)’과는 거리가 멀다. 다음은 바흐친이 말한 ‘대화적 관계(dialogic relation)’ 개념을 검토함으로써, 김겸의 해석이 왜 개념적 부정합을 낳는지를 구체화해 본다.
대화적 관계는 특수한 성격을 가지며,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비록 변증법일지라도)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것(구성적-통사론적인 것)으로 귀결될 수 없다. 대화적 관계는 다양한 언어 주체들의 전체 발화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이차적이며, 대부분 유희의 성경을 띤다).
(……)
대화적 관계는 담화적 소통 속의 모든 발화들 간의 (의미) 관계이다. 어떤 두 개의 발화라도, 우리가 그들을 (사물이나 언어학적 범례로서가 아니라) 의미 평면 속에 대조시키면, 그들은 대화적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되지 않은 대화성의 독특한 형식이다(예를 들어 하나의 문제에 대한 여러 시대의 여러 학자와 현인들의 小考).
― 위의 책, 422쪽.
이에 대입해 보면, 김겸의 주장은 이론적 긴장이라는 문제점이 있다. 바흐친이 말하는 대화적 관계는 언어적 주체들 간의 담론적 상호 작용을 뜻한다. 즉, 발화의 주체를 가진 언어들 사이의 상호 관계이다. ‘사진 이미지’처럼 비언어적, 비발화적 대상을 직접 포함하지 않는다.
바흐친의 대화성(dialogism)은 언표와 언표, 발화와 발화,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생기는 의미적 긴장을 뜻한다. 언어와 이미지의 조합은 그의 언어 철학적 범위 밖이다. 따라서 사진과 시의 상호 작용을 ‘바흐친적 대화성’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개념을 언어 철학적 맥락에서 미학적 구성의 관계로 오해한 것이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시의 병치는 ‘표상체 간 상호텍스트성’이다. 바흐친이 말한 ‘다성적 발화 관계’가 아니다. 즉, ‘언표적 주체’(speaking subject)가 없는 이미지가 ‘대화적 주체’로 작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개념적 부정합이 드러난다.
따라서 김겸의 이론적 시도는 디카시의 매체적 상호 작용을 설명하려는 의의는 있으나, 바흐친 개념의 언어철학적 한계를 고려하지 못한 점에서 개념적 확장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2. 카니발화의 미학과 디카시의 형식 결합의 혼동
김겸은 디카시의 확장성을 바흐친의 카니발화 개념과 상통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단성적 세계를 복수악센트화(Multi-Accentualization)하는 미학적 의미”라고 설명한다. 복수악센트화’가 바흐친이 사용한 맥락(언어의 이데올로기적 다의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부족하다. 먼저 바흐친의 언어의 사회 이데올로기적 다의성 논의를 살펴보자.
의도하는 대상은 바로 주제를 복수의 다양한 목소리들로 이끌어 가는 것, 말하자면 복수음성성과 다양한 음성성이다. 바로 목소리들의 배열과 그것들의 상호 작용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주요한 것이다.
― 위의 책, 282쪽.
이와 같이 김겸의 해석은 바흐친의 언어철학적 맥락과 괴리를 드러낸다. 즉, 이론적 긴장이라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또한, ‘카니발화(carnivalization)’는 사회적 위계의 전도, 비속성과 고급문화의 뒤섞임, 웃음과 탈권위의 공간을 뜻하는 문화 사회학적·서사적 개념이다. 다음 인용은 바흐친의 설명이다.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 속에 채워 둔 의미 충만한 보물은 수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 동안 창조되고 집성(集成)되었다. 그 보물은 언어 속에, 그것도 비단 문학어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아직 문학어로 편입되지 못한 민중언어의 층위 속에, 언어적 소통과 교제의 다종다양한 장르와 형식 속에,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주로 카니발적인) 강력한 민중문화의 형식 속에, 연극과 볼거리 장르(신비극과 어릿광대극 등등) 속에, 그리고 선사 시대의 고대성에 뿌리를 둔 플롯 속에, 마지막으로, 사유의 형식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 위의 책, 472쪽.
이러한 카니발적 설명은 장르 혼합(heteroglossia)이나 언어의 복수성과 맞물리지만, 디카시처럼 ‘사진과 시의 매체 결합’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는다. 즉, 카니발화는 사회적 언어들의 충돌과 탈위계적 유희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시각 매체와 언어의 단순 병치를 해석하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사진과 언어의 대등한 결합이 카니발화된 구조”라는 주장은 카니발화의 사회 언어학적 맥락을 미디어 미학으로 이동한 것이다.
결국, 카니발화는 ‘언어적, 사회적 권력 질서의 전복’이다. ‘매체 간 융합’이 아니다. 디카시의 형식 실험을 카니발화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적 도약이다.
3. ‘다성성’과 ‘원심성’의 혼동
김겸은 디카시가 서정시의 구심적 언어성과 사물의 원심적 언어성이 교차하는 다성적 담화 구조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바흐친의 ‘다성성’은 구심과 원심의 역학적 구조가 아니다. 서로 다른 가치 체계와 언어 양식의 병존을 가리킨다.
바흐친은 ‘단성적 서사’(Tolstoy적 서술)와 ‘다성적 서사’(Dostoevsky적 대화)를 구분하면서, 구심과 원심의 물리적 은유가 아닌 의미의 상호 의존성과 비결정성을 강조한다.
김겸이 말한 ‘구심적 언어와 원심적 언어’는 오히려 들뢰즈적 리좀 구조나 탈영토화 논의에 더 가깝다. 바흐친의 언어 사회학에서는 이런 물리적 역학 모델을 쓰지 않는다.
이를 요약하면, ‘다성성=구심과 원심의 긴장’으로 이해한 것은 바흐친의 의미론적 다성성을 구조역학적 모델로 단순화한 해석상의 비약이다.
4. ‘사진’의 존재론과 바흐친의 담론 이론의 긴장
바흐친의 언어 이론은 모든 발화가 ‘응답성’(responsivity)과 ‘의도성’(addressivity)을 전제한다고 본다. 즉, 누군가의 발화는 항상 ‘누군가를 향한 말’이어야 한다. 그 말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발화의 본질적인 (구성적) 특징은 누군가를 향하는 지향성, 수신자 정향성이다. 비개인적이며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로도 향하지 않는 언어의 의미적 단위, 즉 단어와 문장과 달리, 발화는 작가(따라서 우리가 이미 말했던 표현성도 갖게 된다)와 수신자를 갖는다.
― 위의 책, 282쪽.
이와는 달리, 사진은 발화 주체가 없는 시각적 표상이다. 응답성과 의도성이 언어적 발화와 동일한 층위로 성립하지 않는다. 이를 무시하고 사진을 ‘하나의 발화로서 대화적 주체’로 설정하는 것은 바흐친의 언어 행위 이론의 기본 전제(발화의 주체성)를 약화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바흐친의 담론 개념은 언어적 주체를 전제한다. ‘사진’을 그와 동등한 대화적 발화로 보는 것은 철학적 전제의 차이에 해당한다.
5. 바흐친의 이론과 이후 정동, 들뢰즈 논의 연결의 불연속성
김겸은 바흐친 이후 들뢰즈, 라캉, 마수미, 랑시에르 등을 나란히 배치하지만, 바흐친의 언어 사회학적 대화 이론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탈코드화된 생성의 철학, 또 마수미의 비언어적 정동론은 철학적 기초가 전혀 다르다.
바흐친은 언어적 담론과 사회적 의미 생산의 관계를 탐구했다. 들뢰즈와 마수미는 언어 이전의 신체적 흐름과 감각적 강도를 탐구했다. 그런데 김겸의 논문에서는 바흐친의 ‘대화적 관계’가 들뢰즈의 ‘사이에-존재하기(être-entre)’로 연속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제시한다. 하지만 이는 학문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비약이다.
이를 요약하면, 바흐친의 언어 철학(언표성)과 들뢰즈의 존재론(탈언표성)을 동일 선상에서 연결하는 것은 ‘언어 이후의 사유’를 언어 중심 이론으로부터 곧장 도출하는 비약이다. 즉, 언표적 대화성과 비언표적 생성성을 혼동한 철학적 전제의 차이이다.
6. 소결론
김겸의 논문은 디카시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로서 참신하다. 하지만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매체 미학의 언어로 전유하는 과정에서 개념적 전도(轉倒)가 발생했다. 즉, 바흐친의 언어적 다성성을 매체 간 병치의 미학으로 오용하였다. ‘대화성’을 ‘상호텍스트성’과 혼동하고, ‘카니발화’을 ‘형식 혼합’으로 축소하였다.
결국,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의미의 사회적 상호성’에서 ‘매체의 미학적 병치’로 잘못 이동시킨 이론적 긴장을 내포한다. 이 점이 가장 핵심적인 비판 지점이다.
Ⅲ. 바흐친의 구심(求心)과 원심(遠心) 개념과의 부정합성
논문에서 제시한 ‘구심(求心)과 원심(遠心)’ 개념의 적용은 바흐친의 언어 철학적 개념 체계와 구조적으로 맞지 않다. 이 부분은 논문 전체에서 가장 미묘한 철학적 비정합이 드러나는 지점 중 하나이다. 이는 오류라기보다 개념적 비약에 가깝다.
1. 김겸의 논의 요약
김겸은 디카시의 미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바흐친의 ‘구심’과 ‘원심’ 개념을 차용하지만, 그 사용 방식은 바흐친이 『소설 속의 담론(slovo v romane/Discourse in the Novel)』에서 제시한 사회 언어학적 개념과는 범주적으로 다르다. 김겸에게서 구심성과 원심성은 각각 서정시의 장르적 성질과 매체 결합을 통해 확장되는 미학적 방향성으로 재해석되지만, 바흐친의 구심·원심 개념은 언어 내부에서 작동하는 사회적·이데올로기적 힘의 긴장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바흐친의 다성성과 카니발화 개념은 언어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철학적 맥락을 벗어나, 디카시의 미학적 효과를 설명하는 은유적 장치로 전치된다.
김겸은 디카시의 장르적 특성을 사진과 시의 관계 재정의에서 찾는다. 그는 “오늘날 디카시의 장르적 정합성은 ‘영상과 문자가 (대등하게) 결합하여’ 완성되는 것이지, ‘영상에 시가 (종속적으로) 결합된 것은 아니다’는 데 핵심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 명제는 이후 김겸의 다성성, 대화성, 정동 논의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바흐친의 언어 철학과의 범주적 이탈이 발생한다.
실제로 그는 “시가 지니는 구심적 장르로서의 가치”와 “원심적 확장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와 사진의 결합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용은 바흐친이 『소설 속의 담론』에서 제시한 구심화·원심화 개념이 지닌 사회언어학적 맥락과는 범주적으로 상이하다.
2. 바흐친의 원래 개념: 구심화(centripetal)와 원심화(centrifugal)
바흐친은 『소설 속의 담론』에서 언어의 사회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구심적 힘’(centripetal forces)과 ‘원심적 힘’(centrifugal forces)을 제시했다. “담론의 주체가 행하는 모든 구체적인 발언은 구심적 힘들과 원심적 힘들이 동시에 작용을 가하는 한 지점이다.” 또한, “모든 발언은 ‘단일 언어’(그 구심적인 힘과 경향)에 참여하며, 동시에 사회‧역사적인 언어적 다양성(그 원심적이고, 분리적인 힘)을 공유한다.”(미하일 바흐찐, 전승희‧서경희‧박유미 옮김,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창작과비평사, 1988, 179쪽)라는 주장에 주목해 본다.
구심적 힘은 언어를 통일하고 표준화하려는 사회적·제도적 힘이다. 예를 들면, 표준어, 공적 언어, 권력 담론 등이다. 원심적 힘은 언어를 다양화하고 분화시키려는 힘이다. 예를 들면, 방언, 속어, 개별 발화의 특수성 등이다. 즉, 이 개념은 언어 사용의 장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긴장과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가리킨다. ‘내면과 외부’, ‘감정과 사물’의 이분법이 아니다.
3. 김겸의 변용에서 발생한 개념적 부정합
가. 사회 언어학적 개념을 심리 미학적 층위로 이동
김겸의 구심·원심 개념 이동은 “시가 지니는 구심적 장르로서의 가치는 사진과 언어가 융합된 디카시에서는 원심적 확장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바흐찐이 말하는 카니발화의 개념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단성적 세계를 복수악센트화(Multi-Accentualization)하는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라는 문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되는 ‘구심’과 ‘원심’, ‘카니발화’는 바흐친이 『소설 속의 담론』에서 제시한 사회 언어학적 개념과는 범주적으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바흐친의 구심과 원심은 언어의 사회적 운동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김겸의 논의에서는 결과적으로 독자는 구심·원심 개념을 개인의 서정적 방향성과 사물 중심의 미학으로 이해하도록 유도받게 된다. 이는 바흐친의 사회 언어학적 맥락을 심리적, 미학적 내외 구조로 잘못 치환한 것이다. 바흐친의 구심과 원심은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장력’이다. ‘정서와 사물의 대비’가 아니다. 이 논문은 언어의 사회적 힘을 개인의 감정 방향성으로 축소시켰다.
나. 다성성과의 관계 설정 비약
바흐친에게서 ‘다성성’은 구심과 원심의 공존 결과로서, 다양한 언어적 가치들이 한 작품 안에서 동등하게 발화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김겸의 논문은 ‘구심적 언어성’과 ‘원심적 언어성’을 두 발화 주체의 대립 구조처럼 설정했다. 즉, 서정적 자아와 사물의 발화가 긴장하는 ‘이원론적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바흐친의 비결정적·다원적 언어관을 ‘서정 주체와 사물’의 이항적 대립 구조로 단순화한 것이다. 바흐친의 다성성은 ‘이항적 긴장’이 아니다. ‘다층적 공존’이다. 김겸의 논문에서 구심과 원심 구조는 다성성을 이항 대립의 구도로 축소한다.
다. 물리적 은유의 과도한 형식화
‘구심’과 ‘원심’은 물리학적 은유이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전제한다. 바흐친의 언어 개념은 본질적으로 ‘비중심적’이다. 즉, 모든 발화는 이미 다성적 관계 속에서 중심 없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김겸의 논문은 이 비중심적 사유를 ‘중심(자아)과 주변(사물)’의 운동 모델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바흐친의 탈중심적 언어 철학이 다시 중심과 주변의 구조로 되돌아간 셈이다. 역설적으로, 바흐친을 인용하면서도 그의 ‘비중심성’이 사라지고 다시 ‘서정적 중심’을 회복하는 모순이 생긴다. 이는 바흐친의 개념을 빌려 서정적 중심성을 재강화한 아이러니이다.
라. 들뢰즈적 해석과의 혼동
김겸의 논의는 구심·원심의 긴장을 ‘생성’의 과정으로 독해하도록 이끈다. 이 구조를 ‘생성’(becoming)의 장으로 읽는다. 이 ‘생성’의 개념은 바흐친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적 생성론에 가깝다. 즉,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언어의 운동’, ‘다른 매체와의 접속을 통해 새로운 감각적 층위를 형성한다.’ 이런 논리는 이미 언어 내부의 사회적 역동을 설명하는 범위를 넘어, 존재론적 생성의 문제로 논의가 이동한다.
따라서 김겸의 구심과 원심 해석은 바흐친보다는 들뢰즈적 탈영토화 모델의 존재론적 비정합과 혼합한 것으로 읽힌다. 양 이론은 접합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매개 논증이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정합으로 보인다.
4. 소결론
김겸이 시도한 ‘구심과 원심의 대화적 구조’는 디카시의 내면성과 외부성의 긴장을 표현하기 위한 참신한 은유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흐친의 개념을 이 구조에 대입하면서 다음과 같은 부정합이 발생했다.
사회 언어학적 개념을 심리 미학적으로 전치하여, 개념의 층위가 달라졌다. 다성성의 탈중심성을 서정적 중심과 주변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들뢰즈적 생성론과의 혼합으로 인해 바흐친의 담론 철학적 일관성을 흔든다.
결국, ‘구심과 원심’이라는 은유는 디카시의 미학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다. 그것을 바흐친의 언어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한 것처럼 제시하는 것은 개념적 도약을 초래한다.
이를 정리하면, 김겸의 구심과 원심 모델은 디카시의 미학적 긴장을 설명하기 위한 창의적 은유이다. 하지만 바흐친의 구심과 원심 이론과는 범주, 맥락, 목적 모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바흐친 개념의 비철저한 전유(appropriation) 또는 맥락 이탈적 차용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이상의 논의는 디카시 담론이 차용해 온 이론적 개념들의 문제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 장의 검토는, 디카시를 둘러싼 이론적 시도가 일정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이 원전의 맥락과 긴장 관계 속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채 사용되는 경우가 반복되어 왔음을 지적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는 개별 연구자의 성과를 평가하거나 의도를 문제 삼기보다는, 디카시 담론 전반이 향후 보다 정밀한 개념 독해와 이론적 자기 점검을 요구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장의 비판은 디카시 논의를 보다 견고한 학문적 토대 위로 이행시키기 위한 문제 제기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Ⅳ. 정동 개념과의 부정합성: 바흐친의 대화 이론과 ‘정동 생성’ 개념의 존재론적 긴장
김겸의 「디카시의 철학적 가능성에 관한 시론」에서 바흐친 이론 다음으로 가장 심각한 이론적 긴장을 형성하는 지점은 정동(affect) 개념의 도입 방식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용어 차용의 문제가 아니라, 정동 개념이 전제하는 존재론적 층위와 바흐친의 언어 철학이 전제하는 의미 생성의 조건을 충분히 분리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구조적 부정합에 해당한다.
1. 김겸의 정동 개념 사용 방식
김겸은 디카시의 소통 구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디카시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존재들―송신자, 실제 시인, 포착된 사물(들), 내포 화자, 화자, 청자, 내포 독자, 실제 독자―사이의 대화적 관계는 곧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정동(affect)의 생성 과정을 내포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정동은 사회적으로 약호화된 감정이 아니라 ‘재현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에 신체 수준에서 작동하는 강렬도’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는 브라이언 마수미를 비롯한 들뢰즈와 스피노자 계열 정동 이론의 핵심 전제를 비교적 정확히 요약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정동 개념이 곧바로 바흐친의 ‘대화적 관계’와 등치되거나 동일한 생성 과정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2. 정동 이론의 철학적 전제
김겸이 인용하는 정동 개념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철학적 전제를 지닌다. 정동은 “재현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의 층위에 위치한다. 정동은 의미(signification) 이전의 신체적 강렬도(intensity)이다. 정동은 주체적 의식이나 언어적 판단을 거치지 않고 발생한다. 정동은 비표상적(non-representational)이며 비주체적(non-subjective) 흐름이다.
김겸 자신도 “정동은 의식을 매개할 시간적 여유 없이 바깥의 자극이나 정보가 직접적으로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정동을 언어 이전적·비의미적 층위에 배치한다.
3. 바흐친 이론과의 존재론적 전제 차이
반면, 김겸이 함께 호출하는 바흐친의 이론은 전혀 다른 존재론적 전제를 갖는다. 바흐친에게서 대화성(dialogism)이란, 언술과 언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이며 “기호적인 모든 현상”에서 발생하지만, 언제나 의미화된 발화(utterance)를 전제한다.
김겸 역시 이를 인용하여 “바흐친에 따르면 ‘대화적 관계’란 언술과 언술 사이에서 발생”하며, “대화적 관계는 기호적인 모든 현상에서 일어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호적 현상’은 이미 언어적·사회적으로 의미화된 기호 체계 내부를 가리킨다. 바흐친의 대화성은 언어 안에서만 성립하는 사회적 의미 생성의 운동이지, 언어 이전의 신체적 강도나 비의미적 에너지의 흐름을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4. 핵심 부정합 지점
가. 대화적 관계 = 정동 생성이라는 암묵적 등치
김겸은 ‘존재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는 곧 정동의 생성 과정’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정동의 생성과 대화적 관계를 동일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개념적 혼선을 야기한다. 정동은 ‘재현 이전’, ‘개념화 이전’의 층위에 위치한다. 대화적 관계는 언술·기호·의미의 교환을 전제한다.
따라서 정동의 생성 과정을 곧바로 ‘대화적 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의미 이전의 강도와 의미 생성의 과정을 동일한 층위에 배치하는 범주 이탈에 해당한다.
나. 정동의 비주체성과 발화 주체 개념의 병치
김겸은 디카시에서 ‘사물들이 주체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적 국면을 형성한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정동 이론에서 말하는 정동은 주체의 의지나 발화 이전에 발생하는 비주체적 흐름이다. 반면, 바흐친의 대화성은 언제나 발화 주체와 타자를 전제한다.
이 두 개념은 ‘관계’라는 유사한 어휘를 사용하지만, 하나는 주체 이전의 강도를, 다른 하나는 주체 간 의미 교환을 가리킨다. 김겸의 논의는 이 차이를 명확히 분리하지 않은 채, 정동을 곧바로 대화적 의미 생성의 동력으로 전환시킨다.
다. 비표상적 정동과 표상 예술로서의 디카시
정동 이론은 기본적으로 비표상 철학이다. 반면, 김겸이 분석하는 디카시는 사진과 언어라는 두 개의 표상 매체로 구성된 예술 형식이다. 김겸은 들뢰즈와 마수미의 정동 이론을 참조하여 정동을 재현 이전의 감각적 강렬성으로 이해하는 분석 틀을 도입한다. 실제 분석에서는 사진과 언어의 의미 작용, 해석의 전환, 상징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로 인해 정동은 철학적 개념이라기보다, 사진과 시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효과를 지칭하는 느슨한 은유로 기능하게 된다.
5. 소결론: 개념 확장이 아닌 개념 병치의 문제
김겸의 정동 개념 차용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 바흐친의 언어 철학과 결합되는 과정에서 정동의 언어 이전성·비주체성·비표상성이 유지되지 못한다. 둘째, 정동 이론의 핵심 전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 디카시의 해석학적 과정 전체를 포괄하는 만능 개념처럼 사용된다.
결국, 김겸의 ‘정동’은 들뢰즈나 마수미가 말한 정동이라기보다는, 의미 생성 이전의 감각적 분위기나 정서적 반응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완충 개념에 가깝다. 이는 철학적 가능성의 확장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이론적 층위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한 채 병치함으로써 발생한 개념적 병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Ⅴ. 논문의 문제점과 대안 제시
1. 논문의 비약과 문제점
김겸의 논문은 디카시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의욕적인 시도이지만, 이론 전유의 정합성과 개념적 엄밀성 면에서 반복적인 비약을 드러낸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흐친의 언어 철학적 개념들이 미디어 미학적 은유로 전치되면서, 원래의 사회 언어학적·윤리적 맥락이 소거된다는 점이다.
우선, 김겸은 사진과 시의 관계를 ‘대화적 관계’로 규정하지만, 이때의 대화성은 바흐친이 말한 발화 주체 간의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상호 관계라기보다, 텍스트 혹은 매체 간의 의미 병치에 가깝다. 이는 바흐친의 대화성(dialogism)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과 혼동한 결과로, 언어 사회학적 개념이 미디어 간 상호 참조의 은유로 축소되는 전형적인 개념 전도이다.
또한, 김겸은 디카시의 사진을 언어 이전의 정동적 층위로 설정하고, 이를 디카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시는 사진이 생성한 정동에 대한 언어적 응답 형식으로 설명된다. 이는 들뢰즈, 마수미 등의 정동 이론을 호출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친의 이론은 언어 이전의 감각이나 비언어적 정동을 전제하지 않는다. 바흐친에게 의미 생산은 언제나 언표적 관계 안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이로 인해 김겸의 논의에서는 바흐친의 대화성, 들뢰즈의 생성 존재론, 마수미의 감각 정치학이 동일한 이론적 지평 위에 병치되며, 서로 다른 존재론적 층위가 구분되지 않은 채 혼합된다.
응답성(responsivity) 개념 역시 축소된다. 바흐친에게 응답성은 타자에게 향하는 윤리적·사회적 책임 행위이지만, 김겸의 논의에서는 감각적 공명이나 미학적 반응성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흐친의 윤리적 대화 철학을 미학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개념적 축소이다.
더 나아가, 김겸은 사진을 하나의 발화 개념의 연장선에서 해석하며, 시와 사진의 대화적 관계를 설정하려 한다. 사진은 언표 행위가 아닌 시각적 표상이다. 발화 주체의 의도성과 언어적 행위를 전제로 하는 바흐친의 언표 이론을 비언어적 이미지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기호학적 범주 이탈에 해당한다. 김겸의 논의는 사진과 시 사이의 위계적 종속을 부정하고, 대등한 의미 작용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역시 이론적 가정에 머물며, 실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충분히 검증되지 않는다.
김겸은 디카시를 분석하며 사진을 언어 이전의 정동적 층위로 설정하고, 시를 이에 반응하는 언어적 형식으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들뢰즈와 마수미의 정동 이론을 참조하여, 정동을 재현 이전의 감각적 강렬성을 이해하는 분석 틀을 도입한다. 또한, 사진을 발화 개념의 연장선에서 해석함으로써 시와의 대화적 관계를 설정하려 하지만, 이러한 발화 개념은 바흐친의 언표 이론과는 다른 층위에서 작동한다. 그 결과 사진과 시의 관계는 위계적 종속이 아닌 대등한 의미 작용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지만, 이론적 정합성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2. 대안 제시
디카시의 철학적 가능성은 정동과 대화성을 단순 결합하는 데서 찾으면 한계가 있다. 두 층위 간 매개적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데서 모색해야 한다.
가. 현상학적 대안: 메를로 퐁티
감각과 언어를 별개 층위가 아닌 ‘몸의 지각’ 속에서 통합된 의미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사진의 감각 경험과 시의 언어 표현을 동일한 지각의 상이한 양상으로 이해한다.
나. 시각문화론적 접근
사진과 언어를 사회적 기호 체계로 분석함으로써, 정동의 비언어성을 약화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적 맥락 내에서 의미화 과정을 설명한다. 이는 바흐친의 사회 언어학적 통찰을 유지하며 정동의 감각 층위를 포섭할 수 있다.
다. 벤야민의 이미지 철학
벤야민의 ‘번역(translatio)’ 개념을 빌려, 디카시 내 사진은 언어로 완전히 번역하지 않는 잔여적 이미지로 해석한다. 이 틀은 정동의 비언어성을 유지하면서 언어와의 생산적 상호 작용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세 관점은 상호 보완적이다. 현상학적 ‘몸의 지각’ 개념을 중심으로 시각문화론과 이미지 철학의 통찰을 통합해 디카시의 철학적 탐구를 보다 깊고 설득력 있게 확장할 수 있다.
Ⅵ. 나가기: 개념의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이 글이 문제 삼는 것은 철학 이론의 차용 자체가 아니다. 문학 담론에서의 이론적 차용은 언제나 가능하다. 또한, 불가피하다. 그 가능성은 개념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론적 전제를 지닌 이론들이 그 차이에 대한 자각이나 매개 없이 동일한 설명 장치로 호출할 때, 그 결과는 확장이 아닌 개념적 이탈에 가깝다. 디카시는 바흐친보다 기호학적 상호매체성(intermediality)이나 현상학적 지각 이론에서 다뤄져야 한다.
이 글은 문학을 철학의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을 호출함으로써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담론이 철학적 전제 위에서 실제로 성립하는지를 검증하는 작업이다. 철학은 장식적 인용의 대상이 아니다. 호출하는 순간, 담론 전체에 일관성과 정합성을 요구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철학을 원용한 문학 담론은 최소한 그 철학적 전제와 충돌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리를 구성해야 한다.
특히 바흐친의 대화성과 정동 이론을 동일한 설명 틀 안에서 결합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문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바흐친의 대화성은 사회 언어학적·언표적 구조를 전제로 하며, 의미의 생성과 응답 가능성을 중심으로 성립한다. 반면, 정동은 비언표적·비주체적 강도로서, 의미 이전의 흐름과 접속을 문제 삼는다. 이 둘은 서로 보완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동일한 설명 장치 안에서 동시에 작동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층위에 놓여 있다. 이 차이를 삭제한 채 이루어지는 이론적 결합은 이론의 확장이 아니라 개념의 병치에 불과하다.
작품에 대한 설명 가능성이 곧 이론의 정합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론도 사후적 해석의 언어로는 일정한 설명력을 획득할 수 있다.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이론이 성립한다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다. 문제는 그 설명이 이론 내부에서 스스로를 모순 없이 지탱하는가에 있다. 설명의 효과가 아닌 전제의 일관성이야말로 이론적 담론의 기준이다.
이 비평은 특정 장르나 창작 실천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급하게 호출한 철학적 개념들을 충분한 검증 없이 적용할 때, 장르 자체가 이론적으로 불안정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철학은 장르를 보호할 수 있지만, 그 보호는 개념의 정확성과 책임 위에서만 가능하다.
새로운 시도라는 평가와 이론적 정합성은 동일한 차원에 놓이지 않는다. 시도의 용기와 개념의 정확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를 검증하지 않는 한 전자는 담론으로 지속하기 어렵다. 본 비평의 목적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그 가능성을 개념적 책임 위에서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묻는 데 있다. 문학 담론에서 철학을 호출한다는 것은 자유의 선언이 아닌 자유를 감당할 책임을 스스로 떠안는 일이다.
이러한 한계를 고려할 때, 향후 디카시 연구의 대안적 방향은 새로운 이론의 추가적 호출보다는, 이미 호출된 개념들에 대한 사용 조건과 적용 범위를 엄격히 재정의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진과 시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외부 철학 개념을 차용하는 방식 대신, 시 장르 내부의 미학적 전통―예컨대 시의 장르성, 매체 간 긴장, 의미 생산의 조건―을 중심으로 한 내재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통 예술론에서 논의되어 온 시·서·화의 관계, 감응과 해석의 층위에 대한 사유는 디카시를 ‘새로운 것’으로 선언하기보다, 기존 미학적 계보 속에서 재위치시키는 데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디카시를 이론적으로 과잉 정당화하는 대신, 그 미학적 성립 조건을 보다 신중하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연구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겸의 논의는 개념적 도약을 내포하지만, 디카시를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적 가치는 분명하다.
이 글의 비판은 김겸 논문이 제시한 개별 개념의 정당성이나 철학적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또한,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특정 이론의 존재론적 비정합이나 인용 상의 비약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론적 층위가 충분히 구분되지 않은 채 결합할 때 발생하는 개념적 긴장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둔다.
다시 말하자면, 이 글은 김겸의 논의를 ‘틀린 주장’으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동 이론, 바흐친의 대화성, 사진 기호 이론이 동일한 해석 틀 안에서 병치할 때 드러나는 이론적 한계와 해석상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는 디카시의 철학적 논의를 보다 엄격한 개념 구분 위에서 확장하기 위한 문제 제기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는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규범적 비평이라기보다, 디카시 담론이 참조하는 이론적 자원들의 적용 방식과 개념적 호환 가능성을 점검하는 메타 비평적 시도로 위치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저서:평론집 10권, 이론서 4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