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 모티브가 된 곳, 크로아티아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수도 자그레브의 호텔을 나선다. 시내를 지나 교외로 들어서니 길 주위로 초지가 펼쳐져 있고 목축을 하는 작은 농가들이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집 베란다에는 어김없이 화려한 색의 아름다운 꽃들로 단장되어 있는 시골풍의 평화로운 풍경은 라스토케 근처에 오자 갑자기 전쟁 모드로 급변한다. 총탄 자욱이 남은 부서진 집, 반쯤 파괴된 탱크 등 처절했던 유고 내전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곳은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아픔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1991년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이 폴리트비체 지역을 점령하고 폴리트비체 국립공원의 경찰관을 살해하면서 사실상 유고 내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가 라스토케로 들어가는 긴 다리가 보이자 다시 분위기가 고조된다. 폴리트비체에서 내려오는 코라나강과 슬루니치치강이 만나는 다리 아래에 물과 요정의 마을 라스토케가 있다.
라스토케는 폴리트비체 가는 길가에 숨어 있는 요정의 마을이다. '작은 폴리트비체'라고도 불리는 마을에 들어서면 통나무집 사이로 물이 흘러넘치고, 물레방아 옆 작은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나온다.
물의 마을답게 곳곳에 작은 폭포가 있어 마을 어디서나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 물이 내는 소리는 귀를 거슬리게 하는 물소리가 아니다. 자연이 연주하는 한편의 오케스트라다.
아침에 내린 비가 그치니 계곡에 서 있는 마무의 푸른 잎사귀에 대롱대롱 맺힌 물방울들이 밝은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다.
라스토케에서 30분 걸려 폴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한다. 발칸반도 국립공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수도 자그레브와 자다르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폴리트비체는 다른 카르스트 지역과는 달리 물이 지하가 아닌 지표면을 흐르면서 석회질의 퇴적물을 형성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16개의 호수와 그 호수에서 92개의 폭포를 통해 표고 차 130m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극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이다.
전체 코스는 24km인데, 시간 여유에 따라 3시간에서 7시간까지 코스가 다양하다. 공원의 하이라이트가 대부분 하류에 있으므로 시간이 없다면 하류를 위주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A코스는 공원 1번 게이트에서 출발하여 폭포를 들린 후 선착장 P3까지 트레킹으로 이동하고 P3에서 배를 이용하여 선착장 P2에 도착, 그 일대를 둘러본 후 다시 P2에서 P1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여 공원 2번 게이트로 걸어 나오는데, 보통 2~3시간 정도 걸린다.
19.5ha에 해당하는 공원 안에는 크고 작은 92개의 폭포가 만든 16개의 호수는 마치 계단처럼 층층이 이어져 있는데, 그 위로 흐르는 천상의 빛깔을 가진 맑은 물은 한 폭의 그림이다. 물빛은 미네랄, 유기물 등의 함량과 햇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비 오는 날에는 특유의 옥색으로 변해 분위기가 반전된다.
비가 많이 오면 상류 쪽은 입장이 가능하지만 하류 쪽은 물이 범람해서 산책로가 침수되므로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기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땅이었으나, 16, 17세기 때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문제로 지역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너무 깊고 험한 지역에 위치하여 있다 해서 '악마의 정원'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름이라
인기척이 있으면 산책로 옆으로 새끼 송어들이 모여든다. 이 송어들이 다 자라면 공원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여행자들에게 송어구이로 제공된다.
산책로를 따라 크고 작은 폭포와 에머럴드 물빛의 호수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원래는 하나의 강이었지만, 석회암지대를 흐르던 강물로 인해 발생한 석회 침전물이 나무와 돌에 이끼처럼 엉겨 붙었고, 수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며 지금의 살아 숨 쉬는 자연을 형성한 것이다. 장구한 세월 동안 변함없는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선착장 P3까지 가는 길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산책로이다. 크고 작은 폭포와 호수가 바로 옆에 있어 천천히 걷으며 자연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선착장 P3. 유람선은 15분 간격으로 운항되는데 운임은 입장료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환경을 고려하여 모든 유람선이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소음이나 진동 없이 미끄러지듯 호수를 지나간다. 호수 주변 숲에는 곰과 늑대와 같은 야생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야간에는 입장을 통제한다고 한다.
선착장 P2에 내려서 약간 경사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숲과 계곡이 깊어지면서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 상태 그대로의 자연과 만나게 된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산 그림자가 짙어진다.
400년 전 공개된 이후로 현재까지 예전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정원에는 죽은 나뭇가지 하나조차도 잘린 그대로 두고, 자연적으로 쓰러진 나무만을 이용해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폴리트비체에서는 걷는 것이 쉽지 않다. 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가만히 서서 보면 옥빛, 두서너 발자국 떼고 나면 에메랄드, 잠시 후 다시 청남빛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색을 지켜보느라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이윽고 선착장 P2로 돌아와 다시 배를 타고 선착장 P1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산책로를 따라 공원 2번 게이트까지 가면 오늘의 트레킹이 종료된다.
공원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폴리트비체 별미 송어구이 식당으로 이동한다. 식당에 들어서자 곰 세 마리와 산양, 사슴들이 도열해서 손님을 반긴다. 일부러 테이블까지 찾아온 식당 주인은 이 집 주메뉴인 송어구이 대신 근처 마촐라 산에서 자기가 직접 잡았다는 곰 세 마리에 대해 사진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해준다.
산상의 호숫가 벤치에 앉아 힘든 여정의 숨길을 고르던 곳
에메랄드빛 물색 때문에 쉽사리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던 곳
초록색 나뭇잎들이 이슬을 머금은 채 푸른 아침을 맞이하던 곳
산들바람에 실려 온 진한 풀 내음이 얼굴을 건드리며 아는 체를 해주던 곳
호수 사이의 자그마한 폭포들이 모여 서로 자글거리며 옥빛 물을 토해 내던 곳
요정은 볼 수 없었지만 요정보다 더 밝고, 투명하고, 순수함을 만날 수 있었던 곳
순수한 자연이 주는 무한한 감동, 라스토케와 폴리트비체는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