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박사 *
"나의 고난과 욥의 고난" (My Sufferings and Job’s Sufferings) (2)
성경에서 결백한 의인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잘 묘사한 그림이 곧 욥기서이다. 욥기는 신구약 전체를 집약해 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율법적인 변론과 예언적인 권고, 그리고 중보자의 필연성과 이에 대한 욥의 간구, 마지막으로 복음에로의 귀결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욥은 죄인인 인간, 욥의 세 친구는 율법의 변사, 그리고 엘리후는 예언의 권고자로 등장해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배경으로 하나님의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를 통하여 인간(욥)을 아주 드라마틱하게 다루고 계신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의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제가 곧 “상대 의”(율법의 의)로서의 “인간의 의”와 “절대 의”(믿음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욥은 “상대적 의”만 고집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의”를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께 무지하다는 책망을 들었고, 욥의 세 친구는 인과관계 즉 “상대적 의”의 차원에서 욥을 정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욥의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를 받도록 하셨으나, 엘리후는 욥과 욥의 세 친구가 “상대적 의”(인간의 의 곧 율법의 행위로서의 의)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과 더불어 “절대적 의”(하나님의 의, 곧 복음을 믿음으로서의 의)를 제시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엘리후는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욥이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욥이 “상대적 의”의 차원에서의 생각이고, 세 친구가 “까닭 없이 망하는 자 보았느냐,” “원인 없는 결과가 있느냐” 등 인과관계로 욥을 책망한 것도 역시 인간의 “상대적 의”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두가 율법적인 차원에서 변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후는 저희들의 논쟁을 주의 깊게 주시하며 말을 아끼고 침묵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절대적 의”의 차원에서 공평무사한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언급인 것이다(욥 32:6-10). 이런 면에서는 엘리후가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엘리후의 책망과 권고의 내용을 보면, 욥의 상대주의적인 “인간의 의”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절대적 의”에 이르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는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하지만, 엘리후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욥은 “상대적 자기 의” 즉 “율법의 의”를 고집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고, 욥의 세 친구는 상대주의적인 “율법의 잣대”(인과응보)로 욥을 정죄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지만, 엘리후는 상대적인 “인간의 의”를 버리고 회개하며,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 말하자면 “믿음의 의”(righteousness by faith/justification by faith: 믿음에 의한 칭의)를 입으라고 했기 때문에 책망 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대변자 입장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고난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우리 즉 나와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한 고난으로 이것은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 즉 주님의 복음으로 인한 “남은 고난”으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은혜와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사실, 이러한 마음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인 아가페 사랑이 우리를 권고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해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되느니라”(슥 4:6). 인간의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이 문제를 약속하신 성령께 부탁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영원토록 있을 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고난에 도전하는 신앙
(행 21:7-14, 벧전 2:19-20)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7-14)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19-20).
본래 인간이란 고통을 안고 나왔다가 고통을 지고 간다고 합니다. 세상에 울면서 나왔다가 울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나면서부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인간의 뒤를 따라 다닙니다. 고통이란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이지만, 생리학적으로 볼 때에, 생명을 보호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선물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면, 고통이란 신경조직에 있는 수백만 개의 통각 기관을 통해서 울려 나오는 위험 경보입니다.
통증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두뇌에 알려주는 경보로서 일종의 통신망과 같은 것입니다. 오래전에 북한 전투기가 귀순해 올 때에, 서울에서 울려야할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유사시에 경보를 울려서 신속히 알려 주는 것이 경보장치요 신체의 통각기관입니다. 신체 어느 부분이 질병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면, 신경망이 작동하여 두뇌(brain)에 알리게 되고, 모든 지체가 즉각 반응하여 비상사태로 돌입하게 됩니다. 만약에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면, 적의 기습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옛날 낙랑이라는 도시국가가 고구려의 공격에 맥없이 패하게 된 원인이 바로 자명고가 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체에도 만약에 통증이라는 고통이 없으면, 평안한 것 같으나 도리어 치명적인 문제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질병이 수만 가지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들 중에서도 현대병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병이 바로 암(癌)입니다. 암이 무섭다는 것은 바로 초기에 경계경보인 통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에 통증이 없기 때문에, 생명을 파괴해 들어오고 있는 암세포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기회를 놓쳐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초기에 통증을 수반한다면, 암같이 고치기 쉬운 병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센 씨 병(HD)이라고 하는 나병이 무서운 것도 바로 신경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손발이 문드러지고 눈과 코가 떨어져 나가도 감각이 없어서 통증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코가 떨어져 나가고, 눈을 잃어버릴 때까지 신체 기관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무감각증 환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겨울에 동사(凍死)하기 쉬운데, 역시 말초신경이 마비되어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면에서 볼 때, 고통이란 역시 우리의 신앙의 위험을 알려 주는 경계경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고통은 소리치기 때문에 루이스(C. S. Lewis)는 이것을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험신호를 알려주는 기관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부 다른 종교에서는 고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불교에서와 같이 그것에서 해탈하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들의 땅인 지구촌이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필연적인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의연하게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1) 먼저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고난에는 첫째로, 자기의 죄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벧전 2:19). 부모가 자식이 범죄 했을 경우에 매를 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잘 못했을 경우에 매를 드십니다. 히 12:7-8에 보면,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