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38화 포도청
도둑이 있으면 도둑을 잡는 곳이 있어야겠지요. 그곳이 바로 포도청입니다. 지방의 각 관아에도 포졸이 있지만, 전문적인 포도 기관은 서울에 있었습니다. 좌포청은 지금의 단성사 극장 근처에 있었고 우포청은 광화문 우체국 근처에 있었습니다. 좌우포도청이 각각 구역을 나누어 경쟁했는데 성종 때 도둑이 끓자 한시적으로 포도장을 운영하다가 중종 때 포도청이 만들어졌습니다. 지방에서 검거되는 중대범죄자는 서울의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형조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법기관에 죄인을 송치했습니다. 포도청이 제 역할을 할 때 왕권을 수호하고 사회 안정에 이바지했지만, 기능이 약화 되었을 때는 포도청이 습격당하기도 했습니다.
포도청은 도둑을 잡는 것과 함께 일정한 시각에 북과 징을 치며 도성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일도 했습니다. 포도청을 도와 도둑과 화재를 막는 경수소가 있었는데 관리와 민간인이 반반으로 구성되어 통행금지에 걸린 사람을 붙잡아 두었다가 다음 날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이문(里門)도 같은 일을 했는데 요즘의 자율방범대처럼 민간인이 담당했습니다.
포도청의 일은 도둑을 막는 순라가 기본이었지만 기생이나 도박 등 풍속을 단속하고 기찰하면서 범인을 잡아 심문, 처벌했습니다. 포도청에는 포도대장(포장) 아래에 종사관, 부장(포교), 서원, 사령, 군사(포졸)등이 있었습니다. 또 다모(茶母)라는 직책의 여자 경찰도 있었는데 다모는 양반집의 여성이 거처하는 곳을 수색했습니다. 다모와 다르게 여령(女伶)이라는 술집 여자도 있었는데 식사나 청소 등을 맡고 궁궐에 차출되어 일하기도 했습니다.
포교나 다모는 나무에 포장의 수결(서명)을 새긴 자주통부의 반쪽을 갈라 신분증으로 갖고 다녔습니다. 포졸은 육모방망이와 붉은 오랏줄인 포승을 차고 다녔는데 다모는 소의 성기를 바짝 말린 쇠좆매나 은실이 박힌 쇠도리깨를 들고 다녔습니다. 이 도리깨로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에 살인하게 되더라도 유배형에 그쳤다고 합니다. 여성을 상대로 수사해야 하는 다모는 선발할 때 또래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어야 했으며 술도 잘 마셔야 했다고 합니다.
수사할 때 포교는 기찰이라는 범죄 내사를 했습니다. 범죄가 발생했을 때는 상층에 보고하여 지휘를 받고 지명수배를 할 때에는 인상서라는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범죄수사에 나설 때에는 명령서를 받아 어디를 가든지 숙박이나 음식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범인의 소재가 파악되면 포교가 포졸에게 암호를 지시하고 으슥한 곳에 잠복시켰습니다. 포교는 암등(暗燈)을 길게 늘어뜨려 거의 땅에 닿게 하고, 쇠털을 댄 미투리를 신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하고, 또 소매 속에는 쇠도리깨를 숨기고 순찰을 했습니다. 범인을 추적중에는 그들만의 은어로 의사소통했습니다. “한발 더 놓아라”는 빨리 가자,“새벽녘이다”는 단서를 잡았다는 것, “미꾸리다”하면 범인이 빠져나갔다는 것이고 때로 수신호로 행동지침도 주었습니다. 포교가 갓 왼편을 건드리면 포졸은 아직 잡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고 오른편이면 잡으라는 신호입니다. 뒤따르는 포졸에게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면 오라를 던져 범인을 낚아챈 후에 묶어서 갔습니다. 도둑도 포교와 같이 쇠털을 붙인 미투리를 신고 도적질에 나섰다가 포교가 미행하는 것을 눈치채면“솔개 떴다. 병아리 숨어라”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붙잡은 범인에게 범행의 전모를 자백받아야 합니다. 입을 열지 않으면 고문을 통해 얻어내야 했는데 법에 따라 고문방법과 횟수. 강도가 달랐다고 합니다.
포도청 사람들의 대우는 어땠을까요? 포도대장과 종사관은 물론 급여를 받았지만, 부장 중에는 월급이 없는 무료부장도 여럿 있었고 포졸은 아예 없었습니다. 대신 이들은 나라에서 지정한 수공업을 해서 그것을 팔아 생계에 보탰으며 가족으로 하여금 지금의 남대문 시장 자리에 칠패(七牌)같은 난전을 만들어 그곳에서 장사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대우가 부패에 연루되어 뇌물을 받고 죄인의 죄를 경감하는 등 여러 문제를 낳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