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수는 대중들에게 꿈을 파는 사람이다.’ 2020년 9월 30일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에서 나훈아가 전한 말이다. ‘테스 형!, 아~ 세상은 왜 이래?’라고 질문을 했는데, 형님인 소크라테스(BC 470~399)는 대답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그 질문에 대답을 한다.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테스가 된 것이다. 유튜브나 SNS 공간에 답들이 흥건하다. 왜 이럴까? 대중가요, 노래는 세상과 통한다. 치세락(治世樂)·난세분(亂世憤)·망국탄(亡國嘆). 평화로운 시대에는 즐거운, 어지러운 시대에는 분통 터지는, 나라가 망한 때는 한탄의 노래가 불려진다. 동양철학의 거장 공자(BC 551~479))의 말이다. 2013년 김연자는 <아모르 파티>(운명애, 運命愛)라는 노래에 ‘신은 죽었다’라고 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1844~1900)를 불러냈었다. 이런 사유를 아물거리는 이 새벽에 떠오르는 노래가 <건배>(乾杯, 잔을 탈탈 털어서 마신다)다. 1989년 나훈아가 세상에 던진 화두다.
건배는, 잔(杯, 배)을 깨끗이 비운(건, 乾)> 중국 풍습에서 유래됐고, 우리나라는 잔을 주고받는 대작(對酌)을 즐겼기에 건배 문화의 역사가 길지 않다. 그러나 요즈음 술자리에는 건배가 빠지지 않고, 구호도 다양하다. 건배(乾杯)를 사전적으로 풀면 건강, 행복 따위를 빌면서 서로 술잔을 들어 마시는 것을 말한다. 술자리는 크게 기쁨과 슬픔의 자리가 있는데, 이 노래는 후자에 가까운 가락과 가사이다. 나훈아는 마흔둘에,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을 향하여 <건배>를 제의했다.
냉정한 세상 허무한 세상/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세상/ 팔자라거니 생각을 하고/ 가엾은 엄니 원망일랑 말어라/ 가는 세월에 저 가는 청춘에/ 너나 나나 밀려가는 나그네/ 빈 잔에다 꿈을 채워 마셔버리자/ 술잔을 높이 들어라 건배// 서러워 마라 울지를 마라/ 속는 셈 치고 내일을 믿어보자/ 자네도 빈손 나 또한 빈손/ 돌고 또 도는 세상 탓은 말어라/ 가는 세월에 저가는 청춘에/ 너나 나나 끌려가는 방랑자/ 빈 잔에다 꿈을 채워 마셔버리자/ 술잔을 높이 들어라 건배.(가사 전문)
1947년 부산(동구 초량동) 출생인 나훈아의 건배는 소탈하고 전원적이다. 그러니 술에 비유하면 탁배기·막걸리다. 아니 전통주이거나 민속주다. 1989년 나훈아는 <술이 부르는 노래> 자작곡을 부른다. ‘술이란 건 이상해 알다가도 모르겠어/ 괴로워서 마신 술은 빨리 취해버리고/ 기분 좋아 마신 술은 취하지도 않더라...’(중략). 나훈아는 스스로 자기의 인생에 전설적인 최면(催眠)을 걸고 살아가는 영혼이 자유로운 가수다. 그는 술도 사랑도 노래도 스스로 자작(自酌)을 하고, 스스로에게 건배를 제의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건배사는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을 꺾어 술잔 수를 꽃잎으로 세면서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꽁꽁 졸라매어 매고 가거나/ 아름답게 꾸민 상여를 사람들이 울며 따라가거나/ 억새·속새·떡갈나무 우거진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밝은 달·가량비·함박눈·회오리바람 불적에/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하리요/ 하물며 무덤 위에서/ 원숭이가 휘파람을 불며 뛰놀 적에는/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철은 자는 계함이고 송강은 호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서울 장의동(청운동)에서 출생(1536년 중종31)하여 선조 26년 1593년에 향년 58세로 타계했다. 정철의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1493~1570)이다. 정철은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 유의 부인이 된 막내 누이로 인해 궁중 출입이 자유로웠다. 이때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그는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으며, 26세 때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이후 함경도 암행어사·좌랑·종사관·전라도 암행어사·직제학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했다. 45세 때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4년 동안 은거 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작품을 지었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0여 수가 전한다.
정철은 1551년(명종6) 원자(元子) 탄생기념으로 아버지가 사면되자 온 가족이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군 창평 당지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촌(沙村) 김윤제를 용소(龍沼)에서 목욕하던 중에 만났다. 김윤제는 정철을 문하에 받아들인다. 이후 성산(星山)기슭 송강(松江)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하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에게 시와 학문을 배웠고, 송순·김인후·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師事) 받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 등과도 동문수학(同門修學)하였고, 이때 이이·성혼·송익필 등과도 교우했다. 그의 아호 송강(松江)은 거주하던 곳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붙인 것이고, 부인은 스승 김윤제 사위 류강항의 딸이다.
음악의 성인(聖人), 또는 악성(樂聖)이라는 별칭을 가진 천재 음악가이면서 영혼이 자유로웠던 베토벤(1770~1827)을 닮은(대가를 후하게 받던 귀족들의 행사공연초청에 응하지 않았던) 나훈아는 ‘테스 형’에 뒤이을 노래 ‘톤 형’은 언제쯤 부르려고 준비하고 있을까. 나훈아의 목청에 걸릴 플라톤(BC 428~348)의 주창(主唱)을 미리 고대하면서, 추석 4일이 지난 새벽달을 머금은 한 잔의 술을 비우면서 나훈아 형을 불러본다. 홍기(1947년 생. 최홍기, 나훈아 본명)형~.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 원장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