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경애하는 조영남 학형에게 띄우는 축하의 글

이태상

 

오늘 아침 (227일자) 중앙일보 기획기사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 미술 대작 사건을 읽고 나보다 10년 정도 젊은 동문(서울대)님 광팬의 한 사람으로 너무도 기쁘고 반가웠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어르신들 말씀이 화투를 가지고 놀면 패가망신하는 법이라고 했는데 제가 너무 오래 화투를 가지고 놀았나 봅니다.”

 

이 최후 진술 마지막 한 마디에 천진난만한 유머와 장난끼, 아니 풍자와 해학 넘치는 김 형의 성격과 인격의 고품격이 물씬 풍깁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김 형께서 노리는 게 한 가지 있다고 이렇게 적으셨죠.

 

지난 5년간 그림 대작 사건으로 죽었다가 간신히 살아났더니 조영남이 그림뿐만 아니라 글도 대필로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제 책들이 안 팔려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더 큰 일은 제 글이 대필이 아니라는 걸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맞고 또 맞아야지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표절 시비가 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반문했습니다. 세상에 해 아래 새것이 없다든가 독불장군이 없다든가 하는 말처럼 인간 매사가 도토리 키재기라고 생각하고, 어린아이가 언어 자체를 배우는 것부터 표절행위라면 그 누가 누구보고 표절이다. 모방이다 대작이다 대필이다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전에 잠시 런던대에서 법철학을 공부할 때 내 눈에 들어온 한 문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법조문 글자에 충실하기보다 그 법 정신에 충실하라 Be true to the spirit of the law, not to the letter of the law”

 

김 형처럼 나도 송사(訟事)에 말려든 적이 있습니다. 고용 계약상 문서화된 물증(物證)이 없다는 점을 약점으로 부당해고 당한 적이 있지요. 재판 마지막 날 최후 진술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적 증거가 없다 해도 상대방(피고인인 고용주)도 나(원고인 고용인)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는 사실이자 진실이다.”

 

내 이야기를 간단히 해보겠습니다. 세상일 정말 알 수 없는 것일까요. 하늘의 별을 따는 일처럼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던 일도 현실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간혹 (인천 공항이 생기기 전) 김포 공항에 누구를 마중 또는 배웅하러 갈 때면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마치 별세계 사람들 같아 보였지요.

 

그러다 언젠가 일본과 한국 사이로 날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안 됐다고 느끼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잘난 사람들 남보란 듯이 하늘 높이 날더니 떨어지고 말았군 하는 몹쓸 감정이 꿈틀거려 나는 소스라 치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차를 타고 가노라면 더러 시골 아이들이 기차에 돌팔매질하는 심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나에게도 그토록 부러워하던 기회가 뜻밖에 찾아왔지요. 우연히 영자신문에서 구인 광고를 보고 미국 출판사 프렌티스-(Prentice-Hall)의 한국 대표로 2년 일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호주로 전근 오퍼를 받았으나 그 당시 호주 정부에서 비유럽계 사람에게는 영주 비자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호주 대신 나는 영국으로 전근 가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서울서 런던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고, 그동안 열여덟 번이나 비행기를 타고 내렸지요. 세 살짜리 큰 애는 걷게 하고, 돌이 지난 지 육 개월 된 둘째는 등에 없고, 태어난 지 석 달된 막내는 안고, 꿈도 못 꾸던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여행 삼아 동경, 홍콩, 방콕, 로마, 아테네, 암스테르담, 파리를 경유하여 영국에 도착했던 것이죠.

 

그러나 나는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의 콧대 높은 영국신사들이 정중하면서도 음성적으로 베푸는 냉대와 차별대우를 감당키 어려웠습니다. 영국에 인재가 없어서 한국에서 사람을 데려왔느냐는 반감에서 반발이 대단했습니다. 그럴수록 저들에게 짓밟히고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는 심한 강박관념에서 나는 초인적으로 발악하듯 열심히 뛰었지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포함한 영국의 각 대학을 순방, 프렌티스-홀 산하 50여 개 출판사에서 매년 발행하는 신간 서적 수천 권 가운데서 대학 과목별로 교재를 채택시켰습니다.

 

연평균 200회 이상 이동도서전시회를 열어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도서 추천과 구매신청을 받아 각 대학 도서관에 납품하는 일도 하면서 또 각종 학술대회와 학회에 참석해 학계 동향을 파악하고 새 교재 집필자를 물색하는 등 미친 듯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 영국지사 판촉직원 십여 명이 해오던 일을 혼자 도맡아 나는 판매 실적을 전보다 몇 배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없던 각 대학 주요 인사들인 교수와 도서관 사서들의 메일링 리스트를 철저하고 완벽하게 작성해 놓았지요. 고되고 힘든 날의 연속이었으나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뒤따라 나는 더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했습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싱가포르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나는 싱가포르로 전근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근 조건이 너무 부당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응당 받게 되는 주택비, 자녀교육비 등의 특별수당과 혜택도 없이, 같은 동양인이라고 현지 싱가포르 사람과 같은 대우밖에 못 해주겠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요.

 

싱가포르 사람들은 싼 정부 아파트에 살면서 학비가 들지 않는 중국어 사용 공립학교에 애들을 보내지만, 나의 경우 영어가 사용되는 인터내셔널학교에 보내려면 나의 연봉으로는 아이들 학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부당한 조건으로는 싱가포르 전근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자 즉시 나는 감원 해고를 당했습니다. 퇴직금으로는 한국에서 근무한 연수는 제외하고 영국에서 근무한 기간만 일 년에 일 주일분 급료를 계산해 줄 뿐, 나의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와 이사비용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겠다는 서면의 고용계약이 없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근무하다 같은 회사 일로 영국으로 전근가면서 새로 고용계약을 요구, 체결하지 않았던 것이 나의 불찰이었지요.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 나는 런던의 유명한 변호사 십여 명을 찾아 의논해 보았으나 모두 이구동성으로 법에 호소해보았자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측에 도의적인 책임은 있을지라도 법적으론 어떤 하자도 없고 회사 측에서는 영국의 현행법에 따라 나에게 퇴직수당까지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나는 영국 언론에 편지를 써 호소했지요. 그랬더니 뜻밖에도 런던 타임스와 가디언 그리고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의 지방지 이브닝 포스트 에코에서 나의 억울한 사정을 크게 기사화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나는 우리가 사는 지역구 출신의 노동당 국회의원 브라이언 세지모어 씨를 찾아가 하소연하자 영국 국회에서 문제 삼겠다며 강력한 편지를 써주고 회사 대표를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또한 헛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나는 인더스트리얼 트라이뷰널이라는 노사분쟁 중재 재판소에 제소했습니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는 미국 변호사 두 명과 영국 변호사 두 명, 총 네 명의 변호사가 회사 변호에 나섰고, 반면 나는 변호사 쓸 돈도 없었지만 승산이 전무하다는 법적 판단하에 아무도 변호를 맡아주려 하지 않아, 내가 직접 나 자신의 자가변호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 년을 두고 끌어온 재판이 드디어 판결의 순간을 맞았지요. 중립적인 입장에 선 재판장과 노사 양측을 각각 대표하는 재판관 두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의 의견을 모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영국 법원의 상례였습니다.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던가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겠다는 집념과 오기로 일관한 나의 법정투쟁에서 재판장은 물론 고용주 편에 서야 할 재판관까지 내 편을 들어줘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나는 승소했습니다. 심지어 회사 측 변호인들로부터 찬사와 축하까지 받았지요. 한편 이 재판을 관심 있게 지켜본 영국의 각 언론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 소년과 골리앗 장사의 대결에 비유해 작은 코리안의 승리를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세상에는 기적 아닌 일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 그렇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다 기적이지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이슬 한 방울, 바람 한 점, 햇살 한 줄기, 바다, 하늘, 별 등등 모두가 기적입니다. 한없이 신비하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One never knows what’s in store. What seemed impossible like catching a heavenly star, could sometimes happen in the real life.

 

 

Whenever I went to Kimpo Airport near Seoul (before Inchon International Airport was built) to welcome or to see someone off, those privileged to walk up or down a boarding ramp were aliens from other planets to me.

 

At one time, I was saddened by the news that hundreds of people lost their lives in an airplane crash over the East Sea between Korea and Japan. At the same time, I was even more shocked by a disturbing thought crossing my mind. It was the sense of schadenfreude, a feeling of pleasure at the bad things that happen to other people. For a moment I couldn’t help feeling the joy of seeing the fall of the ‘high-flyers,’ the envy of the ‘low-crawlers’ and I could commiserate with the country boys throwing rocks at passing trains.

 

An unexpected opportunity came my way. After working for an American educational publisher as their Korean representative for two years, I was offered a transfer to Australia. But in those days, the Australian government didn’t issue a permanent resident visa to a non-European. I was sent to the United Kingdom, instead.

 

It took a whole month for my family with three young children, aged three months to three years, to make the journey overseas to London from Seoul. Making the most of this unimaginable chance to travel abroad with our whole family, we had stopovers for sightseeing in Tokyo, Hong Kong, Bangkok, Rome, Athens, Paris, and Amsterdam.

 

Upon arrival in England, I found the civil, but cool, reception, a mixture of condescension and reserve hard to take. The English ‘gentlemen’ I had to work with seemed to have a hangover from their memories and sentiments of bygone Pax Britannica days. I was subject to all kinds of subtle, implicit discrimination. I could understand why they must have felt affronted. Why on earth did they have to bring someone from an almost unheard of backward place called Korea (then), as if there were no competent people in the U.K.?

 

Determined not to become a laughingstock and sent back, I worked like mad. I traveled throughout Great Britain, including Wales and Scotland, to visit all the universities and colleges. I presented new titles for textbook adoptions and library orders. I represented about 50 American publishers whose publications were distributed all over the world by my employer, an international corporation.

 

Besides holding more than 200 book exhibitions a year, I attended academic conferences for market research. In so doing, I compiled an up=to-date mailing list of faculty members and librarians, contributing to a large increase in sales. I was away from home and with my family briefly on weekends. Even so, I was satisfied with the results that made it all worthwhile.

 

While I was settling in doing ‘a great job,’ I was offered another transfer, this time to Singapore. But the terms were unacceptable. Relocation costs provided made no allowance for our housing and children’s education. Singaporean nationals lived in their government-subsidized, low-cost apartments and their children went to Chinese-speaking local public schools free of charge. I couldn’t afford to send my children to an English-speaking international school. The private school fee for one child was more than my annual salary.

 

When I declined the offer of transfer, I was made redundant in my job. Severance pay was only a week’s wage for each year I worked in the U.K. They wouldn’t pay the moving expenses and airplane tickets for my family to return to Korea. They were not obligated because it was not stipulated in the contract. It was an oversight on my part not to have asked for a revised written contract of employment when I was being transferred from Korea.

 

Unable to return to Korea or to seek a new employment, prohibited by the work permit my former employer had obtained for me to work in the U.K., my family of five was stranded in a foreign land.

 

I consulted with about a dozen lawyers in London. They told me that I had no case legally, though morally I did. In their opinion, my former employer was not at fault. They paid me the severance pay in accordance with the legal requirements.

 

Surprisingly, a couple of national papers and a local daily reported on the plight of my family, but to no avail. A Labor Party Member of Parliament representing the district where my family resided wrote a formal letter on my behalf, threatening to raise the issue in the British Parliament. He had a meeting with an executive of my former employer. Still all the efforts were in vain.

 

As a last resort I went to the Industrial Tribunal. My former employer was represented by a group of American and British lawyers. Since I had no money to hire a lawyer, and no lawyer offered to represent me, I had to represent myself.

 

At the end of a year-long trial came a judgment from the Tribunal. The chairman and his two supporting judges heard the case. It was a unanimous decision that I was unfairly dismissed. Everybody complimented and congratulated me on my victory, even the company’s lawyers. The British media reported on my case as a story of “Boy David beating Goliath.”

 

A sure thing in the world. There’s all the beauty one cares to behold; all the magic and mystery to wonder, as a child marvels, that stars can exist. From one’s birth onward, each breath taken in and out, each moment to live and love, everything is a miracle, be it a blade of grass, flower, or sunlight, the twinkle of stars, the wind, the sea, the sky, the cosmos. All are more than miracles, infinitely mysterious and sorrowfully and sadly beautiful beyond belief.

 

어떻든 조영남 학형의 너무도 멋진 삶과 사랑의 예술을 예찬하면서 노당익장(老當益壯)을 축원합니다.

 

이태상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2.28 11:49 수정 2021.02.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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