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삶의 축제(The Festival of Life)

이태상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공황장애(恐慌障碍 panic disorder) 상태이지만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도 있었을까. 얼마 전부터 미국의 청소녀, 청소년들의 유행어가 제기랄 난 아무것도 () 수조차, () 수조차, (상상할) 수조차 없네란 뜻으로 (I can’t even. I’m unable to even. I have lost my ability to even. I am so unable to even. Oh, my God. Oh, my God!)’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젠 총체적으로 파산에 직면한 온 인류의 비명(悲鳴)에 가까운 넋두리가 될 줄이야!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III 1955 - )코로나/코비드-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What is the Corona/ Covid-19 Virus Really Teaching us?”란 메시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14개 항목으로 된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그렇듯이) 우리 모두 이 바이러스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

 

사람들 사이에 어떤 국경이나 경계도 있을 수 없고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동안 우리가 망각해온 건강한 삶의 중요성. (인생무상) 삶의 유한성(有限性)과 허무성(虛無性)을 각성 인지하고, 우리 서로 도와 삶을 공유(共有)해야 한다는 것.

 

우리 인류사회가 물질문명에 오염되고 불필요한 사치품에 중독되어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인 물과 식료품 및 질병을 치료할 약품을 등한시(等閑視) 해왔다는 것.

 

끊어지고 멀어졌던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를 회복하는 것.

 

우리의 진짜 직업이란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보살펴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

 

인류가 (그 누구든) 아무리 과대망상(誇大妄想)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바이러스가 한순간에 회전하는 지구를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어, 상부상조(相扶相助)해서 상생(相生)의 길 아니면 사리사욕(私利私慾)으로 우리 모두의 자멸(自滅)의 길, 둘 중 양자택일(兩者擇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

 

(토끼가 제 방귀 소리에 놀란다고) 우리가 인류역사상 늘 당면하고 극복해온 수많은 위기 중 하나인 이 바이러스 역병(疫病)에 당장 인류의 종말(終末) 말세(末世)라도 닥친 듯 혼비백산(魂飛魄散)해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킬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침착하게 대응 대처할 수 있다는 것.

 

이 위기와 사태가 정말 종말(終末)이 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함으로써 새로운 시원(始原)이 될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자연환경, 자연과 기후를 파괴하고 오염시킴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 자체가 심하게 병들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중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

 

해법(解法) 없는 문제란 없는 법. 그러니 패닉하지 말고 계절이 바뀌듯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큰 재앙(災殃)으로 보지만 나는 이를 하나의 좋은 교정기(矯正機) 축복(祝福)으로 여긴다는 것.

 

이상과 같은 여러 마디를 단 한마디로 내가 줄이자면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라는 것이고, 이를 또 한두 마디로 부연하자면 우리 동양의 선인들이 일찍부터 명명백백히 단순명료하게 밝힌 피아일체(彼我一體)’물아일체’ (物我一體)’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절망감은 전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회의와 냉소와 혼란과 당혹감(當惑感)의 발로인 것 같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면서 너무 쉽사리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오늘날의 젊은이 아니 어린이들이 부모의 과잉보호로 심약한 악골들이 되어 쉽게 겁먹고 쉽게 상처 입고 쉽게 무기력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몇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잔혹 동시논란에서 표출되었듯이 정신적인 폭력으로 발산하게 되는가 보다. 또는 또 몇 년 전 천재 소녀 명문대학 허위 입학소동에서처럼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견디다 못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 입학했다고 자기최면이라도 걸게 되는 게 아닐까.

 

201566일자 중앙일보 기획 기사 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장 마리 르 프랭스 드 보몽(Jeanne-Marie Le Prince de Beaumont 1711-1780)의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에서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어떤 방어기제는 파괴와 자멸을 초래하고, 어떤 방어기제는 구원과 기적을 가져온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부정하고 퇴행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당장은 편안하고 빠른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또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승화하는 것이 힘들고 느리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된다. 오랜 금언인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문장에서 나는 전략(policy)을 치유(therapy)라고 고쳐 보고 싶다. 솔직함은 처세술이나 성공 전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로써 더욱 소중한 치유의 기술이니까.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지 못한 고통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일단 주사위부터 던져 볼 일 아니랴. 어차피 모든 것이 미지수인 마당에 매사가 하기 나름이고, 삶 자체도 살기 나름 아니던가. 심고 가꿔야 거두게 되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게 된다고, 숨을 내쉬어야 또 들이마실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공짜란 있을 수 없지.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삶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리라. 이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고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단지 학위나 졸업장으로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나 수지타산, 계산계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인간로봇을 생산하는 공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아무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남에게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잘 사는지를 자랑하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만큼 삶을 살아보는가가 아닐까. 다시 말해 삶을 얼마만큼 사랑해 보는가이리. 숨 쉬는 것부터, 눈 뜨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온갖 경이로운 소리를 들어 보는 것,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 섹스를 즐겨 보는 것, 연애를 하고 실연도 당해보는 것, 결혼도 하고 또 하게 되면 이혼도 해보는 것,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다 해보는 것, 어떤 일을 도모했다가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는 것,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키워본다는 것, 젊어 보기도 하고 늙어보기도 한다는 것, 눈을 감고 잠을 자면서도 꿈까지 꾸어본다는 것, 그리고 살다가 죽어본다는 것, 이 모두가 다 얼마나 기적 같은 일들이고 더할 수 없는 축복인가. 이 외에 우리가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체코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해온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 )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A sense of humor was a sign that a person could be trusted.)”, 그의 2013년 작 중편소설 제목도 반어법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무의미한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이다.

 

축제(祝祭)란 영원하지 않고 잠시 지속될 뿐이라면 다양한 놀이를 우리 각자 성향대로 식성대로 취향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해보기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음식도 다 한 가지 맛일 수 없고, 무지개도 단 한 가지 빛깔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맛보는 만큼, 꿈꾸는 만큼, 살아보는 것이 각자의 삶이 되리라.

 

축제의 존재 이유가 즐기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의 시인 안토니오 포르키아(Antonia Porchia 1885-1968)가 했다는 말을 우리 각자 심사숙고(深思熟考)해 보리라.

내가 네게 뭘 주었는지 알지만, 네가 무얼 받았는지 난 모르겠다. (I know what I have given youI do not know what you have received.)”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3.25 10:54 수정 2020.09.14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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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