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꽃무릇이 한창이다. 꽃무릇은 잎과 꽃이 따로 피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 상사화라고도 한다. 길상사 터는 원래 성북동 요정집 대원각이었다. 대원각 기생이었던 김영한은 시인 백석(1912-1996)을 무척 사랑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이 되어 남북 분단과 함께 서로 헤어졌다. 이 가을날 백석과 김영한이 상사화가 되어 길상사를 맑고 향기롭게 빛내고 있다.
평안도 정주가 고향인 백석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다. 백석은 조선일보 창업자의 제안을 받아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조선일보 기자를 했고 조만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당대의 인텔리였다. 백석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견디기 힘들어 만주로 가서 시 100편 만 써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세월이 흘러 해방을 맞이 했으나 이내 한국전쟁으로 발이 묶인 백석은 고향 정주에 눌러 앉아 김영한과 생이별을 했다.
지성미에 외모까지 갖춘 백석 주변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명이 대원각 기생 김영한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여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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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두 사람의 애틋한 사연을 전해준다. 김영한은 백석을 그리워하며 평생 홀로 살았다. 술과 웃음을 팔아 평생 모은 전 재산 천억 원 상당의 대원각 터를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면서 "이 재산은 백석의 시 한 줄 만도 못하다"고 했다는 길상화 보살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법정스님은 대원각 터에 길상사라는 절을 지어 대중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강원도 화전민의 폐가로 들어가 수행하면서 무소유를 실천했다. 천재 시인과 아름다운 여인과 맑은 중이 만나 성북동 골짜기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이해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