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잠이 들 찰나였는데 빗소리인 것 같아 눈이 번쩍 뜨였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창가로 가보았다. 정말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비치는 빗줄기가 제법 컸다. 가로등이 있는 곳은 어두운 곳보다 훨씬 많은 빗줄기가 보였다. 잠시 바라보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밖에서 바로 마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를 좋아한다. 특히 밤에 내리는 빗소리는 더욱 좋다. 어두운 밤하늘에 내리는 빗소리는 심신을 녹여주는 감미로운 음악과 같다. 어느 날엔 고요함 속의 자장가 같을 때도 있고 어느 날엔 격렬한 타악기의 연주로도 들려온다.
비의 소리는 나에게 음악적이며 시적인 감정의 바다를 항해하게 해준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에는 은근히 기분까지 좋아진다. 가만히 빗소리를 음미하며 그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세상의 복잡하고 요란한 것들 하나하나가 정리되듯 평화로워진다. 그러면서 빗방울 속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의 빗줄기는 반짝이는 은색의 실처럼 보인다. 곧게 뻗은 은실이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밤 중에 맞이하는 뜻밖의 비에 미소가 지어진다. 얼굴에 번지는 빗물을 한 번 닦는다.
나의 작품은 비와 빗소리를 형상화시켜 나의 감정과 현실을 역동성 있게 전달하려고 한다. 나는 오늘도 바람과 함께 어우러진 비의 동작, 빗방울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 땅바닥에 떨어지며 일으키는 파열의 모양과 소리,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사실 이런 것들은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것이지만 최근 뉴욕에서 작품을 하면서 더욱 새롭게 작품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소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들려오고 들려지는 것이 소리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잡음이 넘쳐난다. 사람들의 삶과 흡사한 면이 이것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다. 기대하지도 않은 행운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면 좋겠지만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 할 때도 있다.
또한 불편한 일들이 잡음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다수는 바르고 부지런하게 살아간다. 나는 뉴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사회라는 조직의 범주에서 협연을 이끌어낸다. 마치 한 방울의 비가 모여 협연을 이루듯 말이다. 한 방울의 비는 한 사람의 소리이며 빗줄기는 사람들이 구성한 사회의 소리이다.
빗방울은 그저 지상으로 내리며 만들어지는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아름다운 화성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나는 빗소리에서 다른 잡음이 잠재워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듣는 빗소리의 향연은 아름답다. 나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회화적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오늘 밤비 속에서 춤추는 빗방울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은 그들에게 이상적인 조명이었고 어둠은 무대였다. 자유분방한 몸짓의 춤은 나에게도 즐거움을 안겨준다. 서로 앞다툼은 있어도 불협화음 없는 신나는 몸짓의 춤이다. 그 동작은 너무나 유연하고 부드럽다. 훈련되지 않았음에도 고도의 난이도까지 갖췄다.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쪼그리고 앉았다. 이 무대를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 동작마다 하나의 댄서가 등장한다.
순간적인 춤은 이내 사라지지만 곧이어 연결되는 다음의 댄서 덕에 끊김 하나 없었다. 그들 자신이 내는 빗소리에 맞춘 이 무대는 날이 새도록 이어질 것이다. 나는 이 광경을 한 점의 작품으로 남겨본다. 사람들의 관계가 이처럼 원만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주연]
서양화가
개인전 2020 <군중> KCC갤러리/뉴저지
개인전 2020 <빗소리> 두루두루갤러리/독일
그룹전 2021 갈라쇼, KCC갤러리/뉴저지
그룹전 2020 <명상> 젠아트/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