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곡선은 ‘당나귀의 길’이며, 직선은 ‘인간의 길’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직선을 통해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했으며, 일상의 삶에서 직선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직선은 많은 건축물에 적용되었고,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을 비롯한 직선을 활용한 설계는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방법이 되었다.
가끔 중세의 그림 속에서 마을과 성곽을 잇는 길을 보게 된다. 마을을 도는 우곡(迂曲)한 시골길은 조야하며, 성으로 통하는 길은 제멋대로지만 어떻게든 성에 연결된다. 이러한 길은 시간을 단축하거나 공간의 효율과는 동떨어져있지만, 무심히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길로서는 무난할 것이다. 조금은 꾀를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면서 천천히 목적지로 향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그래서 이른바 ‘당나귀의 길’이 된다.
본디 꾀를 잘 내는 당나귀는 부리기에 만만치 않은 동물일 것이다. 당나귀는 좁고 험한 길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으로 채택된 동물. 일평생 짐을 실어 나르는 것이 천직인 이 종족으로서는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 빨리 가야한다는 것이 내심 마뜩치 않을 것이다. 주인이 잠시 한 눈을 파기라도 한다면, 구불구불한 길에서 어느 그늘진 구석으로 접어들며 쉬고 싶은 것이다. 일을 시키는 입장에서는 괘씸하겠으나, 바쁜 현대인이라면 그 같은 여유와 태평함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바쁜 현대인들이 가장 해야 할 일이 바로 한유(閑遊)이다. 바르트는 노동과 생산의 굴레에 갇힌 현대인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선(禪)적인 무이념(無理念), 무행(無行), 무위(無爲)를 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학교에서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거리는 아이들(여기에는 학급의 꼴지도 포함됨)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깊은 통찰력으로 꼴찌의 존재를 무위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바르트는 무위의 상태에서 주체로서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중심이 해체되어 ‘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몰아지경에 있는 상태가 진정한 무위라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경쟁 사회에 찌든 현대인에게 색다르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현대 생활에 있어서 무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장자의 무위(無爲)와 같은 현대인의 무위(idleness)의 도를 그가 설파하고 있음이 낯설고도 신기롭게 여겨진다.
바르트에 따르면, 진정한 한유는 ‘아무것도 결정함 없이 그냥 그곳에 있는 것(being there, deciding nothing)’이다. 그는 꼴찌의 존재를 이러한 차원에서 조명한다. 학교에서 밑바닥을 치는 아이들, 교실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징이나 개성, 존재감을 가지지 못하는 열등한 아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교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배제되어 있지도 않다. 그냥 주목을 받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는 존재로서 그곳에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때때로 ‘바라는 상태-아무것도 결정함 없이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 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 지났다. 누그러질 것 같지 않던 여름 더위도, 지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여 마침내 사그라진다. 모르는 새에 가을이 다가오고 재촉하지 않아도 가을은 찾아온다.
그 무섭다는 코로나19는 개인적, 사회적인 기본방역조치만 잘 따르면 완화시킬 수 있다고 하니, 이 계절에 한번쯤 게으른 당나귀가 되어 무심하게 걷고 싶다. 돌이 투박하게 깔려있고 잡초가 성긴 한적한 길을 에둘러 그늘 길을 유영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흩뿌려볼 작정이다. 꾀를 부리며 한가롭게 시간을 뜯는 당나귀가 되어, ‘당나귀 길’ 위의 행복을 한번쯤 느껴보려 한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