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lvin Theological University 장부영 박사 *
[나의 고난과 욥의 고난] (My Sufferings and Job’s Sufferings) (4)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연구원으로 있는 아세나드 페트리씨는 사람의 고통에 대한 반응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고통이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벌벌 떠는 엄살 형, 둘째, 고통을 의식적으로 잘 견디는 인내 형, 셋째,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중간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통을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가, 공포심입니다. 사람이 공포에 질리게 되면, 전신의 생리적인 작용이 얼어붙어 죽게 됩니다.
어떤 사형수에게 죽이는 문제를 실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피를 빼서 죽이는 실험인데, 두 사형수 중에 한 사형수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다른 사형수의 혈관에 주사 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서 피가 다 빠지면서 안색이 하야케 되어 죽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사형수의 차례입니다. 역시 주사바늘을 혈관에 꽂고 피를 뺍니다. 하얀 커튼으로 가린 가운데 피가 쪼록 쪼록 빠지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사형수가 공포에 질린 채 안색이 하얗게 되면서 이제 나도 곧 죽겠구나 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몇 분 후에 역시 그 사형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수에게서는 피 한 방울도 뽑지를 않았습니다. 바늘은 꽂았으나 호스를 막고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 냈을 뿐입니다. 공포에 질려서 죽은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존 단(John Donne)은 “몸속에 있는 가스가 가짜 병을 일으켜서 마치 결석증처럼 통증을 유발하는 것 같이, 공포는 마음속에서 가짜 병을 일으켜 고통을 준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력감입니다. 두 마리의 쥐로 무력감을 실험했습니다. 한 마리는 따뜻한 물에 넣었더니 60여 시간 동안이나 헤엄을 치다가 죽었습니다. 또 한 마리의 쥐는 손에 꽉 쥐고 발버둥을 치기를 그만 둘 때까지 있다가 물속에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쥐는 2-3분 동안 헤엄쳐 보다가 가라앉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자기는 희망이 없다고 체념한 데서 오는 무력감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무력감이 얼마나 인간을 약하게 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 올 때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6:33). 그런데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위로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신혼 부부 중에 클라우디아(Claudia)라는 부인이 임파선 암에 걸려 대 수술을 받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괴로워하는 이 환자에게 문병객들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 한 여 집사님이 찾아 와서 하는 말이, 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니 회개하라고 충고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음에 한 부인이 찾아와서 고통 받는 것을 보고 격려와 호의로 고통을 잊게 해주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부인이 찾아왔습니다. 병을 고치는 방법은 신유의 방법밖에 없다고 권면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실에 누어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느라고 무진히 애를 쓰다가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네 번째로, 믿음이 가장 좋다는 한 부인이 찾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이런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라고 촉구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잔인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까지, 손톱 사이에 눌러놓고 계속해서 고문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몸서리쳐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온 분은 본 교회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욥과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본보기로 고난을 받도록 선택된 것이라고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하나님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저 보다 훨씬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하면서 고통에 못 이겨 절규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을 당할 때는 어느 누구의 위로도 효력이 없습니다. 더구나 주를 위한 모진 고난이 올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와 같은 신실한 종들의 권면도 자신에게 실존적인 감동으로 육박해오지 않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주신 진리의 영이요 보혜사 성령께서만 우리의 고난을 이해해 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주시며, 이길 수 있는 힘까지 주신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9-20)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가이샤라에 있는 빌립의 집에 들렀습니다. 빌립의 집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딸들도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여러 날을 유하고 있는데, 하루는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며 성령에 감동이 되어 예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예언입니다(21:11). 이 말을 듣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만류합니다(21:13).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체포되어 모진 고난을 당할 것이 빤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정확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고난에 도전하여 뛰어들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바울은 주를 위한 이 고난에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만류하는 사람들을 질책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21:13)면서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고 선전포고를 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고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닥치게 되면, 대부분이 고난을 피하거나 타협하든지 아니면 고난에 굴복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게 되면, 고난이 끝까지 따라옵니다. 고난과 타협하게 되면, 그 고난이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고난에 굴복하게 되면, 고난의 노예가 되어 불행해집니다. 바울은 비겁하게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간사하게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담대하게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바울이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용기가 어데서 나온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언자 아가보의 예언이 잘 못되었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보를 통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된다고 했지 성령께서 올라가지 말라는 예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이미 바울이 밀레도에 있을 때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20:22).
바울의 마음이 성령에 매여서 지금 결박과 환란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보통사람들이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난을 알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성령이 동의하고 동행해 주신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의 축복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무적이고 흥분된 상황입니까? 바울 사도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에 순교의 제물에 되려는 순간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무서운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바울의 비장하고 장엄한 순교의 정신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하시는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던 성령께서 고난에 도전하는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께서 응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바울도 가이샤라에서 순교의 고난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어떠한 고난에도 정면으로 도전하셔서, 신앙으로 승리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