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6화 기호품
우리나라는 예부터 음주가무(飮酒歌舞)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술을 즐기는 민족이기에 다양한 술이 만들어졌습니다. 집집이 술맛이 다르다고 할 정도로 가양주가 발달했으며 원나라 때 들여온 소주와 일제강점기 때는 청주, 광복 후에는 위스키와 와인 등이 술꾼의 입맛을 즐겁게 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막걸리가 원기를 돕는 보약이기도 했습니다. 몸에 이로운 약이 된다고 해서 약주(藥酒)라고 부르며 마셔댔지만, 흉년이 들어 쌀이 부족할 때는 금주령이 내려 조정과 백성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영조 때에는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벼슬아치가 술을 마셨다고 남대문 앞으로 끌고 와 군중 앞에서 목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영조가 직접 참수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왜 술을 좋아했을까요? 우선은 쌀을 중심으로 하는 곡주였기에 알콜 도수가 그리 높지 않았고 숱한 제사상에 꼭 필요한 것이 술이었기에 집에서 담가 보관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결혼할 때, 생일날, 초상났을 때 각종 의례에 꼭 필요한 것이 술이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나 친교의 목적, 힘든 노동을 할 때도 술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좋아도 술, 나빠도 술을 마셔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동양인은 선천적으로 알콜 분해 효소가 적다고 합니다. 몸이 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술의 소비량에 많고 알콜 중독자가 서양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이유는 술이 사교 모임을 위한 윤활유였기 때문입니다. 긴장을 풀고 숨김없는 대화를 위해 술이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즐겁게 떠들며 먹었기에 술의 해독이 건강을 위협하지 않았기에 많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간(肝)을 해쳐 주독이 코에 몰려 빨간 딸기코를 하고 술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두 번째로 좋아하는 기호품은 담배입니다. 담배는 고추와 함께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 들어온 기호품입니다. 대나무를 잘라 만든 담뱃대를 통해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것이 양반층에 유행하자 금세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담배는 몸 안의 기생충을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여인들도 피웠고 지금처럼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몰래 피우기도 했습니다. 담바고 타령이라는 담배를 칭송하는 노래도 유행했고 글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동네 담뱃가게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했지만, 값이 만만치 않아 가계에 부담되었습니다. 담배의 문제점은 수익성 때문에 밭에 농작물 대신 담배 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어나고 건강에 해롭다는 것입니다. 장기간 담배를 피워 해소병으로 고생하는 이가 많았다고 하는데 절에서는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담배를 권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담배가 정력감퇴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담배의 독성을 점차 알게 되자 농민은 물에 타서 뿌려 살충제로 쓰기도 했고 어떤 이는 자살할 때 쓰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적당량을 마시면 몸에 이롭다는 커피를 빼놓을 수 없군요. 커피 값이 식비의 절반 이상이 되어도 유명 브랜드의 커피를 즐기는 직장인이 많습니다. 원두커피를 만들어 먹는 애호가를 비롯해 달고 씁쓸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1회용 커피, 자판기 커피의 보급으로 커피의 수요량이 많아져 세계적으로도 커피 소비가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온 것은 고종 때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때는 커피를 가배차라고 불렀다는데 러시아 통역으로 고종의 총애를 받다가 버림받은 김홍륙이 궁녀를 매수해서 커피에 아편을 타 고종과 순종 부자를 독살하려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맛이 변한 것을 안 고종은 마시지 않고 뱉어버렸지만 독을 마신 순종은 평생 병약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6.25 전쟁때 는 피난처에서 커피광들은 다방에 갔습니다만 커피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배꽁초를 끓여 커피 색깔을 낸 물을 커피 대용으로 마셨다는 웃기는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