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사랑할 수밖에 없는 터키 4부

순백의 온천과 히에라폴리스 유적의 앙상블, 파묵칼레



파묵칼레 언덕 위에 세워진 히에라폴리스는 페르가몬왕이 왕비 히에라를 위해 만든 고대도시다. 이 도시는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 왕국에 의해 처음 세워져 로마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번성했다.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한 로마인들은 치유 효험이 뛰어난 온천수가 있는 이곳을 성스러운 도시라고 불렀다. 그래서 로마 황제와 귀족을 포함한 많은 로마 시민들은 여기서 온천 휴양을 하거나 휴가를 즐겼다.


히에라폴리스 가는 길의 파묵칼레 언덕을 목화솜처럼 하얗게 덮은 트래버틴(석회붕)


히에라폴리스는 로마에 이어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11세기 후반 셀주크투르크족의 룸셀주크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파묵칼레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지배세력의 변천 속에서도 지속적인 번영을 누려왔던 히에라폴리스이지만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1354년 이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아폴론 신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는 폐허가 되었다.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던 이곳이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자 이 도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문. ‘제2의 네로’라 불리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위한 문이다.


1887년 독일 고고학자 카를프만은 고대도시의 폐허 속에서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신전, 공동묘지, 온천욕장 등 귀중한 문화유적들을 발견하였고, 이후에도 발굴 및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의 석회층 온천지대는 세계자연유산으로, 고대 로마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데, 이런 복합세계유산은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고 한다.

 

특히 원형극장은 2세기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것으로, 로마 원형극장들 가운데 안턀라의 아스펜도스에 있는 것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지금도 연극공연이나 음악회가 열린다 

 

 죽은 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 유령들이 당장이라도 석관에서 튀어나올 것 같다

이곳의 35미네랄 온천수가 치유 효과가 있다는 소문에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치유를 위해 중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오다 보니 이 도시에서 생을 마감하는 외부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온천 바깥, 1km 떨어진 공동묘지 네크로폴리스에 묻혔다. 1,2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는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유적 중 하나다. 지금도 뚜껑이 열리거나 파손된 석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옛날 사람들은 도굴을 막기 위해 석관에 메두사의 머리를 장식하거나 저주의 글을 새겨 넣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였던 모양이다 

 

1만 5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객석은 언덕을 이용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목욕한 테르메 온천욕장 입구

히에라폴리스의 대표적인 온천은 고대 수영장인 '앤티크 풀'이다. 서기 692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진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을 온천수가 덮으면서 고대도시의 유적들이 잠긴 천연온천이 만들어졌다. 앤티크 풀은 수온이 항상 일정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며, 피부 알레르기와 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탄산 온천이다.

 

거대한 신전 기둥 사이를 유유히 수영하면서 온천을 즐기다 보면 2,500년 역사 속을 헤엄치는 묘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파묵칼레의 독특한 자연과 히에라폴리스의 아득한 역사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이색 명소로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앤티크 풀. 온천바닥에 고대 건축물의 기둥들이 가라앉아 있다.

고대도시 유적지를 벗어나 파묵칼레 언덕 위에 오르는 순간, 널따랗게 펼쳐진 순백의 향연이 연출하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신이시여, 진정 당신이 만드셨습니까?"

 

아주 오래전, 석회암으로 된 산의 위쪽에서 온천이 분출해서 온천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석회암 위를 흘러내렸다. 온천수가 녹여낸 하얀 석회질의 침전물이 쌓이고 쌓여서 하얀 성벽을 이룬 것이다. 우리네 같으면 '눈의 성'이라고 했을 터인데 평생 눈을 구경해본 적이 없는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모습을 두고 주변에서 흔히 보는 하얀 목화밭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파묵칼레에서 내려다보는 마을풍경은 천혜의 비경이다.


파묵칼레의 온천수가 만들어낸 석회 그릇 속에는 하늘색이 물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석회 그릇 속에 몸을 또는 발을 담그고 온천을 즐긴다. 그런데 맨 위의 욕조는 이미 순백을 잃어가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에 묻어온 돌가루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온천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맨발이어야 한다.


파묵칼레는 국적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종전시장이기도 하다.

 

파묵칼레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경사면에 만들어진 일명 트래버틴 테라스(travertine terrace). 길이 2.5km, 0.5km로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경이로운 자연의 유산이다. 넓적한 접시 모양을 한 못 안에는 물이 고여 있는데, 빛의 움직임을 따라 시리도록 푸른 쪽빛이 되거나 꿈같은 분홍빛으로 변하기도 하며 강렬한 금빛을 띠기도 한다. 예전만큼 물이 많이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신들이 노니는 욕조를 보는 듯 신비롭기만 하다.

 

하얀 석회층이 층층이 올려진 트래버틴 테라스는 파묵칼레 최고의 백미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물러나니 파묵칼레 아래 작은 시골 마을에 붉은빛 노을이 내려앉는다. 절벽 위를 부드럽게 타고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근 채 마을을 내려다본다. 하루의 소명을 다한 태양은 어느덧 하얀 도화지에 색을 흩뿌리는 예술가가 돼 순백의 언덕 위에 온갖 색을 가득 담아낸다. 때로는 오렌지빛이었다가 잠시 보랏빛이 되었다가 다시 붉은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그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환상적이다.

 

수천 년 전 화려했던 번영의 흔적이 담긴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 그 아래로 꽃피운 목화의 성 파묵칼레.

 

인간이 남긴 찬란한 문명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다지도 완벽하게 앙상블을 이룬 곳이 또 있을까.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5.28 11:58 수정 2021.05.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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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