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역사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1592년 1월 17일 (음력)

이순신 지음 / 윤헌식 주해

사진=코스미안뉴스 DB


1592년 1월

17(무인) 맑고 한겨울처럼 추웠다. 아침에 순찰사1)와 남원의 반자2)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저녁때 철쇄3)[설치에 쓸] 구멍 뚫은 돌을 가져올 일로 4호선4)을 선생원으로 보냈다. 김효성5)이 이끌고 갔다.


[원문] 十七日戊寅 晴 寒如大冬. 朝 修簡于廵使及南原半刺䖏. 夕 鐵鎻孔石回泊事 送四船于先生院. 金孝誠領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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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 廵使는 순찰사의 준말로서 각 도의 군 업무를 순찰하던 관직이다. 명종실록의 기사29에 의하면 전라도와 경상도는 을묘왜변을 계기로 변란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기 위하여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임하였다. 당시의 전라관찰사는 이광(李洸)으로서, 그의 자는 사무(士武), 본관은 덕수(德水), 생몰년은 1541~1607년이다.


2) 지방 수령에 속한 관원을 가리키는 말로서 판관, 현감, 아전 등을 말한다. 난중일기에서 언급된 대부분의 반자가 판관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이날의 반자도 판관으로 판단된다. 남원읍지부선생에 의하면 당시의 남원판관은 노종령(盧從齡)이다.


3) 정박해 있는 병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포구에 설치했던 방어시설이다. 중종실록의 기사에 설치 방법 및 용법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부터 중요한 포구에 철쇄가 설치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철쇄는 나무, , 칡동아줄, 철쇄(鐵鎻), 철구(鉄鉤) 등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시설물로서, 나무에 칡동아줄로 무거운 돌을 매달아 수면 아래로 한 자쯤 잠기도록 설치함으로써 적선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날 일기의 전후로 보이는 철쇄의 설치방법과 부속물이 중종실록의 기사의 기록과 유사하므로, 일기에서 언급된 철쇄는 중종 때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4) 원문 四船이 배의 번호와 척 수 중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하다. 일기의 다른 날짜에 나오는 유사한 용례에 번호로 사용된 경우가 더 많으므로 전자로 해석하였다.


5) 김효성(金孝誠)은 옥포해전, 당포해전 등에 군관으로 참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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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희 기자
작성 2021.02.28 17:04 수정 2021.02.2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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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