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방향으로 50㎞ 위치에는 이오니아의 고대도시 에페수스가 있다. 거대한 도서관, 아고라, 신전, 원형극장, 쇼핑센터, 대형 목욕탕, 홍등가 등이 대표적 유물이며, 군사시설이나 성곽보다 교육, 문화, 여가에 가치를 둔 소프트 파워를 지향한 인구 25만의 대도시였다.
에페수스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건설되어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요충지로 번성한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시 쇠퇴하였다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정복된 뒤 새로운 에페수스가 건설되면서 헬레니즘 도시로 부흥한다.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아시아 속주의 수도로서 인구가 로마 다음으로 많은 지중해 동부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전성기를 누렸다.
에페수스 시내에서 약 6㎞ 떨어진 에페수스 유적은 1859년 영국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우드가 에페소의 원형극장과 아르테미스 신전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에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아고라와 셀수스 도서관 등이 발굴되었는데, 현재까지 20% 정도 발굴된 찬란했던 에페수스 유적의 대부분은 지금도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
남문에서 고대도시로 들어가서 대리석 도로인 바실리카를 따라 내려간다. 에페수스에서 처음 만나는 유적은 음악당인 오데온이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면 반드시 음악당을 지었다. 음악과 시 낭송을 주로 했는데 원래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소리는 색과 함께 원초적 감각으로 대중을 즐겁게 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모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석주만 남은 시청사 건물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서면 시저와 동시대에 살았던 매미우스의 묘가 나온다. 그 옆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뱀이 칭칭 감고 있는 조각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병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제2의 네로'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도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한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다. 신전의 아치가 몹시 아름답고 주위 석재에 새겨진 조각이 매우 정교하다. 신전 옆에는 니케의 여신상이 있다. 왼손은 월계관, 오른손은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데, 치맛자락을 자세히 보면 나이키 문양이 있다.
신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이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처럼 두 개의 기둥에 버티고 선 헤라클레스의 문을 만난다. 이 문을 기준으로 귀족과 서민의 생활권이 나누어진다. 헤라클레스의 문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좌우로 석주가 줄지어 서 있는 ‘쿠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로 내려선다. 이 길은 여기부터 에페수스 유적지의 중간지점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까지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길 오른쪽으로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친 트라야누스 샘이 나온다. 이곳은 도시에 물을 공급하던 수원지로 추정하고 있다.
트라이아누스 샘 건너편 도로변에는 로마시대 모자이크가 바닥에 그려져 있다. 폭 3m, 길이 80m 정도의 공간에 아름다운 장식을 했는데, 마치 대리석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다. 이 곳은 부자들이 살았던 동네의 사교 공간으로 추정된다. 저택 건너편에는 대중목욕탕인 바리우스 욕장이 있고, 목욕탕 옆에는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있다. 이 신전의 아치에는 행운의 여신 티케와 메두사의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을 지나 쿠레테스 거리 끝에 이르면 공중화장실이 나온다. 좌식 공중화장실에는 변기가 가림막도 없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치렁치렁한 긴 옷 ‘키톤’으로 치부를 가리고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하면서 볼일을 본다. 아래 경사진 도랑에 물이 흘러서 분변을 처리하고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발아래 홈통처럼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면 된다. 사창가 옆의 스콜라스티커 목욕탕은 1세기경 탈의실과 냉온탕, 열탕을 갖춘 3층 비잔티움 양식의 건축물이다.
중앙대로인 마블 거리와 크레테스 거리가 교차하는 도시 중심에 셀수스 도서관이 있다. 125년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아시아 지역 집정관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건축하였다. 16개의 코린토스식 대리석 기둥이 2층으로 받친 건물인데, 지혜, 덕, 사려, 학문을 나타내는 4명의 여신상이 있고 가운데는 비어있는 곳은 ‘아테나상’이 있던 자리다. 현재 도서관 앞에 세워진 4명의 여신상은 복제품으로, 땅속에서 발굴한 진품들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오스트리아의 발굴팀이 파편을 모아서 복원한 셀수스 도서관은 비록 전면에만 그쳤지만, 고대건물 복원기술의 최고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양식과 공간배치가 아름다워서 이 도시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길 건너에는 사창가,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등이 밀집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서관 앞에 있는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 문 아래에 대리석 거리의 지하도를 통해 사창가로 가는 통로가 있다.
사창가 입구 골목의 대리석 바닥에는 발바닥과 좌우에 왕관 쓴 여인과 하트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오면 여왕처럼 우아하고 예쁜 여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지만 여기 찍힌 발 사이즈 보다 커야 입장이 가능하다’라는 뜻이고, 발자국 위쪽의 둥근 구멍은 화대를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원형극장은 항구에서 에페수스로 들어오는 길목이자 마블 거리의 출발점에 있다. 로마제국은 도시 인구의 1/10을 수용하는 규모로 극장을 지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조성되었지만, 현재의 유적은 1~2세기 로마제국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착공하여 네로 황제 시기에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야외극장처럼 산기슭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부채꼴 모양으로 지었으며, 직경 154m, 높이 34m로서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객석 아래에 토관, 청동관을 묻어 공명효과를 극대화했다.
원형극장 맞은편 길은 ‘아르카디아대로’다. 길이 550m, 너비 11m로 도심과 항구를 연결한 대리석 길 양쪽으로 원주 기둥의 회랑이 줄지어 있고, 밤에는 횃불을 켜서 거리를 밝힌 세계 최초의 가로등 길이다.
대리석 거리의 오른쪽은 아고라 광장인데, 아랫부분은 상인들이 장사하던 아고라이고, 윗부분이 시민들의 광장인 아고라이다. 아고라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코린트 양식의 둥근 돌기둥들과 가게에서 취급하는 상품을 대리석 바닥에 모자이크로 처리한 회랑은 에페수스의 영광을 대변하고 있다.
에페수스가 쇠퇴하게 된 것은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또 카이스테르강에서 밀려오는 흙모래가 점점 쌓이면서 항구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에페수스에서 약 1㎞쯤 떨어진 곳에 있던 항구가 지금은 약 6㎞가량 멀어졌다고 한다.
에페수스는 역사 유적뿐 아니라 기독교 성지순례를 함께 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도 유명하며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다. 예수 사후 1세기에 마리아와 제자들이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즉 37년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마리아를 보살피면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저술하고 사후에 이곳에 묻혔다. 에페수스 유적 남문 매표소에서 가까운 셀주크에는 마리아가 살았던 유적도 있고, 사도 바울이 서기 55년부터 3년간 전교한 곳이기도 한데, 바울이 셀수스 도서관에서 이방인에게 설교한 내용이 성경에도 나온다. 이처럼 성격이 다양한 도시의 유적들을 골고루 엿볼 수 있는 유적지는 흔치 않다.
에페수스 유적지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진 셀추크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다, 아테네인들이 건설한 에페수스는 BC 7세기경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BC 3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해방되었다. 당시 알렉산더 대왕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아르테미스 신전에 매혹되어 이곳을 정복했다고 하는데, 이 신전은 당시 에페수스의 상징이었다.
신전은 BC 6세기 중엽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때 지어지기 시작해서 120년 동안 지어졌다 한다. 에페수스 사람들은 풍부한 재정 능력으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 이상의 규모로 장대하고 화려한 이오니아식 신전을 건축하는데, 바닥 크기가 가로 130m, 세로 70m, 높이 18m로 대리석 기둥이 무려 127개였다고 한다.
BC 250년 완성된 아르테미스 신전은 전 세계에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널리 알려지고, 에페수스는 신전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며 더욱 번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영화도 AD 3세기경 동고트인들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동고트인들은 신전을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파괴된 신전의 대리석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신전은 완벽한 폐허로 변하였다. 이곳의 석재는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의 성소피아 사원을 짓는 데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르테미스 신전에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관련된 역사가 전해 온다. 당시 격렬한 권력 다툼을 하던 여동생 아르시노는 스스로 이집트의 여왕으로 칭하며 언니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힘을 이용해 이 당돌한 여동생을 제압하고, 아르시노에는 일종의 전리품이 되어 로마로 압송된다. 로마는 아르시노에를 처형하지 않고 대신 그녀를 이곳 아르테미스 신전에 유배시킨다. 언니에게 여전히 위협이 되는 아르시노에는 결국 언니의 사주를 받은 안토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 아르시노에는 겨우 18세였다.
이렇듯 1,600년간 신전의 기둥 하나, 토대와 조각 파편만이 페허로 남아있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와트에 의해서 발굴되고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에페수스는 폐사지의 적막함이 있다. 자연 속에 파묻힌 유적의 잔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힘이 있다. 무너진 돌무더기와 듬성듬성 서 있는 날것 그대로의 유적 사이로 들어간다. 잠시 후 조각나고 스러졌던 돌무더기들이 일어나 그림판의 퍼즐처럼 맞춰진다.
셀수스 도서관 뒤 작은 광장에서는 학문과 철학을 논하는 그리스 학자들이 열변을 토하고 있고, 도서관 건너편 유곽 앞에서는 취한 젊은 선원들이 발자국 크기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베네치아에서 배가 들어와 장이 열린 아고라는 장사꾼들 고함으로 시끌벅적하고, 원형극장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결투에 극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일희일비한다. 기둥 위에 불을 밝힌 아르테미스 신전에서는 황소 스물네 마리의 고환을 잘라 여신에게 바치는 축제의식이 절정에 이르면서 에페수스의 밤은 깊어만 간다.
터키 에페수스에서 역사의 시간 속을 걷다 보면 그리스와 로마의 짙은 숨결을 느낀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