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것인가 아니면 멀어지는 것인가, 안개 속 실루엣. 부두에 앉아 항구를 보다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안개는 온다/ 작은 고양이 발로. 가만히 쪼그려 앉아/ 항구(港口)와 도시(都市)를/ 바라보곤/ 살며시 떠나간다. (The fog comes/ on little cat feet. It sits looking/ over harbor and city/ on silent haunches/ and then moves on.)
-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안개<Fog> 전문
담으려 해도 다물려지지 않는 열린 밤. 나쓰메 소세키(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가)의 소설을 손에 잡았다.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색채가 짙어서 잘 와닿지 않고, 그의 단편조차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정형의 움직임을 정형화하려 부단히 애쓰지만, 담을 수 없는 움직임은 밑 빠진 독을 빠져가듯 모래 위에 흩어진다. 삶의 속성을 빼닮은 글의 속성이기에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단편소설에서 느꼈던 그 낯섦과 거리감이 다시 느껴졌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구사한 ‘의식의 흐름’ 기법이 낯설면서도 묘한 끌림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며 글을 읽어가니, 그제야 소설이 자리를 잡는다. 소세키 문학에 정통한 사토 야스마사가 말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플롯과 스토리를 설치하고 묘사해도 결국은 미해결인 게 ‘소설’이다”라는 말이 글쓰기의 어려움과 매력을 잘 전해준다.
한발 더 나아가서 보면 결국 글과 삶은 동격이 아니겠는가. 글에서 삶을 발견하고, 삶은 글이 되니까 말이다. “인생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리될 수 없고, 소설은 하나의 이론을 암시함에 불과한 이상… 우리 마음속에는 밑변 없는 삼각형이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간의 내 경직된 글을 떠올린다.
‘공동과제’. 글이란? 작가만의 과제가 아니라 또한 독자의 과제이기도 한 것. 읽는다는 것은 작품뿐 아니라, 글의 배후에 있는 작가의 생각을 포착하고 읽어내는 것이기에. 소설의 줄거리를 통해 재미를 느낄 수 있겠지만, 작가의 생각과 움직임을 간파할 수 있다면 좀 더 고차원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공동과제’를 통해 좋은 작가와 훌륭한 독자로 발돋움할 수 있다면 그 과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를 읽는다는 것은 작품 밑에 스며든 ‘작자의 안광’을 파악하는 것이고, 문체 밑에 파동치는 작가의 미묘한 ‘정신운동’을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소세키는 말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좀 더 애를 써볼 일이다. “글은 ‘작가의 의식(문체)’을 주목하는 것이고, 연극은 ‘배우의 연기’를 파악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묘사는 좀 더 쉽게 생생히 와닿는다.
안개 속 실루엣. 작가의 의식이, 배우의 연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파동치며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끝이 열린 채로, 열린 결말을 안은 채로. 삶을 담은 글이, 글을 닮은 삶이, 안개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