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21년 4월 15일) 출간된 ‘한국적인 것은 없다: 국뽕 시대를 넘어서’에서 한국의 정체성에 관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철학자 탁석산은 우리 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 뿌리 논쟁을 그치고 이 시대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무기로서의 문화를 적극 수입·발굴해야 한다는 것. 그는 시대를 초월해 고정불변하게 이어져 온 [한국적인 것]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미의식 등은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 왔거나, 시대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오히려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찾으려는 강박이 우리 문화를 정체시키고, 썩게 만든다는 주장으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정한 한국문화는 뿌리보다 수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없다’ 시리즈가 유행했었다. ‘예수는 없다’, ‘붓다는 없다’를 비롯해서 ‘한국은 없다’, ‘한국사는 없다’가 있었는가 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깨달음은 없다’라는 책까지 나왔었다. 어떤 목사님이 쓰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역설적으로 ‘예수는 없다’가 되었다. 이쯤에서 스님이 ‘절이 죽어야 부처가 산다’는 책을 쓸 법도 했었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온 인류가 백인종이다 흑인종이다 황인종이다 하는 인종 간의 차별은 물론 인류의 인종주의 Human Racism를 어서 졸업하고 우주만물이 다 하나 같이 코스미안임을 크게 覺醒할 대오일번大悟一番의 기회가 왔어라.
하버드대 펠레그리노 석좌교수이며 미국 학술원 회원으로 20여 권의 과학 명저를 저술해 미국 국가과학메달과 국제생물학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1929 - )의 저서들은 한마디로 ‘생태계 없이는 인간도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인도의 과학, 기술, 생태계연구재단의 대표로서 개발과 세계화란 명목으로 자연을 약탈하고 있는 서구 문명을 비판해 제3세계의 노벨상인 ‘올바른 삶을 기리는 상 Right Livelihood Award’ 수상자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1952 - )의 저서들은 ‘자연=여성, 과학=남성’으로 해석, 이성과 합리성 맹신이 생태 재난의 주범이라며 직관과 포용의 여성성 회복을 주장한다. 과학은 어머니인 대지를 죽였으며 ‘과학(남성)이 죽어야 자연(여성)이 산다’는 것이다. ‘자연 없이 인류문명도 없다’는 결론이다.
이른바 ‘사랑의 복음福音’을 전파한다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교리를 초월해서 사랑으로 대동단결하기는커녕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파쟁만 일삼아 왔으니 이교도와 이방인 정벌에 나선 십자군이 또한 분열하여 혼란을 일으킨 나머지 진정한 사랑의 개념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종차별주의, 곧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인종차별주의racism이며,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다. 잡아먹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노예제도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이것은 22년 전(1999년)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 윤리학 강좌를 맡도록 선임되어 물의를 빚었던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 - )교수가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 (1975)’이란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이제 서력기원 21세기를 맞은 지도 벌써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자연환경은 물론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트기 직전이 가장 깜깜절벽이 아니던가. 결코 비관하고 절망만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으나 근년에 와서 소위 선진문명사회의 동향이 180도로 급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서양사람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려 우리 동양 고유의 오래된 노장철학과 원효의 화쟁사상 그리고 단군의 홍익 인간사상 등에서 인류의 구원과 진로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사회는 월등한 물질문명의 힘으로 전 세계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지구생태계를 파괴, 인류의 자멸 自滅을 재촉해 왔다. 이제 더 이상 기존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즉 정복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 착취대상으로서의 대인관對人觀, 아전인수식我田引水式의 선악관善惡觀이나 흑백이론 黑白理論의 이분법二分法으로는 그 해답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의학, 문학, 예술 각 분야에서 서양의 선각자와 석학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마치 종전의 주기도문 외우듯 물아일체物我一體, 피아일체彼我一體를 읊조리는 것을 종종 듣고 보노라면 우리는 절로 회심의 미소 완이일소莞爾一笑 하게 된다.
얼마 전 서양의 세계적인 과학자와 천문학자들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생을 두고 과학과 천문학에 전념해온 결과로 얻게 된 결론이 동물, 식물, 광물 가릴 것 없이 ‘생명은 하나unity of life라는 것과 또 하나는 본질적으로 별의 원소와 인간의 원소가 같은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만고의 진리를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았는데 말이다.
여름밤 시골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듯이 우리가 죽으면 별이 되는 것이리라. 이미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는 더이상 로봇이나 노예처럼 재미없고 흥미롭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흥미진진興味津津하고 신나게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어떤 삶이 창조적인 삶일까. 말할 것도 없이 각자가 각자의 가슴 뛰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각자의 그리움을 그리고 쓰는 그림과 글, 각자의 혼魂불을 지피는 노래와 춤을 미치도록 죽도록 부르고 추어보는 일이리라.
이는 다름 아니고 우리 각자는 각자의 선구자先驅者가 되는 것이리.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931)의 우화시집寓話詩集 <선구자 The Forerunner: His Parables and Poems, 1920> 제1장章 ‘선구자The Forerunner’ 같이 말이어라.
선구자先驅者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선구자이고, 그대가 지어 쌓아 올린 탑塔은 그대의 큰 자아自我 대아大我의 초석礁石일 뿐. 그리고 그 주춧돌조차 또 다른 하나의 토대 기초가 되리.
나 또한 나 자신의 선구자리오. 해 떠오르는 아침에 내 앞에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는 한낮에는 내 발밑에 밟힐 테니까.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그림자가 내 앞에 드리웠다가 또 한낮이 되면 내 발아래로 거두어지리.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들의 선구자였고 언제까지라도 그러하리. 우리가 거두었고 앞으로 또 거둘 것들은 다 아직 일구어 갈지 않은 논밭에 씨앗들이리오. 우리가 논밭이고, 농부이며, 농작물을 거두는 수확인收穫人인 동시에 수확물收穫物이리오.
그대가 안개 속에서 방랑放浪 유랑流浪하는 욕망欲望 욕심欲心 욕정欲情이었을 때 나 또한 그러했다오. 그러면서 우린 서로를 찾아 헤매다 우리의 열망熱望에서 꿈들이 태어났다오. 그리고 이 꿈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무한한 것들이리오.
그리고 그대가 삶의 떨리는 입술에 떠오른 소리 없는 말이었을 때 나 또한 그 입술에 말 없는 소리였다오. 그러자 삶이 우리를 내 뿜자 우리가 억겁의 세월을 타고 내려와 어제의 기억들과 내일의 그리움으로 우리 가슴 뛰기 시작했다오. 어제는 정복된 죽음이고 내일은 추구追求 고대苦待한 탄생誕生이니까.
그리고 이제 우린 하늘 우주의 손에 있다오. 그대는 그의 오른손에 있는 해로, 나는 그의 왼손에 있는 땅으로. 그렇지만 그대가 나에게 햇빛을 비춰준다고 해서 그대의 햇빛을 받아 쬐는 나보다 그대가 나보다 낫거나 나 이상은 아니리오.
그리고, 해와 땅,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해와 땅의 씨앗일 뿐. 언제 까지나 우리는 시작일 뿐이리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선구자로 내 뜰 문 앞으로 지나치는 낯선 나그네이리.
그리고 비록 나무들 그늘에 앉아 내가 움직이지 않아 보여도 나 또한 나 자신의 선구자리오.
THE FORERUNNER
You are your own forerunner, and the towers you have builded are but the foundation of your giant-self. And that self too shall be a foundation.
And I too am my own forerunner, for the long shadow stretching before me at sunrise shall gather under my feet at the noon hour. Yet another sunrise shall lay another shadow before me, and that also shall be gathered at another noon.
Always have we been our own forerunners, and always shall we be. And all that we have gathered and shall gather shall be but seeds for fields yet unploughed. We are the fields and the ploughmen, the gatherers and the gathered.
When you were a wandering desire in the mist, I too was there a wandering desire. Then we sought one another, and out of our eagerness dreams were born. And dreams were time limitless, and dreams were space without measure.
And when you were a silent word upon life’s quivering lips, I too was there, another silent word. Then life uttered us and we came down the years throbbing with memories of yesterday and with longing for tomorrow, for yesterday was death conquered and tomorrow was birth pursued.
And now we are in God’s hands. You are a sun in His right hand and I am earth in His left hand. Yet you are not more, shining, than I, shone upon.
And we, sun and earth, are but the beginning of a greater sun and a greater earth. And always shall we be the beginning.
You are your own forerunner, you the stranger passing by the gate of my garden.
And I too am my own forerunner, though I sit in the shadows of my trees and seem motionless.
이렇게. 너도나도 우리 모두 각자 대로 자신의 선구자 코스미안이 되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