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21년 6월 28일자 마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논설위원) 옥세철의 인사이드>에서 ‘붕괴 직전의 상황인가’에서 필자는 평양발로 전해지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다며 “북한은 곧 붕괴될 것인가. 아무도 자신 있게 그때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 번 균열이 일면 무서운 속도로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과거 베를린 장벽, 소련제국이 붕괴에서 보듯이. 김정은 체제를 조기 안락사로 유도하는 것, 이것이 폭정과 기아에 시달리는 2,500만 북한 주민을 진정 살리는 정책이 아닐까.”로 칼럼을 맺고 있다. 이 글에 아이디 wondosa라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
“만일 말입니다. 트가 또다시 하얀집에 머물고 있다면 지금쯤 미쿡은 어땟쓸까?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생각, 하늘은 미쿡을 버리진 아니하고 현명한 이들이 그래도 아직 많이 건재한다는 걸 보여주어 앞으로도 잘 돌아갈 거로 난 알지요. 하지만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대한은 미 일 중 눈치 보느라 정신없으면서도 통일을 못하고? 안 하고 못 하고 있는지 잘살고 자유롭게 행복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지할 수 있는 통일 아직도 못 하고 있는 대한 미쿡이 우릴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바치고 벌벌 떨고 눈치 보며 지내는 대한 알다가도 모를일”
어떻든 영어로 ‘소원이 말(馬)이라면 거지도 탈 텐데 If wishes were horses, beggars would ride’라는 스코틀랜드의 속담이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말로는 꿈 밖이라느니, 꿈에도 없었다느니, 꿈꾼 셈이라 한다. 이 말대로 그 누가 백마가 아닌 흑마를 타고 세계의 모든 약소국 약소민족의 인권 챔피언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투사가 된다면 오죽 좋으랴.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트레이스Thrace 태생의 검투사 출신 스파르타쿠스Spartacus (111 BC - 71 BC), 멕시코의 농지 개혁가 에밀리아노 사바타Emiliano Zapata (1879-1919),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 그리고 1960년대에 흑백 인종의 통합이 아닌 분리주의를 주창하며 흑인의 자존자립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자기방어 자위책으로 정당방위의 폭력도 불사하자고 흑인의 자존자긍심을 고무, 선양한 흑인 인권 투사 말콤 X - Malcolm X (1925-1965) (그의 본래 성씨 Little이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의 노예 시절 백인들이 지어준 것이라며 버리고 'X'로 개명했음) 같이 말이다.
그럴 경우 그가 할 일은 무엇보다 먼저 지배계급이 독선 독단적으로 저희만을 위해 설정해 놓고, 강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집행하고 있는 갖가지 부당한 법률과 규칙과 관습에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법이나 상식보다 힘, 수단보다 목적, 진실보다 거짓, 다수보다 소수, 빈자보다 부자, 약자보다 강자, 여자보다 남자,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보다 보수주의나 복고주의를 옹호하는 법규와 관습에. 그래서 그동안 소수 특권층만이 즐기던 '살만한 삶'을 우리 모두 다 같이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이럴 경우, 다시 말해 그 누가 성공했을 경우, 세상이 뒤집혔다고 열광한 나머지 복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도로아미타불徒勞阿彌陀佛이다. 그렇게 되면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늘님 아버지’ 하는 대신 ‘땅속에 계신 우리 땅님 어머니’ 부르면서 남성 백인 지배체제에서 여성 유색인종 지배체제로 바뀌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조심하고 피해야 할 함정이 흑백 논리다. 마치 세상 한쪽에는 악인만 있고, 또 한쪽에는 선인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형편과 상황에 따라 모든 비백색 유색인종, 비선민인 이방인, 비기독교인인 모든 미신자 이교도, 그러다가는 너와 나,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오로지 나 혼자만 옳다는 유아독선唯我獨善 유아독존唯我獨尊이 되고 말 테니까.
이와 같은 유아독선과 유아독존적 가치관이 유사 이래 인류 역사를 통해 온갖 잔악무도殘惡無道하고 파렴치한 천하만행天下蠻行을 여호와 하나님, 기독교, 민주주의, 자유 세계 또는 공산주의, 노동자, 농민, 아니면 그 어떤 왕실과 귀족 양반이나, 그 어떤 제국 제왕 천황폐하, 위대한 그 누구 그 무엇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미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십자군을 비롯해 사람사냥 아니면 황금 사냥에 나선 서양의 해적들이 반항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 거의 다 멸종시키고, 복종하는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노예로 삼아 백인들의 식민지와 제국을 건설해 왔다.
이와 같은 가치관이 최근엔 한국의 분단, 캄보디아의 초토화, 니카라과의 붕괴 작전, 포클랜드 섬, 그라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한국전과 월남전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미화시켜 왔다. 한편 이렇게 전횡적인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반대하는 ‘반항의 정신’을 가진 이상理想아니 이상異想주의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역적, 반도, 반동분자, 이단자, 광인狂人, 악인, 죄인, 깜둥이, 빨갱이, 노랭이로 몰려 박해받고 희생된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폭군을 몰아내기 전에 우리 각자 가슴과 머리 속에 있는 폭군부터 몰아내야 하리라. 이를 앞서 깨닫고 우리보다 먼저 이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 떠난 선각자先覺者 코스미안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이 남긴 그의 우화집寓話集 ‘방랑자The Wanderer’ (1932)에 나오는 비유담譬喩談 하나 우리 함께 음미해보자.
눈물과 웃음
땅거미 질 때 이집트 나일강가에 승냥이 비슷한 들개 하이에나와 악어가 만나 서로 인사人事가 아닌 수사獸事 말을 나누었다.
“요즘 어떻습니까, 악어 씨?”
하이에나가 묻자, 악어가 대답했다.
“좋지 아니하오이다. 때때로 고통과 슬픔에 복받쳐 내가 울기라도 하면 남들이 저건 악어가 거짓으로 흘리는 위선의 눈물일 뿐이라고 하니 내 기분이 여간 상하는 게 아니라오.”
그러자 하이에나가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고통과 슬픔을 말하지만 잠시 내 말도 좀 들어 보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경이로운 기적에 감탄, 기쁨에 넘쳐 온 자연과 함께 내가 소리 내어 웃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저건 실컷 배부르게 먹이 많이 잡아먹고 좋아서 웃는 하이에나의 잔악殘惡한 웃음소리일 뿐이라고 한다오.”
TEARS AND LAUGHTER
Upon the bank of the Nile at even tide, a hyena met a crocodile and they greeted one another.
The hyena spoke and said,
“How goes the day with you, Sir?”
And the crocodile answered saying,
“It goes badly with me. Sometimes in my pain and sorrow I weep, and then the creatures always say”
“‘They are but crocodile tears,’ And this wounds me beyond all telling.”
Then the hyena said,
“You speak of your pain and your sorrow, but think of me also, for a moment. I gaze at the beauty of the world, its wonders and its miracles, and out of sheer joy I laugh even as the day laughs. And then the people of the jungle say, ‘It is but the laughter of a hyena.’”
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한 사람의 웃음은 때론 다른 사람의 눈물이고, 또 한 사람의 눈물은 또 다른 사람의 웃음이다. 비근한 예로 우산 장사와 양산 장사가 그렇고, 의사와 환자, 유가족과 장의사가 그렇지 않은가.
부처님 앞에 공양드리거나 어떤 귀신한테 굿이라도 해서 대학입시, 사법고시 등 어떤 시험에 운 좋게 합격한 자식 부모의 웃음꽃은 낙방거자落榜擧子 부모의 울상 아닌가. 부처님이나 예수님 또는 어떤 귀신이 사람에게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정말 주는지 또 참으로 신神이 정말 존재하는지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수 없겠지만, 설령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신이 신다운 신이라면 약육강식의 자연계와 인간세계에서 무조건 강자의 편을 들거나 어떤 특정 인종이나 개개인의 이기적인 기도나 기구를 편파적으로 들어주는 그런 신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즐겁고 기쁜 일이 있을 때 이것이 다 내가 잘나고 예뻐서 하느님이 내게만 내리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만큼 축복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느끼는 미안지심未安之心에서 악어같이 거짓으로라도 눈물 좀 흘리는 편이 더 좀 양심적良心的이고 또 양심적養心的이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불행에 같이 울고 가슴 아파하기 전에 당장 잠시 나타난 그야말로 뜬구름같이 덧없는 내 행복부터 먼저 만끽하면서 하이에나처럼 웃어보는 편이 더 좀 인간적이고 솔직하며 정직하지 않을까.
아, 이렇게 세상에는 악어탈을 쓴 심약心弱한 토끼나 늑대탈을 쓴 천진난만한 병아리가 있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천당과 지옥이,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쌍태아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가 되는 것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