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각종 언론과 인터넷매체에서 “이순신장군도 관노와 잠자리를 했다”는 허위 글이 이슈화 되어 일파만파 유포된 사태에 대하여 지난 7월 21일 국회에서 덕수이씨 충무공파 이종천 종회장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모친상(喪)을 당한 상제의 몸으로 합천으로 백의종군하러 가는 중에 여산(礪山) 관아(익산 여산면 소재)의 관노(官奴, 남자 종)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자 종을 뜻하는 노(奴)자를 ‘여자종’으로 잘못 해석하고, ‘유숙할 숙(宿)’자를 ‘잠자리’로 오역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실제 관노(官奴)라는 말이 나오는 난중일기의 정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녁에 여산 관노(남자종)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 [夕宿于礪山官奴家, 中夜獨坐, 悲慟何堪(중복)]”(정유년 4월 21일, 《교감완역 난중일기》)
이 당시 이순신은 삭탈관직과 출옥, 모친상 등 최악의 상황에 놓인 상태였기에 이때 심정을 매우 비통하다고까지 일기에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인과 잠자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주자가례》 삼년상(三年喪)조의 “남녀가 방을 달리 한다[男女異室]”는 내용과도 맞지 않는다.
그 외 논란이 되었던 여진이란 인물이 있다. 1935년 일본인이 해독한 《난중일기초》를 보면, 병신년 14일, 15일자에 ‘여진입(女眞卄)’, ‘여진삽(女眞卅)’이 나오는데, 이 글귀 해석을 두고 세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고전 및 초서 관련한 다수의 전문학자들은 문맥에 맞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일본인의 오독자이므로 반드시 ‘함께 공(共)’자로 교감(校勘, 글자 및 번역 교정)을 해야 한다는데 한목소리를 내었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 등재 시 자문을 맡았던 교감완역난중일기 저자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이순신의 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는 일이 더 중요한데 지엽적인 자구 해석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왜곡으로 인한 사회의 잘못된 인식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 노소장은 ‘여진입(女眞卄)’, ‘여진삽(女眞卅)’의 ‘스물입(卄)’과 ‘서른삽(卅)’자를 ‘함께공(共)’으로 처음 교감(校勘)하여 2008년 우리한문학회(1급)와 《난중일기의 교감학적 검토》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당시 최고 전문가들에게 검증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여진에 대한 고증 내용은 이러하다.
여진이란 인물이 이순신이 활동한 전라지역 고문서의 노비 목록에 들어 있는 실존 인물이고, 난중일기에 나오는 72건의 공(共)자 용례를 볼 때 공(共)은 이순신이 전쟁 중에 다수의 사람들을 만날 때 일상적인 ‘만남(見)’의 의미로 사용한 관용적인 표현이다. 이에 대해 최근에도 관련 분야의 전문학자 다수가 공감했다.
국내 고문서학의 대가인 성균관대 하영휘 교수(가회고문서연구소장)는 “공(共)자가 변형된 서체로 작성되었는데, 이 외에는 달리 들어갈 만한 글자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일찍이 택당 이식과 잠곡 김육 선생은, “충무공의 청렴한 삶은 일개무소사(一介無所私), 즉 “지푸라기 한 개도 사사로이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항복과 윤휴, 최유해는, “이순신이 군영에 있었던 7년 동안 (심신을 공고히 하여)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조카 이분(李芬)은, “이순신이 진영에 있을 때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겨우 4시간 자고서 새벽까지 작전을 모의했다.”고 기록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현재 관노와 관련하여 유포된 글은 전혀 사실무근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지방 관리가 근무하는 군(郡) 이하는 노(奴) 2명, 비(婢) 3명을 둔다”고 했다. 관아에 뒷바라지는 하는 노비를 두는 것은 법에 규정된 일이고 여기의 노비는 그 당시 별정직 공무원이다. 이순신이 근무한 관아에 여자종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잠자리 운운하는 것은 조선 시대의 제도를 전혀 모르는 발언이다.
이순신의 업적은 세계역사상 그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전대미문한 것이라고 이미 2013년에 평가를 받아 난중일기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순신은 최악의 전쟁상황에서도 위기를 승리로 이끈 위대한 인물이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희망과 용기를 주는 백절불굴의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사실과 다른 왜곡과 허위내용으로 이순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모두 이순신을 바르게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