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사랑할 수밖에 없는 터키 2부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곳, 트로이

여계봉 선임기자

이스탄불에서 렌트카를 타고 갈리폴리를 향해 출발한다. 도로 왼쪽으로 대리석 물빛의 마르마라해가 갈리폴리까지 4시간 동안 따라온다. 물빛이 층층이 다른 바다, 해바라기꽃이 끝없이 펼쳐진 노란 평원, 하얀 구름을 인 더없이 파란 하늘. 자연이 베푸는 환상의 조합이다.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수십km의 마르마라 해변에는 아름다운 해양 리조트들이 줄지어있다.

 

갈리폴리(Gallipoli)는 터키어로 겔리볼루(Gelibolu)인데, 다르다넬스 해협 동쪽 끝에 있는 터키 서부의 항구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과 터키군 사이에 큰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이 전투를 겔리볼루 전투’, ‘차낙칼레 전투라고 부른다. 차낙칼레에서 트로이 전쟁이 있은 지 수천 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곳에서 세계 최악의 상륙작전이 벌어진다. 

 

그리스어로 ‘좋은 도시’인 갈리폴리항. 1차대전에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진다.

갈리폴리에 도착해서 역사공원에 올라가니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을 격퇴시킨 터키의 케말 파샤 동상과 터키군 묘지가 있다. 안자크만에 가니 연합군으로 참전해 이곳에 상륙하다 전사한 호주와 뉴질랜드군(안자크) 묘지와 추념비도 있다. 적군과 아군이었지만 이제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이곳에 묻혀있는 젊은 영혼들. 마르마라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해협은 오늘따라 더 거칠고 사납게 요동친다.


갈리폴리에서 차낙칼레로 가는 페리 위에서


갈리폴리에서 차낙칼레로 가기 위해 페리에 차를 싣는다. 유럽 쪽의 갈리폴리와 아시아 쪽의 차낙칼레 사이에 있는 다르다넬스 해협은 좁은 곳이 1.2km밖에 되지 않는 바람에 전쟁은 이곳을 가만두지 않았다. 알렉산더대왕도 이곳에 부교를 놓아 동방원정을 시작했고, 1차대전 때는 연합군과 터키군 5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격전지다. 동서양 정복을 위해 이 바다를 건너다 죽어간 수백만의 젊은이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죽어갔을까. 이제 이곳은 여행자의 간식거리를 노리는 갈매기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고 평화롭다.


페리에서 바라본 다르다넬스 해협과 갈리폴리 해안


갈리폴리 건너편에 있는 차낙칼레는 신들의 격전지 트로이가 있고 근대에는 비극적인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래서 차낙칼레에는 신화와 실화가 공존한다. 이 도시에서는 매년 8월에는 국제 트로이 축제가 개최된다.트로이는 차낙칼레에서 남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의 목마. 고증된 것이 아니어서 조악해 보인다.


신들의 ()의 논쟁이 이런 피를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스 여신인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서로 최고 미녀의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였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시험에 들고 말았다. 졸지에 ()의 심판관이 된 파리스에게 아프로디테가 찾아온다. 자기를 최고 미녀로 선택해주면 파리스가 사모하는 여인 헬레네를 갖게 해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유혹에 빠져 파리스는 망설임 없이 아프로디테를 지명한다.

 

여러 개의 우물과 건축물이 남아있는 서남쪽 유적지

 

아프로디테의 약속대로 파리스 왕자가 몰래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돌아오자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분노하여 형인 그리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로 쳐들어간다. 아내를 되찾기 위해 길고 지루한 10년간의 트로이 전쟁, 즉 신들을 대리해서 인간들끼리 싸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트로이 언덕에 올라서서 대평원을 바라본다. 그리스 연합군들이 공격해온 바다는 강의 토사가 밀려와 육지가 되는 바람에 4.5km 뒤로 밀려났다. 아가멤논이 이끄는 수십만의 그리스 연합군이 전함에서 내려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바로 옆에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가 병사들을 독려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올리브 나무 너머로 옛날에 바다였던 평원이 보인다.


트로이는 그리스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전력이 약했다. 하지만 트로이의 왕자이자 명장 헥토르는 아가멤논과 불화로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 연합군을 맞아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자 분노하여 복수의 일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헥토르는 목숨을 잃게 된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 의해 헥토르가 죽게 되는 51일에서 막을 내린다.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된 로마시대의 작은 원형극장

 

헥토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병사들은 그리스 연합군에 결사 항전한다. 아킬레우스도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가 아폴론의 활로 쏜 독화살에 자신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아킬레스건)를 맞고 숨을 거둔다.

 

10년 동안 계속된 지리한 전쟁에 지친 두 나라 군사들은 극한적인 상황에 도달한다. 이때 그리스 연합군의 최고 지략가 오디세우스는 아테나 신전에 바치기 위한 목마라고 소문을 낸 뒤 목마를 성밖에 두고 철수하는 전략을 펼친다.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이 적의 기만전술임을 경고하지만 전쟁에 지친 트로이군은 이를 무시하고 자랑스러운 전리품인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모두가 조용해진 밤, 최후의 전투가 시작된다. 실로 오랜만에 대취하여 편한 잠에 빠져든 트로이 군사는 목마에서 빠져나온 그리스 연합군의 기습으로 대패하고 트로이는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트로이성 입구. 여기를 통해 트로이 목마가 성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 기록된 신의 다툼으로 시작된 신화 속의 도시인 줄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 일부 고고학자들이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이를 믿고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에 뛰어든 이가 자수성가한 독일의 사업가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슐리만은 신화를 믿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트로이 전투를 묘사한 한 장의 그림을 보고 반드시 그 유적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하고, 1870년부터 20년에 걸쳐 진행된 작업을 통해 황금잔과 왕관, 목걸이 등의 유물과 유적지 등을 발굴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신화 속에서 잠자고 있던 전설 속의 도시 트로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데 성공한다.

 

슐리만 이후 계속된 발굴 작업을 통해 이 유적은 크게 아홉 개 층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임이 밝혀진다. 1층은 B.C 3600년 전부터 시작해 제9층은 기원후 500년 로마시대까지 4,100년 동안 이어졌다. 지진과 화재, 전쟁 등으로 소멸된 도시 위에 또 다른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전쟁의 무대인 B.C 1275년부터 B.C 1100년까지의 유적은 제7 A층임이 밝혀졌다.

 

 

트로이 유적에는 아홉 개의 시대가 아홉 개의 층으로 쌓여 있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것은 성벽의 모습이다. 흙벽, 조개가 들어있는 벽, 돌벽, 벽돌 등이 각 층의 시대를 대변해주고 축성방법, 건축기법, 건축 양식 등도 시대마다 다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과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독일의 슐리만이 시작한 트로이 유적 발굴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러 시대가 뒤엉켜 있는 성벽. 쌓는 방법이 시대마다 다르다.

지금은 언덕에서 바다까지가 한참 떨어져 있지만, 그때는 요새 가까이 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토사가 밀려와 바다가 육지가 되는 바람에 바다에서 몇 km나 떨어진 이곳이 트로이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트로이 유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효율적 방어를 위해 성안으로 들어갈수록 성벽의 폭이 좁아진다.


올리브 나무 아래서 대평원을 바라본다.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 총사령관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대결을 펼쳐 헥토르의 목숨을 빼앗는 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주검을 마차에 매달고 파르토클로스의 무덤 주위를 내달린다.

 

이 모습을 본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밤중에 몰래 적진으로 들어가 아킬레우스에게 아들의 주검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무릎을 꿇고 적장의 발에 입을 맞춘 왕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마음이 열린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한다. 신들의 대리전으로 영웅들이 벌였던 이 전쟁에서 두 남자는 신들도 흉내 내지 못하는 용서관용의 미덕을 보인 것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통해 영웅들의 전쟁보다 인간이 지닌 연민을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한 것이 아닐까?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성벽 위에서 아들 헥토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리라.


어찌 신화를 허구라고만 할 것인가?

역사가 머리라면 신화는 가슴이다.

트로이, 신화를 벗기니 그 속에서 역사가 나온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5.17 12:34 수정 2021.05.1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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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