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21화 통과의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러 과정을 겪습니다. 이것을 통과의례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일 년이 되는 해의 돌잔치에서 시작한 행사는 관혼상제를 거치게 됩니다. 이 중 관례는 어린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해 갓을 씌우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양반은 확실한 절차를 밟았지만, 평민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전까지는 편발 즉 댕기 머리를 했지만, 모발을 끌어올려 머리 정수리 위 중앙에 틀어 감아올려 상투를 만듭니다. 그런 다음에 망건을 쓰는 의식이 관례인데 결혼은 이것을 치른 후에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관례를 치르지 않는 평민이거나 가정 형편상 노총각으로 살다 죽는 사람은 어찌했을까요. 적당한 나이에 슬쩍 상투를 찌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늙어 죽을 때까지 댕기 머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관례는 어른이 되었다는 증명입니다.
사대부 양반가는 모두 중매혼으로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고 가문과 가문의 격(格)을 맞춰 혼인을 정합니다. 격은 조상이 얼마나 높은 벼슬을 했는가, 학문과 덕이 얼마나 알려졌는가로 평가되는데 때로 격이 낮아도 재산이 많은 집을 택하곤 했습니다. 혼인은 집안의 어른이합의하면 사주단자가 오고 가며 약혼이 이루어집니다. 약혼의 절차를 밟은 뒤에는 혼인 날짜를 정해 신랑이 조랑말을 타고 신부의 집에 마련된 초례청에서 혼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신랑은 당상관이 입는 사모관대를 입고 신부는 왕비가 입는 활옷이나 원삼을 입게 됩니다. 이날은 인생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이지요. 초례 때 신랑 신부는 첫 대면을 하고 합환주(合歡酒)로 혼인서약을 하고 연회가 끝나면 신랑은 신부를 가마에 태워 예물과 함께 집으로 오게 됩니다. 이날 신랑 신부는 부모와 일가친척에게 폐백을 드린 다음 신방차림으로 잠자리에 들면 혼인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절차는 양반이거나 돈 많은 평민이 하는 혼인이었고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이는 냉수 한 사발 퍼 놓고 혼인을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혼인하게 하면 출산이 있고 이 아이가 자라면 관례와 혼례를 치르며 풍속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꽃다웠던 신랑 신부도 나이가 먹으면 늙고 죽게 됩니다. 죽음에 이르면 병자의 최후를 가족이 지켜보는데 이것을 임종이라고 하는데 그때 자손이 그 자리에 없으면 불효로 인식했습니다. 숨이 끊어지면 지붕 용마루에 올라 초혼(招魂)의식으로 시작해 발상하게 됩니다. 그다음 염습과 습의 절차를 거쳐 입관하게 되고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예전에는 매장이었기에 꽃상여에 관을 넣고 묘지까지 갔습니다. 가마를 타지 못하고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인한 여자는 죽을 때만이라도 꽃상여 타는 것을 소원으로 했다고 합니다. 장례도 신분과 경제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관을 쓸 형편이 못 되는 극빈자는 가마니에 시신을 덮고 지게에 지고 가서 아무 곳이나 매장했으나 부유한 양반은 길면 보름에 걸친 장례식에 망자를 추모하는 글이 적힌 만장을 휘날리며 미리 정해 놓은 명당에 시신을 매장했습니다. 양반은 아들이 삼 년간 묘소 옆에 초막을 지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망자를 애도했습니다.
제례는 장례가 끝난 뒤에 망자에 대한 추모와 함께 가문 구성원의 결속을 위해 고안된 의식입니다. 집에 상청을 만들어놓고 매일 밥을 올리고 곡을 했고 소상, 대상을 거쳐 삼 년째부터는 기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제사는 보통 할아버지 때까지 지내는데 양반은 5대조까지 지냈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일 때 불천위제사라고 해서 나라에서 제사비용을 대어 몇백 년을 내려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퇴계 이황 선생의 가문입니다.
이렇게 한국인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관혼상제의 통과의례를 경험했습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불합리한 요소가 있지만 이러한 의례를 통해 집안과 가문 나아가 국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했습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통과의례는 변화되어야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살려 바꾸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