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 단오 다음 날 상봉역에서 경춘선 전철에 몸을 싣는다. 전철 창가로 보이는 북한강 청평호 주변의 오래된 호반 유원지와 별장들은 봄날의 호수 위에서 부유하듯 한가롭고,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모터보트는 호반의 운치를 더해준다. 계절은 벌써 봄을 건너뛰고 여름으로 향하는지 5월의 한낮은 이미 무덥다. 경춘선 전철은 봄 향기 그득한 산야를 지나 상천역에 산객을 내려놓는다. 오늘은 이곳 상천역을 들머리로 하여 잣나무숲을 지나 호명호수에 올랐다가 호명산 정상에 오른 후 청평역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북한강변에 자리한 호명산은 한북정맥의 귀목봉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 끝자락에 있는 산으로, 청평댐을 뒤로하고 병풍처럼 솟아 있다. 산 서쪽으로 조종천이 흐르고 남으로는 청평호를, 동으로는 북한강을 끼고 있으니 정상에서의 조망은 비할 데 없는 장관을 이룬다. 특히 산 위에 양수발전용 저수지인 호명호수를 공원으로 잘 꾸며 개방하고 있어 일반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상천역 굴다리를 지나 넓은 신작로를 따라가면 큰 누각이 보이는데 상천 농촌테마공원 입구에 있는 상천루다. 넓은 공원에는 큼직막하게 지은 한옥들과 휴식 공간들이 조성되고 있는데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원 오솔길 오른쪽의 맑은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한 걸음을 이어가면 잣나무숲 가운데 자리 잡은 캠핑장을 만나다. 캠핑장 사이로 난 편안한 산길을 넉넉한 걸음으로 가면 소나무숲이 나온다. 완만한 경사의 지그재그로 이어가는 솔 내음 가득한 숲길을 파고들며 오름을 계속한다.
봄기운이 가득한 생동하는 자연을 접하며 어머니 젖가슴처럼 안온하고 편안한 숲길을 걷다 보니 산행 시작 1시간 만에 가평 10경 중의 하나인 호명호수에 도착한다. 봄기운이 녹아 들어간 산정의 호수가 내뿜는 맑고 투명한 기운에 몸은 꽃가루처럼 가벼워진다.
인공호수라고 하지만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고 주위의 산세와 잘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낮은 구릉으로 둘러싼 주위의 능선 때문에 마치 하늘의 호수처럼 보인다. 뒤로 보이는 팔각정을 거쳐 왼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름을 계속하면 주발봉이 나온다. 호명호수에서 댐이 축조된 쪽 계곡은 우무네골이다. 댐 아래로 보이는 사각형 모양의 조형물은 타임캡슐이 설치된 미로공원이다.
댐 위로 연결된 도로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호명호수 전망대가 나오고 이 길은 호명산으로 연결되는 등로로 이어진다. 호명산에서 가장 조망이 뛰어난 호수 전망대에서 도시락을 꺼낸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반찬으로 산상 뷔페를 즐긴다. 산정호수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을 느낀다.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로 봄을 노래하는 것인가. 이 길을 함께 걸은 사람들은 서로의 낮은 숨결마저도 느낀다. 인생의 산을 함께 오르고 있는 우리는 봄의 한가운데 아니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호명호수에서 호명산까지의 능선길은 참나무, 싸리나무 등 잡목이 가득하고 아기자기한 암봉 코스도 있어 다소 긴장감을 느끼면서 재미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완만한 구릉을 오르내리는 조붓한 산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기차봉에 이른다. 소나무 너머 산 아래로 경춘선 철로가 잘 보여서 기차봉인가? 시선 아래로 구름이 지나간다. 풍경에 도취되니 어떤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이 더해진다. 돌아보면 인간 세상은 얼마나 덧없는가? 그야말로 공환(空幻)이다. 사람은 단지 머물다 갈 뿐이다.
중첩되어 보이는 산자락은 물감의 농도를 조절한 듯 입체감으로 원경과 근경이 포개져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이런 산수화 같은 풍경이 서울 근교 전철역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뿐이다.
호명호수에서 1시간 정도 능선길을 따라 걷다 보면 호명산 정상(632m)에 도착한다. 사방이 탁 트여있고 넓은 공터에는 정상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 주위에 사각형의 축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이곳이 봉화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호명산(虎鳴山)이라는 이름은 옛날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상에서 지나온 등로를 뒤돌아보니 호명호수의 사방댐이 보이고 그 너머로 주발봉이, 가까이로 기차봉이 능선 중간에 걸쳐있다. 사위를 둘러보니 깃대봉이 선명하고, 축령산과 서리산, 운악산의 산군이 다가선다.
산은 모든 생명체의 발상지이며 영혼의 성소다. 그래서인지 산정에 서면 에너지가 가득 차오른다. 어디선가 아름답고 고차원적인 영적 힘이 몰려와 오장육부를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산의 지형을 느낌으로 아는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 도(道)스럽게 걸을 수 있다. 주위 산군들의 마루금 너머로 펼쳐진 새파란 하늘빛을 가슴에 가득 담고 하산하기 시작한다. 정상에서 30분 정도 급경사의 등로를 내려서면 청평댐과 북한강이 조망되는 전망대가 나온다. 잘 자란 소나무 사이로 강 건너에는 뾰루봉과 화야산이, 발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청평호반이 가슴을 시원하게 연다. 바람도 잠시 숨을 죽인 이곳에서 북한강과 대성리 쪽을 보고 있으라면 시름도 저만치 물러나 앉는 듯, 마음의 공허마저 밝은 빛으로 가득히 채워진다.
청평호반은 주변 산수가 아름다워 각종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청평호반을 둘러싸고 있는 37번 국도와 가평으로 연결되는 391번 도로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제1전망대에서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로 내려와 전나무 군락지를 지날 때는 오롯이 나를 만나는 순간이다.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한 숲에 들어서니 티끌같은 망상과 잡념은 깨끗이 사라진다. 숲 사이로 난 길은 마치 속(俗)과 선(禪)을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진다. 명상에 잠긴 듯 적막한 숲을 지나면 호명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산행 날머리에서 청평역과 유원지 방향으로 가려면 몇 년 전까지는 조종천 상류를 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지금은 새로 생긴 기타 다리를 지나 조종천을 건너면 북한산 자전거 종주길과 이어지고, 청평유원지와 청평역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서편으로 벌겋게 지는 저녁 햇살이 봄볕보다 더 따갑게 다가선다. 기타 다리에서 호명산을 바라보니 호(虎)의 꼬리같이 부드럽게 휘어진 지나온 능선이 보인다. 다리 아래 조종천은 축령산으로 넘어가는 햇살에 잔물결이 인다.
삶에 집착하지 말게
삶을 미워하지도 말게
사는 동안 잘 살 일이
목숨이 길고 짧음은
하늘에 맡길 일일세
-밀턴의 ‘실락원’ 중에서-
삶이 능동인 것 같지만 대자연의 부름을 따르는 안명순명(安命順命)임을 절실하게 느낀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