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윌슨, 나는 오늘 참으로 우울하다"라고 풀기 없는 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더니 유심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더 듣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나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살았던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적지 않은 예치한 돈을 여러 이유를 대면서 돌려줄 수 없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소송을 해야 하는지 혹시나 이런 일이 애물단지가 되어 다가오게 될까봐 걱정 뿐이었다. 1년 사는 동안 벽에 못 하나 박지 않고 조심 또 조심, 까치발로 들어오고 나갈 때도 늘 한 마음으로 살다가 그림 같은 무대를 빠져 나왔는데 나에게 부당한 이유를 내세우며 돈을 돌려줄 수가 없다니, 남의 돈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순간 덩그러니 혼자 남은 내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미세스 윌슨은 한마디도 없이, 마치 그녀 자신이 한 짓인 양 그냥 집으로 쑥, 흔적도 없이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녀에게 줄 우편물도 잊은 채 들어가버린 그녀를 생각하면서, "왜 그랬을까, 왜 순간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그런 누추한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마치 그녀로부터 받아낼 돈이 있었던 사람처럼 말을 했을까. 많은 부를 지닌 그녀에겐 찌질함으로 들려 실망을 준 것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훅 달아오르고 목덜미로 나도 모르는 한 줄기의 땀이 흘러내렸다.
매일 매일 나무들이 숲을 이룬 아래로 화분들이 얌전하게 놓인 시와 수필 같은 드라이브 길을 걸어 그녀의 우편물을 우편함에 넣으러 간다. 마당에 있던 그녀의 개가 한번 "컹" 하고 짖으려다 귀신같이 나인 줄 알아차리고 짖기를 멈추면 곧바로 미세스 윌슨이 밖으로 나와 내게 잔잔한 미소로 감사의 인사를 나눈다. 그때 꼬리를 치며 함께 반기는 개마저도 멋진, 내가 참으로 존경하는 젊잖고 지성적이며 친절한 판사 부인인 그녀와 매일 한 번씩 나누는 인사가 행복하기만 했던 미세스 윌슨을 내가 왜 그런 실망스러운 이야기로 난처한 현실을 만들었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 역시 나를 친절하고 좋은 메일맨이라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한순간에 날아간 뒤 그녀가 겪어 낼 실망감은 또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동안 나의 신분 속 가치를 위장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마치 밀가루 포대를 뒤집어쓰고 양의 마을 잔치에 숨어 들어가서 게걸스럽게 먹다가 국물을 엎질러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늑대 꼴이 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왔다.
양의 탈을 쓴 늑대, 그 늑대도 이렇게 허구의 탈이 벗겨지는 두려움의 맛을 보았을까. 지금의 나와 그 늑대의 처지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니 내일 그녀를 다시 본다는 게 두려움처럼 느껴졌다. 지난 삼십 년, 우체국 직원으로 살았던 나의 긍지가 물거품만 같았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집을 빠져나와 다음 집, 그 다음 집 메일들은 물론 그날 어떻게 배달하며 일을 마쳤는지 번뇌 투성이로 지낸 하루였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처럼 자존감이 무너져 내렸다.
매일 그녀와 나누던 몇 초 간의 천국처럼 행복했던 인사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지금 허망함이 밀려왔다. 매일 그녀를 보는 순간 만큼은 나도 그녀와 맞먹는 상류사회 사람 중 하나일 거라는 착각이 이야기 속 늑대처럼 드러난 것일까. 오백 나한이 들끓어도 나 하나 결백하면 끄떡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 이 공간에서 나 혼자 겪는 죄의식은 무엇일까.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수치심에 내쉬는 숨조차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피할 수도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수치심이 나를 옥죄었다. 터져버린 만두 같은 처지로 하룻밤을 보냈다.
세상 태어나 성장의 문이 열릴 때 처음 들었던 성경 말씀은 ‘착하게 사는 사람은 천국을 가고 나쁘게 산 사람은 지옥을 간다’고 했는데 그 말대로 나는 지금 내 스스로 지옥의 문을 열고 있었다. 나무숲이 하늘을 덮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신이 나를 위해 쏜 직사광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변에 놓여진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모두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나 나는 그만 그 천국을 빠져나와 지옥으로 발길을 옮기고 말았다.
한순간 뱉어놓은 한마디가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되었고 그 고통은 꼭 지옥의 크기였다.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야겠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눈을 뜨게 해 주시어 감사하다’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만 생각하자. 내가 던진 괴로움의 한 마디는 허상인 거다. 잠시 머물던 지옥의 허상에서 오래 머물며 힘들어하지 말자. 매일 매일 신이 주시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일회용 쿠폰을 잘못 보고 사용한 댓가를 뼈저리게 느낀 하루다. 내일 또 다시 새롭게 쓸 수 있는 쿠폰을 주실 거다.
다음날 신은 약속대로 눈부시고 화려한 캘리포니아 날씨를 주셨다. 나는 고민스럽던 어제를 말끔하게 씻어내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일은 없었던 일처럼 덤덤하게 그녀를 대하는 것이 내 사명이다. 머리 뒤통수에 대고 하는 욕을 듣고도 모른 척하는 게 세상사인데 부끄러워하지 말자.
미세스 윌슨과 나, 두 사람 외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냥 모른 척하자. 더 두꺼운 얼굴로 "안녕 미세스 윌슨" 하고 그녀에게 메일을 전해 줄 때 그녀가 기다리던 똑같은 웃음으로 배달해 주는 메일맨으로 다가가자. 그렇게 나의 소명과 책임을 다하여 흩어져 버린 나의 신용의 파편들을 한 조각씩 다시 주워 본래의 나로 만들어 놓자.
말끔하게 정리 정돈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 뚝뚝 떨어질 듯 녹음은 더 성숙하고 그 속을 지나가며 풍기는 멕시칸 가드너의 트럭에 실려진 짙푸른 잔디 향이 코끝에 풍기던 바로 그날, 미세스 올슨의 메일 박스에 작은 메세지가 있었다.
"아무게 메일멘 노크하세요" 미세스 올슨이 나를 보자는 메세지에 순간 나의 머리는 백지가 되어 알 수 없는 의미를 하나씩 써 내려 보았다. 그녀도 나처럼 그냥 못 들었던 일로 넘겨주면 좋을 것이란 기대감과 무슨 일이지 하는 의구심이 밀려왔다. 온갖 잡생각을 하며 그녀의 집 대문에 붙여진 쇠뭉치를 두 번 올렸다 내려쳤다. 그 소리는 두말도 할 것 없이 내 자신의 잃었던 체면이 실린 무거운 쇠뭉치 소리였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내 손으로 나의 자존심을 그녀 앞에서 휴지 조각처럼 구겨버린 고통스러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문이 열리자 그녀의 개가 앞서 나섰고 미세스 윌슨은 그 일이 있기 전 그 전의 모습인 엷은 웃음까지 똑같은 얼굴로 나에게 흰 봉투 하나를 주면서, "이 편지를 먼저 살던 아파트 관리 회사에게 주시오" 하고 말했다. 그녀의 변함없는 미소는 바로 어제 순수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늘 좋아하던 그녀의 미소를 보고 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혼자 괴로워했고 혼자 지옥을 다녀왔다. 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내 맘이 천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파트 관리회사에서 사람을 시켜 직접 전해온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못 받은 아파트 보증금 전액이 찌그러진 동전 한 닢 빠지지 않고 모두 들어 있었다. 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누구에게나 공제하는 청소비조차도 생략하지 않은 총액이 들어 있어 놀라고 말았다. 추측하자면 미세스 올슨이 판사인 남편과 상의한 뒤 내려진 편지만 같아 이번엔 기쁜 마음 앞에서조차 더 숙연해 졌다.
다시 천국의 문 앞으로 돌아와 머리라도 숙이고 싶었다. 천국을 향해 지옥을 따라나서는 게 아니라 천국도 지옥도 나란히 나로부터 시작된 길이다. 그 길에서 나는 늘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 캘리포니아 하늘빛이 그 진가를 발하지 않는 아침이다. 오늘 하루도 변함없이 나는 천국과 지옥을 선택해야 한다.
어린 시절 골목 모퉁이에서 하던 또뽑기 속에는 이미 천국과 지옥이 이미 있었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