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9화 김체건, 김광택
조선은 문(文)의 나라입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무(武)의 기상이 높았지만, 조선이 유학을 국가이념으로 하면서 사대부들이 우대를 받아 벼슬에서도 동반이라 하고 무관은 서반이라고 해서 차별해서 높은 직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조선 초기에 국방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어서 일정 기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태평성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자 양반은 군역을 면제하고 평민도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하는 바람에 나라의 국방이 소홀해져 결국 임진왜란의 외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 무예를 익히는 이가 줄어들고 무예기법이 많이 사라졌으나 꿋꿋한 무인의 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숙종시대에 유명한 무인은 김체건이었습니다. 그는 중인의 군교 출신으로 본국검법과 중국무술 등 각종 무예에 능했는데 임금의 명령을 받고 왜검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삼포왜란 때에 일본인들의 검술이 강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의 조총의 위력도 강했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칼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선군은 칼로 접전하는 경험이 없고 활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칼을 든 일본 수군이 갑판에 올라오지 못하게 판옥선에 철갑을 씌우고 송곳을 박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조정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왜검을 익히기로 하고 마땅한 인재를 찾았습니다.
조선의 무예는 물론이고 중국 무술까지 익힌 김체건은 조정에서 선발되어 왜관에 하인으로 침투했습니다. 일본은 검술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막았기에 그는 움을 파서 들어가 몰래 수련과정을 엿보고 익혔습니다. 또 사신을 따라 일본까지 건너가 신분을 위장하고 비밀리에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종 유파의 왜검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더 배울 것이 없자 귀국한 체건은 숙종 앞에서 시범을 보였는데 재를 땅에 뿌려놓고 맨발로 양쪽 엄지발가락을 이용하여 재를 밟았고, 칼춤을 추면 재에 발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로 몸이 날랬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김체건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경호무사이기도 했는데 글도 능했다고 하며 성격도 매우 호방해서 누구의 구속받기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연잉군의 사저 창의궁에 있을 때 궁비 사이에서 김광택을 얻어 자신의 검법을 전수했습니다. 전설적인 무인 부자가 탄생한 셈이지요.
김광택은 스승이자 아버지인 체건이 사망하자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며 신선술을 수련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집에 머물다 영조임금을 다시 만나게 되어 벼슬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한중일 3국의 검법에 통달했고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고 합니다.
김광택을 서술한 ‘김광택전’에 의하면 아버지 김체건의 검법을 전수받은 김광택은 검무를 잘했는데 만지낙화세(滿池落花勢)라는 기술 즉 온 땅에 꽃잎이 떨어지는 형세를 취하면 몸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고수였다고 합니다. 그는 영조에게 발탁된 뒤 금위영의 교련관이 되었는데 무인들의 으뜸 자리였습니다. 뒤에 종3품의 첨사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김광택이 신선술을 배운 것으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금강산까지 400리 길을 짚신 한 켤레로 두 번 왕복할 정도로 몸을 가볍게 해서 움직이는 경신술이 능했고 태식(호흡법)으로 겨울철에도 옷 한 벌로 지낼 수 있었으며 나이 80에도 얼굴이 어린아이 같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뒤에 시해(尸解)했다고 전해 오는데 육신을 버리고 혼은 신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무술과 신선술에 능한 김광택은 조선 최고의 무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백동수라는 서얼 출신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무술을 전수했습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백동수는 이덕무, 박제가 같은 이와 함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습니다. 무예도보통지는 한중일의 우수한 무술의 동작을 그림으로 그려 군인들이 익히게 한 책으로 그 당시 한중일 3국의 무술을 집대성한 귀중한 무예 서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