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는 21세기 100년 동안에 일어날 만한 변화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공룡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이 있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신생아가 태어나는데 아버지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 잡지는 ‘비전 21 : 우리의 직업, 우리의 세계’라는 표기 하에 당시 화이트칼라 관련 직종이 미국 내 모든 직업의 약 90%로 추정되는데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이 중 90%가 사라지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화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어서 새로 생길 인기 직업과 퇴장할 직업을 각각 열 개씩 열거했다.
새 직업들은 무슨 일을 하는 것들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에 없어질 직업들은 다 금세 알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자동차 딜러, 우체부, 보험이나 부동산 중개업자, 교사, 출판업자, 트럭 운전사, 가정부, 감옥의 간수 등등이었고 그중에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어, 아버지도 직업인가?”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희한한 느낌도 들어 기사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내용인즉 수정 생식을 통하여 종족이 번식될 것이니 아버지로서의 중요한 사역이 하나 없어질 것 같다는 얘기다. 하기야 요즈음 신문, 잡지에서도 심심찮게 그런 기사를 보게 되니 우리는 이미 새 시대 문간에 발을 들여 논 듯싶다. 정자은행이 생겨서 자기가 낳고 싶은 아기의 인종, 성별을 고를 수 있다고 하며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고 당사자들이 직접 경매형식으로 사고팔기도 한단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버지를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는 그 발칙한 발상에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과학이 발전해서 체외수정이 보편화하면 어머니도 이 사회에서 밀려나야만 한단 말인가? 다가올 미래가 어둡고 두렵기만 하다. 엄마 찾아 삼천리라는 어린이 소설이 있는데 그 아이는 엄마가 밥 먹는데 필요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엄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서 모험의 길을 떠난 것이다. 이렇듯 어머니가 자녀들의 포근한 안식처라면 아버지는 멘토십의 표상이라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수천 년 전 동양과 서양이 서로 연결되기 전에도 동서양이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로 각각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우리나라 이야기부터 해 보자.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 유리의 이야기다. 주몽이 젊어서 부여 땅에 망명객으로 있을 때 예씨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그는 급히 피신해야 했다. 주몽은 부러진 칼을 모처에 숨겨 놓고 배가 불러오는 예씨 부인에게 말했다. “아이가 남자고 나이 들어 근본을 묻거든 부러진 칼을 찾아내 그것을 신표로 삼아 내게 오도록 하시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열 달 차서 낳은 아기는 사내였고 세월 따라 어느덧 아기는 소년으로 자랐다. 어느 날 친구들과 활을 가지고 놀다가 잘못 쏘아 물 긷는 아주머니의 물동이를 깨트렸다. 화가 난 아주머니는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풀이 죽어 집에 돌아온 아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의 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디에 계십니까?”
예씨는 고구려를 창건한 왕이 네 아버지라는 얘기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들려주었다. “일곱 마루의 일곱 모진 돌 위의 소나무 밑에 아버지가 무엇을 숨겨 놓았다. 찾아보거라.” 아이는 침식을 잊고 사방을 헤매다 드디어 그 소나무를 찾아 부러진 칼을 꺼냈다. 그 신표를 가지고 수백 리 길을 떠나 마침내 그는 아버지를 만났고 결국 고구려의 2대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다음은 플르타크 영웅전에 나오는 테세우스 왕의 얘기다.
그리스 왕 아이게우스는 자식이 없는 것이 큰 고민이었다. 그는 어느 날 여행길을 떠난다. 고되고 긴 여행 끝에 트로이젠이라는 작은 도시국가에 도착했다. 그 나라의 왕은 큰 연회를 베풀고 그를 만취토록 마시게 한다. 다음 날 아침 깨어보니 한 젊은 여인이 옆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트로이젠 왕의 딸이었다. 아이게우스 왕은 이 공주를 사랑했다.
어느 날 그는 왕궁 객사를 받치고 있는 섬돌 한 귀퉁이를 들고 그 밑에 가죽신 한 켤레와 칼 한 자루를 숨겨 놓는다. 다시 길을 떠나기 전 그는 공주를 데리고 그리로 갔다. “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근본을 묻거든 아비를 찾아 떠나게 하세요. 이 섬돌 밑에 신표가 있으니 그것으로써 내 아들임을 알리다. 꼭 제힘으로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주의 전송을 받으며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기한이 차 공주는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나이가 들자 자신의 근본을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왜 전 아버지가 없어요?”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객사로 가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장정 몇이 달려들어도 어려울 섬돌을 가볍게 들고는 가죽신과 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결연하게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후세에 전해지는 용감한 무용담들이 다 바로 그 여정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모든 난관을 다 물리치고 드디어 그리스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나 신표를 보여 주었다. 아이게우스왕은 너무 기뻐 그를 다음 왕으로 책봉했다. 그가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를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행한 테세우스 대제이다.
20세기 자기의 연고를 찾는 이야기로는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조상의 연결고리를 하나하나 더듬어 올라가 아프리카까지 가서 선조의 땅을 찾고 자기의 근본을 알아낸다. 그가 쓴 책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바로 그 정신적인 근본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일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자신의 근본을 물을 때 어머니들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너는 문명 프로젝트의 한 산물일 뿐이다.’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그 조상들에 대해 들을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을 때 그 아이는 얼마나 허무해질까?
이렇게 볼 때 아버지는 과거의 궤적이요, 장래의 나침반이다. 만일 아버지가 공룡처럼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우리 인류도 방향을 잡지 못한 배처럼 결국 난파될 것이 분명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아버지를 지켜서 우리 후손들의 자존과 그들의 앞길을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