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사랑하는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소망, 이런 마음이 간절해지면 꿈을 꾼다. 몽애(夢愛)다. 이러한 사연을 얽은 노래가 1949년 현인의 목청에 걸려 세상에 나온 <꿈속의 사랑>이다. 이 노래가 사랑의 콜센타 무대에 불려 나왔다. 노래 탄생 71년 만이다. 탄생 연륜으로 치면 고희를 넘긴 원로 유행가다. ‘대전, 권소희. 와우~ 반갑습니다.’ 목소리 끝자락에 연분홍 슈트를 걸친 찬또배기 이찬원의 목청이 간들간들 떨렸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응원 소리가 울린다. 1절 뒤에는 출연 진들의 다이아몬드 스탭 댄스 타임. 발걸음에 분홍 꽃 이파리가 톡톡 차이는 듯하다. 검정 슈트에 백바지를 걸친 김성주의 나팔 걸음 춤 보폭이 너풀너풀 크다. 한바탕 흥 마당이 끝나고, 덕담이 오간다. ‘권소희 씨, 잘 들으셨어요. 네, 잘 들었습니다. 남편분도 감사합니다. 네, 영탁 씨 감사합니다~.’아내는 이찬원에게 노래를 콜하고, 남편은 리듬 탁에게 감사와 파이팅을 전했다. <사랑의 콜센타>의 멋이고 맛이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 하는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잊어야만 좋을 사람을 잊지 못한 죄이라서/ 소리 없이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아아 사랑 애달픈 내 사랑아/ 어이 맺은 하룻밤의 꿈/ 다시 못 올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 것을//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 하는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아아 사랑 애달픈 내 사랑아/ 어이 맺은 하룻밤의 꿈/ 다시 못 올 꿈이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뜨지 말 것을/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 하는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가사 전문)
노래 듣기 ▶https://youtu.be/PUq6vHbFvew
사랑해선 안 될 사랑, 사랑해도 될 사랑의 한계는 무엇일까. 태산은 만물의 호불호(好不好)를 가리지 않아서 큰 골과 능과 숲을 이루었고, 바다는 작은 강 큰 강을 아울러서 풍성함을 유지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산처럼 바다처럼 품어주기를 바라지만 그 한계는 51:49다. 누가, 누구에게 나의 2%를 내어줄 것인가. 삶을 이어가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에 비유한다면 내가(개인들 저마다가) 천자(天子)보다 못할 게 무엇인가.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을 가름 한다면 나의 등에 짊어진 지게에 얹힌 짐 덩어리 섶(나무꾸러미)보다 더 무거운 것이 어디 있으랴. 아픈바 위태로운 바를 따질 때 내 손톱 밑의 가시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으랴. 이런 선택과 관계 속에서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은 나의 2%를 내어줄 수 없는 관계의 대상이다. 그 대상을 사랑한 죄가 바로 <꿈속의 사랑> 노래다. 이 노래는 세대를 거듭하며 여러 가수가 부르는 불후의 애창곡이다. 홍민·윤항기·윤복희·심수봉·박경애·자우림·채은옥 등이 불렀고, 근래에는 슈퍼스타K에서 박시환이 불러서 열광을 받았다. 이 곡은 중국 가요곡에 손석우가 노랫말을 걸친 번안곡이다. 아마도 현인이 해방 이전에 중국에서 활동할 때 익힌 곡을 귀국 후에 발표한 것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현인은 아버지의 꿈과 다른 자신의 꿈을 살아낸 예술가다.
<꿈속의 사랑>은 중국의 몽중인(梦中人)이 원곡 가사다. ‘달빛은 그렇게 흐리고 대지는 밤안개로 뒤덮이는데, 내 꿈속의 사랑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나. 멀리서는 파도 이는 소리가 들리고, 솔바람은 바야흐로 슬피 우는데, 내 꿈속의 사랑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나. 장미처럼 화려한 봄날이 없으니, 마치 줄 끊어진 금(琴)을 세워놓은 듯하구나.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가니, 하루가 지나는 게 마치 일 년이 지나는 것 같네. 밤 앵무새는 숲속에서 슬피 울고, 풀잎 위에는 이슬방울이 맺히네. 내 꿈속의 사랑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나. 장미처럼 화려한 봄날이 없으니, 마치 줄 끊어진 금을 세워놓은 듯하구나.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가니, 하루가 지나는 게 마치 일 년이 지나는 것 같네. 밤 앵무새는 숲속에서 슬피 울고, 풀잎 위에는 이슬이 맺히네. 내 꿈속의 사랑이여, 그대는 어디에 있나.’1942년, 중국영화 <장미는 곳곳에서 피고>에서 중국 가수(공추)가 부른 곡이다. 이 노래는 8‧15 광복 후 미국 군정 3년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년 뒤(6‧25전쟁 발발 1년 전)에 탄생한 노래다. 당시는 정치 사회적으로 많이 혼란했고, 이념 감시(監視)의 서슬도 시퍼렇던 시절이다. 그 시절 당국의 이념적 잣대의 감시도 피하고, 밀려오던 서구 문물에 대해서 막연한 동경(憧憬)을 하던 대중들의 관심을 타깃으로 한 산물이다.
해방 후 1946년 5월 1일, 우리나라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된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South Korean Officer Training School)다. 미군정은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 폐교 후 5월 태릉에 창설했다. 초대 교장은 이형근 참령(소령), 부교장은 장창국 부위(대위)였다. 1기부터 6기까지 1,254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미군정은 단기간에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기부터 4기까지는 일본군·만주군·광복군 출신 군(軍) 경력자들을 입교시켰다. 이 때문에 장교의 상당수가 일본군 출신이었다. 5기는 5년제 중학 졸업 이상의 민간인을, 6기는 우수 부사관(하사관) 및 병을 대상으로 모집했다. 6‧25 전쟁 때 1기생 연대장으로부터 6기생 중대장까지 30%가 희생되었다. 이것이 정부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현인(본명 현동주)의 아버지는 당시 부산에서 영국계 석유회사에 다니던 엘리트였다. 그는 아들에게 이 사관학교 진학을 권한다. 하지만 현인은 성악을 전공한 후 교수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아버지 몰래 일본행 관부연락선을 탄다. 일종의 가출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학비를 끊어버린다. 현실이 이상을 지배하는 생활고, 그는 신문 배달과 막일 등 닥치는 대로 임하면서도 꿈을 접지 않았다. 성악교수를 향한 몰입이었다. 하지만 이 꿈은 방향을 바꾼다. 아니 바뀌었다. 대중들의 갈채, 박수 소리가 그 이유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온 그를 반겨준 것은 밀폐된 강의실의 칠판이 아니라 시공관에서 상연되던 영화 <자유만세>의 1+1프로젝트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었다. 영화상영+노래공연 프로그램. 그곳에는 대중들의 환호가 있었고, 박수갈채가 있었다. 그는 녹음도 하지 않았던 노래, <신라의 달밤>을 아홉 번이나 재창(再唱)받는다. 우리나라, 앙코르 신화의 탄생 순간이었다. 앙코르(encore)는 ‘다시, 한 번 더’라는 뜻으로서, 연주자가 청중의 박수에 대한 답례로, 다시 그 곡, 또는 다른 곡을 추가로 연주하는 것. encore란 말은 독일, 영국 등에서 사용되며,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bis도 사용한다. 성악교수의 꿈이 대중가수로 뒤 바꿘 순간이다. 아버지의 꿈도 자신의 꿈도 아닌 대중의 꿈으로.
사람의 명성(名聲)은 살아있을 때 이루어지고, 덕(德)은 이승을 등진 뒤에 드리워진다. 사랑은 명성일까 덕일까. 사랑의 이룸과 드리움은 언제일까. 이는 햇살 머금은 풀잎 이슬처럼 명료하다. 사랑은 이승의 현재진행 동사형으로 이어질 때 향기를 발한다. 마주하는 상대방이 서로를 흠향할 수 있는 실체이다. 지극히 간절하면,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은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꿈속의 사랑>이다. 살아있는 한 소망을 버리지 마라.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희망, Spero Spera다. 키케로의 설파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