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의 영화에 취하다] 만추

최민

감정 과잉의 시대, 우리는 그 속에서 넘쳐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실시간으로 빛처럼 스며드는 공감이라는 감정도 자신도 모르게 강요당한다. 속도에 길들어지고 일회성 감정에 길든 탓이다. 흘러가는 계절에 대한 단상, 누군가를 기억하는 법, 어쩔 수 없이 등진 사람과의 감정에 저당잡힌 채로 살아가고 있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살아간다. 맞다. 어쩌면 그게 삶인지 모른다.

 

문득 낡은 필름의 영화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은 지나가 버린 시간에게 말을 거는 방법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서 촌스럽지만, 다정한 사람들의 연기를 본다. 근데 참 진지하다. 영화의 기법도 진지하고 배우들도 진지하고 연기도 진지하다. 진지한 건 참을 수 없지만 이상하게 그 진지함에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영화 ‘만추’가 그러하다. 낯섦으로 시작되는 ‘만추’는 감정의 문법을 아는 듯하다. 깊은 여백이 느껴진다. 끝낼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추’는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영화다.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신성일, 문정숙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들었다. 1975년 김기영 감독이 ‘육체의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김지미와 이정길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들었다. 1982년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와 정동환을 주연으로 기용해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 김태용 감독이 현빈과 중국 배우 탕웨이를 주연으로 기용해 ‘시크릿 가든’이라는 제목을 붙여 만들었다. 시대마다 감독들이 영화로 만드는 걸 보면 매력 있는 스토리가 틀림없다. 나는 1982년 김혜자와 정동환이 주연을 맡은 ‘만추’를 보게 되었다. 

 

가정폭력범인 남편을 살해하고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모범수 혜림은 형기를 2년 남기고 3일간의 특별 휴가를 받는다.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와 어머니 산소에 가려고 강릉행 열차를 타게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범죄조직에 휘말려 쫓기던 민기를 만난다. 민기는 무슨 사연을 지닌 듯 하지만 따뜻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민기는 혜림에게 먼저 말을 건다. 혜림은 민기를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고통과 상처를 느끼며 정서적으로 가까워진다. 

 

그러던 중 민기는 폭력조직의 간부를 살해하고 만다. 민기의 집요한 접근으로 수형 생활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은 혜림은 민기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다시 교도소에 돌아가는 기차에 같이 올라탄 민기는 멀리 도망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던 중 기차가 고장나고 수리를 하던 중에 혜림과 민기는 기차에서 내려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민기의 혜림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하지만 혜림은 민기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이 출소하는 2년 뒤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교도소로 돌아간다. 

 

2년 후 혜림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호숫가 공원에서 눈을 맞으며 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민기는 오지 않는다. 민기는 경찰에 체포돼 교도소 갇혀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상처받은 혜림은 어디론가 떠나간다. 

 

나에게 1982년은 먼 과거의 시간이다. 그 과거의 시간에게 말을 거는 ‘만추’는 감정의 여백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많은 말이 없어도 감정만으로 관객을 끌고 간다. 요즘처럼 직관적이지 않아도 많은 걸 담고 있는 영화다. 혜림을 연기한 김혜자의 젊은 모습을 보는 것도 인상적이다. 정동환의 풋풋함도 만추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시대의 감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만추’는 안개처럼 아련하고 흐릿하지만,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감정들을 건드린다.

 

‘만추’는 감정의 언어가 지금처럼 직설적이지 않던 시대의 감성을 온전히 품고 있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극적인 삶을 걷는 72시간의 여정으로 관객에게 최대한의 몰입을 끌어내고 있다. 1982년이라는 시대적 공간은 촌스러우면서도 정감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존귀하지만, 특히 공간에 갇혀있는 제소자들에게는 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것이다. 늦가을 그 쓸쓸함과 고독함이 절제된 감정, 과하지 않은 표정, 말 없는 눈빛이 풍경과 어우러져 더욱 공허하다. 그 공허 속에 숨어있는 삶의 의지를 표현한 김혜자다운 연기가 압권이다.

 

‘만추’의 스토리는 강렬하다. 젊은 남녀의 사랑과 이별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 말고도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가정폭력이라는 근원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결국 그 피해자는 여자다. 그 지리멸렬한 폭력이 결국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에 우리는 울고 웃고 한다. 사르트르는 ‘나는 폭력에 대하여 한 가지 무기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혜림은 진절머리 나는 남자를 향해 말한다. 그러자 민기가 대답한다.

 

“남자란 다 그런 것인가?”

“남자에 달렸죠”
 

[최민]

까칠하지만 따뜻한 휴머니스트로 

영화를 통해 청춘을 위로받으면서

칼럼니스트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하고 

플로리스트로 꽃의 경제를 실현하다가

밥벌이로 말단 공무원이 되었다. 

이메일 : minchoe293@gmail.com

 

작성 2025.06.17 09:43 수정 2025.06.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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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