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나는 수많은 장소들은 대부분 기억이라는 공간에 저장되고, 추억이라는 액자에 담겨 오랜 세월 보관된다. 정확한 지명이 기억나지 않는 어려운 이름의 장소일지라도 겹겹이 축적된 바람 속에 휘감겨 도무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발현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비교적 또렷한 흐름 속에 미화와 퇴화를 반복한다.
우리에게 여행의 장소란 무엇일까. 정확히 언제부터를 여행자의 진정한 여행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초등학교 봄소풍과 사춘기 시절 연례행사 같은 수련회와 졸업여행도 그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란 뚜렷한 장소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경복궁이나 첨성대 앞에서 사진을 찍고,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뜬금없이 울산 간절곶에 도착해서 포즈를 취하는 것만이 그 장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여행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에 단순히 지나쳐간 여행지라고 해서 온전한 여행이 아니었다고 치부하는 것도 옳은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 생각건대, 여행은 수많은 경계의 곡선과 직선을 넘나드는 것이 아닐까. 지리적인 구획과 특정 관할구역뿐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감정과 생김새, 특유의 체취와 습관들은 이미 물리적으로 크게 떨어져있던 우리들을 제3의 장소에서 우연히 맞닿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블린의 레스토랑에서는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흑인신사와 눈인사를 나누고, 싱가포르의 리틀인디아에서는 건널목마다 마주 선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온 이민자들의 표정을 살핀다. 그들은 스스로 혹은 그들의 선조들을 통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흑인들일 테고,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사업이나 학업, 생계를 위해 싱가포르의 이민자 마을에 뿌리내린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최소한 하나의 완전히 다른 선(線)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나 또한 여행을 하며 가까이는 현해탄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서 고쿠라와 구마모토에 갔었고, 지구 표면에 암묵적으로 약속된 가상의 줄들을 고무줄 넘듯 넘어 내가 살던 곳에서부터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를 오가며 셀 수 없이 많은 장소의 경계를 통과하였다. 사람들은 홍콩에 간다면 홍콩에 갔던 일만을 이야기하기 일쑤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개인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업로드 한 고화질의 사진들이 여행의 행위를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스쳐간 장소들도 그들이 여행한 곳에 조금이라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얼마간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에서 지내며 도시 안에 정돈되지 않은 행정구역과 좁고 작은 길들을 걷기도 하고, 때론 오토바이를 타며 지나다녔다. 단번에 외우기 쉽지 않은 어지러운 샛길들은 어떤 장소나 도착지점에 대한 기억을 오히려 더욱 선명하도록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낯익은 골목길 초입으로 들어가 두 번째 모퉁이에서 좌회전하여 작은 동네슈퍼 앞을 지나가야만 만날 수 있는 어릴 적 살던 집처럼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통 구글맵 같은 지도를 보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항상 길을 헤매는 나와 같은 아날로그 타입의 여행자에게는 스스로 몸을 움직여 도시 곳곳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살던 세상과 무엇이 다른지, 어떤 베이커리와 서점과 음식점이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길을 잃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그래야 도시에서 빵 굽는 온도와 책을 읽는 냄새,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정성을 더욱 가까이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낯선 도시와 친해지는 일은 어려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개학 첫날 데면데면한 중학교 남학생들의 덜 자란 콧수염만큼이나 어색한 분위기를 감돌게 한다. 그래도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는 편이 도시와 친해지고, 사람과 편해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여행자는 알고 있다.
“헤이 브로, 우린 지금 잘란 발리(Jalan Bali)에 있어. 여기 더블샷 커피숍으로 와.”
“그래? 발리라고? 그런데 난 지금 마카사르에 있는데….”
“하하, 그냥 길 이름이 잘란 발리일 뿐이야. 당연히 발리는 여기랑 완전히 다른 섬이지.”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누군가와 약속이 있으면 양재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그 근처에 어떤 은행 건물이 보이고 거기를 끼고 우회전하면 노란색 술집 간판이 보일 거야, 라고 설명을 하겠지만 내가 살던 마카사르에서는 큰 건물이 잘 보이지 않고 전력이 약한 곳이 대부분이라 밤에도 가게 간판에 불을 켜 놓는 곳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카페라면 아예 간판이 없거나 다 낡아 지워진 곳도 허다해서 보통은 어떤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그 장소가 있는 ‘길(Jalan)’ 이름을 알아야만 가능하다. 신기하게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도시에 실핏줄처럼 퍼져있는 작은 길 이름도 웬만하면 다 입력되어 있는 것 같다.
택시운전사나 그랩(Grab)이나 고젝Gojek)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탑승객을 이동시키는 오토바이 운전자들도 어떤 길을 말하면 네비게이션도 없이 척척 알아서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곤 하였다. 하지만 혼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는 가로등이 잘 갖추어져 있지도 않은 컴컴한 길을 통과해야만 했다. 다행히 내가 몰고 다니는 오토바이의 전조등이 초행길 벗이 되어 주었다. 골목과 전봇대를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몰랐던 장소는 곧 알게 될 장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장소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여행이란 장소와 장소를 잇는 연결고리이며, 여행자로 하여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만의 ‘길’를 찾게 만드는 묘한 자율학습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내어 당도한 장소는 꿈속 이상과 불안요소들을 뚫고 나온 삶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더듬더듬 커피숍을 찾아온 나를 향해 친구 뻬뼁(Pepeng)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헤이, 브라더! 여기야 여기. 잘 찾아왔네? 어서 와 앉아. 커피 한 잔 해야지.” [글=신정근]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