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해인 1593년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조선 수군은 5월경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세한 뒤 군사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이 활동이 곧 삼도수군통제영 체제가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의 하나이다.
한산도를 거점으로 삼아 남해안 해로를 방어하는 작전은, 조선 조정의 주요 전쟁 전략의 하나였다. 1593년과 1594년의 『선조실록』 기사(권45, 선조26년-1593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 기사/권54, 선조27년-1594년 8월 20일 을축 6번째 기사)에는 조선 조정이 명나라에 조선의 방어 전략을 상세히 알리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한산도가 해로를 방어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임이 명시되어 있다.
충무공은 한산도를 거점으로 군사 활동을 하던 시기 이곳에 여러 건축물을 세웠는데, 『난중일기』에서 그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충무공이 업무를 보거나 거주하던 건물이 대표적이다.
『난중일기』, 1596년 6월 11일
홀로 빈 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원문] 獨坐虛軒 情不自勝也.
『난중일기』, 1596년 7월 12일
이날 어두워질 무렵 마음이 아주 어지러워 홀로 빈 헌에 앉아 있으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고, 걱정이 더욱 심해져 밤이 깊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원문] 是昏 心緖極亂 獨坐空軒 懷不自勝 念慮尤煩 夜闌不寐.
『난중일기』, 1596년 8월 1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루방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바로 헌방으로 돌아왔다.
[원문] 氣甚不平 移坐樓房 卽還軒房.
위 『난중일기』을 살펴보면, 건물을 의미하는 '헌(軒)'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난중일기』에 이와 관련한 더 이상의 내용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헌(東軒)이나 서헌(西軒)과 같은 건물로 추측된다. 동헌(東軒)은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이고, 서헌(西軒)은 수령이나 그 가족이 거주하던 내아(內衙)를 말한다. 충무공이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의 『난중일기』에는 '대청(大㕔, 大庁)'에서 공무를 보았다는 내용이 수십 차례나 등장하는데, 위 『난중일기』에 언급된 ‘헌(軒)’에 딸려있던 대청으로 짐작된다.
위 『난중일기』 1596년 8월 1일 기록에는 ‘헌(軒)’ 이외에 '루(樓)'라는 건물도 언급되어 있다. 루(樓)는 충무공이 한산도에 머물던 시기의 『난중일기』에 자주 언급되는 건물인데, 1596년 7월 15일 일기에 등장하는 '수루(戍樓)'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난중일기』에 '바다의 달빛이 루에 가득하다' 또는 '루 위에서 활을 쏘았다'라는 등의 기록이 나오는 점을 고려하면, 한산도의 수루는 망루(望樓)와 비슷한 건물이었던 듯하다. 위 일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루방(樓房)도 있었으므로 한산도 수루는 방도 딸린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또 다른 한산도 건물로는 여러 종류의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다. 다음은 이를 말해주는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5년 9월 25일
미시(오후 1~3시)에 녹도의 하인이 불을 내서 대청과 수루 방까지 번져 다 불타버렸다. 군량, 화약, 군기 등이 (있던) 창고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지만, 수루 아래에 있던 장전과 편전 200여 부가 불타버렸다.
[원문] 未時 鹿島下人失火 延及大廳與樓房 盡爲燒燼. 軍粮火藥軍器等庫 不及火 而樓下長片箭二百餘部燒燼.
* 화살 1부(部)는 화살 30개를 가리키는 단위이다.
『난중일기』, 1596년 2월 19일
황득중이 가지고 (온) 총통 철의 무게를 재서 창고에 넣었다.
[원문] 黃得中所持銃筒鉄 稱量入藏.
『난중일기』, 1596년 2월 23일
둔전의 벼를 다시 헤아렸다. 새 창고에 넣은 것이 167섬이고 줄어든 수량이 48섬이다.
[원문] 屯租改正. 新庫入積壱百六十七石 縮數四十八石.
『난중일기』, 1596년 5월 6일
막 어두워질 무렵 총통 숯 창고에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이는 감관들이 조심하지 않아 새로 숯을 받을 때 불씨가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서 이러한 재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원문] 初昏 銃筒炭庫 火出盡燒. 是監官輩不謹 新捧炭不考宿火 致有此患.
* 총통 숯: 조선시대 총통과 같은 화기류에서 사용되던 화약은 염초, 유황, 숯을 섞어서 만들었다.
* 감관 : 조선시대 관청에서 특정 업무를 맡은 직책을 가리키며, 감독관과 의미가 비슷하다. 군기(軍器), 봉수(烽燧), 대동(大同) 등 임무에 따라 여러 종류의 감관이 있었다.
위 『난중일기』 기록을 살펴보면 한산도에 군량, 화약, 군기(군에서 사용되는 물품), 철, 숯 등을 보관하던 창고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3도(전라, 충청, 경상)의 수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커다란 창고가 있었을 것이다. 1596년 5월 6일 일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감관까지 두었던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난중일기』 1594년 5월 3일 일기에는 '군량을 계산하여 준비하였다(軍粮計備)'라는 군량에 관한 짧은 언급이 등장한다. 그런데 『난중일기』 1594년 일기 뒷부분에 수록된 비망록에는 그 군량의 수량을 자세히 기록한 내용이 남아 있어서 눈길을 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비망록
5월 3일 창고에 있는 물건을 조사하고 정리하니 양식이 349섬 14두 4승, 무목미가 2차례 합하여 83(섬)이므로 도합 432섬 14두 4승인데, 지금 남은 것이 65섬 12두 4승이다.
[원문] 五月初三日 反庫 粮餉 三百四十九石十四斗四升 貿木米 二度幷八十三○ 合四百卅二石十四斗四升內 時遺在 六十五石十二斗四升
* 무목미: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쌀로 추정됨
* 자료 출처: 『완역 초서체 진중일기』(최두환, 『충무공이순신전집』, 제1권, 1999, 우석), 『이순신의 일기』(박혜일·최희동·배영덕·김명섭, 2016, 시와진실)
위 기록은 『난중일기』 1594년 일기 뒷부분에 수록된 비망록에 포함되어 있다. 『난중일기』에는 일기 이외에 이와 같은 비망록도 존재한다. 시중에 출간된 대부분의 『난중일기』 번역본은 일기만 수록하였기 때문에 비망록까지 소개한 번역본은 많지 않다. 위 『난중일기』 비망록에 수록된 창고 관련 기록은, 한산도에 세워진 군량 창고가 양식 432섬을 보관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규모였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2024년 8월 통영에서 열린 제63회 통영한산대첩축제 학술세미나에 청중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청중 가운데 계시던 한 분이 자신을 한산도 토박이라고 소개하면서, "한산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발굴 작업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통제영 유적지를 학술적으로 발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였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 한산도에 세워져 있는 제승당 같은 건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날 세미나의 발표자 가운데 한 분이 "지금의 한산도 제승당은 불도저로 땅을 밀어버리고 별다른 고증 없이 그냥 세운 건물이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여 필자의 충격을 다시 확인하여 주었다.
한산도를 발굴한다면 상당한 유적이 나올 것인데, 지금까지 제대로 된 발굴 한 번 시도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답답하였다. 서울 그린벨트조차 필요에 따라 해제하는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한산도에 비해, 정유재란 시기인 1598년 2월부터 11월까지 약 1년 동안 조선 수군의 통제영 역할을 했던 전남 완도군의 고금도는 지속적인 조사와 발굴이 진행되어 많은 유구와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구 가운데에는 군사들이 궁술을 연마했다고 전해지는 사정(射亭)터와 고금도 진지가 있으며, 유물로는 기와류와 자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다음은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을 시굴 및 발굴한 내용을 수록한 책의 표지와 그 일부 내용이다.


몇 년 전 위 책에 수록된 사진들을 처음 보았을 때 말로만 듣던 고금도 통제영이 실제로 다가오는 듯했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금도에서 발굴된 유구와 유물이 이 정도인데, 한산도를 발굴하면 얼마나 쏟아져 나올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위에서 설명한 헌(軒), 수루(戍樓), 각종 창고 등의 건물터 발견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제63회 통영한산대첩축제 학술세미나에서도 발표자 한 분이 한산도 발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최두환, 『충무공이순신전집』, 제1권 『완역 초서체 진중일기』, 1999, 우석
박혜일·최희동·배영덕·김명섭, 『이순신의 일기』, 2016, 시와진실
목포대학교박물관·완도군, 『완도 고금 이충무공 유적』, 2009, 목포대학교박물관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