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9일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저는 살만한데 나라가 걱정’이라는 글을 아래와 같이 옮겨본다.
김형석 교수는 법 이전에 양심과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3일 인터뷰에서 “대통령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된다는 식인데 그건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뿐 인생의 가장 낮은 단계”라며 “양심과 도덕, 윤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17세 때 도산 안창호의 설교를 듣고 뜻을 세웠다. 시인 윤동주와는 어릴 적 친구. 대학에서는 김수환 추기경과 동문수학했고, 교편(중앙고)을 잡는 동안에는 정진석 추기경을 길러냈다. 그리고 평생의 벗인 고 안병욱 교수 곁에 자신이 갈 곳을 마련해 뒀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지만 이 정도 삶이라면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
―1920년생이신데 아주 정정하십니다.
“그런가요? 건강은 괜찮은데 백 살이 넘으니 별일이 생기기는 하네요. 지난해 제주도 가려고 김포공항에 갔는데 저만 발권이 안 됐어요. 컴퓨터에 제 나이가 한 살로 떴다더군요. 대한항공만 930번 이상을 탔는데… 컴퓨터가 나이는 100을 빼고 읽나 봐요. 백 살이 넘은 사람이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인지 항공사도 처음 겪었나 봅니다. 하하하. 5년 후에는 초등학교에 갈지도 몰라요.”
-명예 교장선생님 같은 걸 하시나요?
“아니요. 3년 전인가? 제 주변에 106세 된 할머니가 계셨는데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왔대요. 별일이다 싶어 놔뒀더니 안 보내면 벌금 문다는 통지서가 또 왔답니다. 주민센터에 갔더니 여섯 살인데 손녀를 왜 학교에 안 보내느냐고 해 ‘그게 나’라고 했더니 놀라더래요. 몇 년 후에 저한테도 초등학교 입학하라는 통지서가 오겠지요? 다시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우문(愚問)입니다만 늙는다는 건 어떤 건가요.
“글쎄요. 안 늙어봐서…. 저희 때는 60세가 되면 회갑 기념 논문집을 내고, 잔치하고, 소일하다 몇 년 후에 정년퇴직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저도 예순에 같은 행사를 했는데 그 며칠 전만 해도 ‘안녕하십니까’ ‘일찍 나오셨습니다’ 하고 인사하던 후배 교수들이 이제는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요새 뭘로 소일하십니까’로 말을 바꾸는 거예요. 나는 늙었다는 생각도 없고, 늙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안 늙을 수도 있는데 주변에서 자꾸 늙은이로 취급하니까 늙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때 들었지요. 그래서 65세 정년퇴직하는 날 후배들 앞에서 ‘졸업 후에는 사회에 나가 일하는 게 사회적 책무이니 앞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했어요. 좀 오기를 부린 거죠. 그래서인지 제 책 중에 비중 있는 건 70대에 나왔어요. 학교에 있을 때가 아니고….”
―60세가 되니 비로소 철이 든 것 같다고도 하셨습니다만.
“정년퇴임 후 외국에서 강연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썼는데 그러다 보니 75세가 됐더라고요. ‘이제는 좀 늙었나?’ 하고 봤는데 여전히 한창 좋은 나이인 것 같았어요. 여든세 살 땐가? 50년 지기인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인가를 얘기한 적이 있는데 셋 다 60쯤 되니까 그제야 철이 든 것 같다고 했어요.
철들었다는 게 뭐냐면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비로소 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를 말하지요. 사람이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아요. 노력만 하면 90세까지는 성장할 수 있겠더라고요. 김태길 교수도 우리 나이로 90세까지 살았는데 세상을 떠나기 7, 8개월 전까지 정상적으로 일했거든요. 사과나무를 키우면 열매를 맺을 때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사회에 열매를 주는 때가 60∼90세라고 봐요.”
―힘든 시기는 없으셨습니까.
“구십 고개가 힘들었어요. 저와 비슷한 또래들이 대부분 그때를 전후해 세상을 떠났거든요. 살아 있는 친구들도 거동을 잘 못하고…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1920∼2017)는 정신은 좋았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했지요. 강영훈 전 국무총리(1922∼2016)는 몸은 건강했는데 치매로 힘들어했고…. 저도 구십 고개가 되니 확실히 신체적인 면은 내려가더군요. 그런데 희한한 게 정신은 아니더라고요. 문장력은 50, 60대 때가 좋았지만 역사적인 통찰력과 시야는 지금이 더 넓은 것 같아요.”
―매일 수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보통 오전 6시∼6시 반 사이에 일어나는데,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 하지만 그전에는 일주일에 5일 수영을 했어요. 50세 때까지 술, 담배는 안 했는데 지금은 와인이나 맥주만 아주 조금 마시지요. 지금도 몸에 해로운 건 전혀 안 해요. 안병욱 선생이 젊고 건강하게 살려면 공부 여행 연애를 많이 하는 게 좋다고 했는데 맞습니다. 감정이 젊어야 건강한데 연애만큼 감정이 젊어지는 게 또 어디 있습니까. 30, 40대보다 70대에 연애할 때가 더 젊어지거든요.”
―실례지만 연애도 많이 하셨습니까?
“안 선생이 80대 초반 때였는데 집 근처 카페 아가씨랑 친하게 지냈어요. 그 아가씨가 안 선생 책도 많이 읽고 친절하게 대했는데 하루는 조용히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다고 했대요. 잔뜩 기대하고 2주 만에 봤는데… 아, 글쎄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더라는 거예요. 그러겠다고는 했는데 커피 맛이 뚝 떨어지더래요.”
-주례 부탁을 했다면 20대였을 것 같은데… 괴테입니까?
“나이가 많아도 남녀 간의 감정에는 차이가 없는 거 같아요.”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고… 즐겁게 살고 있어요.”
―98세 때 세금만 3000만 원을 내셨다고요.
“그땐 상금 때문에 좀 많았죠. 강연료도 있고 재작년에는 교회 설교까지 포함해 160회 정도 했으니까요. 항상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책 인세 등이 있어서 좀 많이 내기는 해요. 작년에는 1500만 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번 달 건강보험료가 100만 원이니까 누군가 잘 쓰겠지요?”
-네? 무슨 뜻이신지
“잘 안 믿어서 말하기 뭐한데… 전 병원을 거의 안 가요. 어쩌다 가면 의사가 언제 건강검진 받았느냐고 묻는데 받아본 적이 없어요. 안 믿기지요?”
-네. 상금은 개인적으로 안 쓰신다고 하던데요.
“내가 번 돈은 쓰지요. 하지만 상금은 내가 번 게 아니라 사회가 맡긴 돈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 쓰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맡겨서 문화사업이나 사회사업 같은 데 쓰고 있지요.”
-외람되지만 너무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교수 때 월급이 오르거나 보너스가 나왔다고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지요. 등록금을 못 내는 학생들이 수두룩했는데 스승이라는 사람이 자기 월급 올랐다고 좋아했으니 요즘도 일기를 쓰면서 매일매일 실수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장수하신 분들이 많습니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일곱 분이 100세를 넘겼죠. 그런데 공통점이 있어요. 재산이나 명예 같은 데 욕심이 없고, 화를 내거나 남 욕하지 않아요. 감정이 아름다운 분들이라고 할까.”
―선생님 칼럼을 보면 현 정부에 화가 많이 나셨던데요.
“하하하. 많이 나지요. 내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불만이 많은데, 사람이 미운 건 아니고 하는 일이 틀려서….”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는 권력과 힘이 지배했고, 김영삼 대통령부터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습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법치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로 유지되는 사회로 넘어가야 하는데 현 정부는 권력으로 몰아대고 이끌어가니까 다시 권력사회로 떨어지고 있어요. 청와대 사람들 얘기 들으면 도덕과 윤리가 없잖아요. 또 북한 인권 문제는 우리가 더 원해야 하는데 그런 건 언급하지 않고 오직 북한 정권하고만 손잡으려고 하니 나 같은 사람은 나라 걱정이 많지요. 해방 후 김일성하고 같이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가장 먼저 할 일이 뭐냐고 물으니 친일파 숙청, 토지 국유화, 지주 자본가 추방이라 하데요. 지금 여기서도 극렬 좌파는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랑잎을 타고 대동강을 건넜다는 그분인가요?
“네. 초등학교 선배에 고향도 같고,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죠. 우리 진외가 할머니가 석 달 동안 젖을 먹여 김일성을 키웠어요. 김일성 어머니와 같은 마을 출신인데 비슷한 시기에 두 분 다 친정에서 출산했거든요. 그 할머니 아들들이 공산당 때문에 죽었지요.”
―지난해 ‘국민이 정부를 더 걱정한다’는 칼럼을 쓰신 것도 그런 까닭입니까.
“사회가 유지되려면 진실 정의 휴머니즘이 있어야 해요. 이 가치가 무너지면 그 사회는 없어집니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이런 가치가 다 사라지고 있어요. 지금 대통령 말을 우리가 못 믿지 않습니까? 지금 여당 대표는 물론이고 그 전 대표는 더 심했고. 정부가 국민을 걱정해줘야 하는데, 거꾸로 국민이 나라와 정부를 걱정하게 만드니 새해에는 문 대통령이 좀 정직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 사람이 아니면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아주 편협한 사고방식도 좀 고쳤으면 하고요.”
그는 종종 모르는 사람에게 “대학 등록금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는다. 영문을 몰라 하는 김 교수에게 그들은 “어떤 분이 대신 내주시면서 ‘내가 학생 때 김형석 선생님에게 등록금을 받았는데 졸업 후 갚으러 갔더니 내게 갚지 말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라’고 하셨다”고 했다고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제자들의 선행이 그도 모르게 30여 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이다. 이런 분의 고언(苦言)은 진심이라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상은 102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글을 끝으로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살아있는 신화(神話 아니 神化)가 된 예를 하나 들어보리라.
현대 무용의 어머니로 불린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1894-1991)은 1990년 191번째 창작무용 ‘단풍나무잎 랙 리듬(Maple Leaf Rag)’을 발표, 1991년 순회공연을 다녀오다가 96살(한국 나이로는 97세)의 나이로 폐렴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영원한 현역임을 고집했다.
1932년대 후반, 350년간 이어져 내려온 고전(古典) 발레의 꽉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생생한 무용언어를 구사하여 세계 무용계에 현대 무용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마사 그레이엄이다. 그녀의 혁명적 표현 양식의 ‘그레이엄 기술 (Graham technique)’로 현대 무용가들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움직임이란 사람이 감추려고 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표현하는 거죠. 나는 내 무용이 이해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관객이 뭔가 느끼면 됩니다. (Movement never lies. It is a barometer telling the state of the soul’s weather to all who can read it)” 다시 말해 “춤이란 몸의 노래, 기쁨이나 아픔을 몸으로 노래하는 거죠. (Dance is a song of the body. Either of joy or pain.)”이라 했다.
1894년 5월 11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의사의 딸로 태어나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그녀의 예술을 지배할 원리를 배웠다.
아버지는 현미경으로 물을 보여주셨어요. 깨끗한 물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꿈틀거리는 게 보였죠. 아버지는 내게 표면 밑에 있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춤이란 표면 밑의 다양한 의미를 환기시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녀는 1969년 75세까지 직접 무대에 섰고, 1920년 창단한 무용단을 이끌면서 2백 작품이 넘는 무용을 안무했다. 그녀의 춤은 관능적이고 신비하며 현대 예술과 원시 문화 간의 유사성이 항상 내재하는 것이 특징인데 현대무용에 있어 낭만주의의 절정을 이룩했다.
또 음악가들은 장수를 누리기로 잘 알려져 있다. 런던의 위그모 홀(Wigmore Hall)에서 만 98세가 된 (정확히는 이틀 모자라는) 폴란드계 미국인 피아니스트 미치슬라브 호르조브스키 (Mieczyslaw Horszowski 1892-1993)가 피아노 독주회를 가져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그의 친구며 연주 파트너였던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1876-1973)는 그의 나이 95세 때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유태계 독일의 지휘자 오토 클렘퍼러(Otto Klemperer 1885-1973)는 88세로 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지휘를 했고, 프랑스 출신 미국의 지휘자 삐에르 몽뙤(Pierre Monteux 1875-1964)는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 그의 나이 89세 때 런던 교향악단과 20년 계약을 맺는 계약서에 사인 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실제 인물로 호로조프스키의 기록을 능가한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지만 픽션(fiction)에는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에 지난 2017년 100주년을 맞아 백 년 이상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칼럼을 몇 사람의 필자가 계속해서 써 온 필명인 ‘비치코우머 (Beachcomber)’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로 터키의 한 바이올리니스트 바다트(Badat)가 있다. 그는 나이 백 살 때 런던에서 두 번의 연주회를 갖는다. 천천히 연주를 시작하면서 그는 반쯤 졸고 있다. 따라서 청중석에서 또한 반쯤 졸고 있는 음악 평론가들에게는 그의 연주평을 쓰는 것이 난감한 일이 된다.
그의 마지막 연주회에서는 자신이 작곡한 짧은 두 곡을 연주하는데 첫 곡은 그의 활 움직임이 미약한데다 졸음 섞인 멈춤과 머뭇거림으로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이고, 둘째 곡 연주 중에는 그가 몇 분 동안 잠이 드는 바람에 청중석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두 안내원이 그를 곱게 들어다 분장실에 눕힌다.
예술가 외에도 장수(長壽)하는 사람들은 유순하고 평온한 성격, 타인과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진지한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낙관적인 생활 태도를 평소 가지고 있다는 연구 조사 발표는 부지기수이다.
어디 그뿐인가. 2008년 출간된 이후 50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3천만 권 이상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크릿(The Secret)’ 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끼리끼리’인데 영어로는 ‘Like attracts like’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온 우주로부터 끌어낸다는 뜻이다.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송작가이자 프로듀서인 이 책의 저자 론다 번(Rhonda Byrne, 1945 - )은 50대 갱년기에 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그녀는 약물치료 대신 독서를 통해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온다.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비롯해 동서고금 여러 작가와 위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바로 ‘88세 소년’ 피천득(1910-2007)이 그의 시 ‘이 순간’에서 감탄의 탄성을 지르게 된 것이 아니었으랴.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패닉상태이다. 마치 당장 말세라도 올 것처럼 야단들이다. 몇 년 전 ‘달관세대’란 말이 유행했었는데 일본의 ‘사토리(깨달음) 세대’를 따라 붙인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었을까. 젊은이들을 등치는 ‘스펙 산업’에 사회 경험 쌓기 명분으로 젊은 노동력을 착취하는 ‘열정페이,’ 자소서가 아닌 ‘자소설’ 쓰기를 강요당하고, 토익은 영어가 아닌 기술이라며 본질보다 요령을 사회가 가르쳐 왔다. 실력이나 신화를 창조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현실은 암담한 달관세대를 양산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영어로 If that’s what it takes (to do or to achieve something), so be it. 내가 1961년 2월 군에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 교관은 물론 단 일 분이라도 나보다 먼저 입소한 선임 훈련병들의 ‘지상명령’에 무조건 절대복종해야 했다. 연령이나 학력이나 사회경력 같은 것은 일체 불문하고 ‘좃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야’ 했다. 이 말은 앞에 쓴 영어문장의 뜻을 더 좀 원색적으로 비속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 6.25가 터졌고 1.4 후퇴와 9.28 수복 후 고등학교에 진학해 독일어를 배우면서 접하게 된 두 단어가 내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다름 아닌 ‘자인’과 ‘졸렌’이라 발음하는 ‘sein’과 ‘sollen’이다. 영어로 하자면 ‘to be’와 ‘ought to be’가 되겠다. 전자가 본질적인 실존성이라면 후자는 책임감 내지 사명감의 당위성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성(異性)과 자식 사랑이 실존성이라면 부모에 대한 효심이나 친구에 대한 의리, 또는 애국심은 당위성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물론 두 가지가 때때로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지만 말이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2015년 3월 2일자 뉴욕 데일리 뉴스 등 미국 언론은 매일 35마일의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하는 당시 61세의 노인 스티브 시모프 씨의 사연을 소개했다. 그는 수요일을 제외하고 매주 6일을 아이오와주에 있는 한 카지노에서 오후 11시부터 안전요원으로 밤샘 근무한다. 그러나 출근하기 위해 그가 집을 나서는 시간은 오후 3시 30분, 무려 7시간 전부터 출근을 서두르는 이유는 35마일이나 떨어진 직장까지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시간당 9.7달러를 벌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이렇게 걸어 다녔다. 14년 된 자동차가 있지만 타지 못하는 것은 기름값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번 돈을 그는 뇌졸증으로 쓰러진 부인의 치료비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놀고 있는 입양한 손자(22)의 생활비로 쓴다. 이야말로 인생을 달관한 경지가 아닐까.
조숙했던 탓인지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달관 비슷한 것을 좀 했었나 보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볼 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갖은 풍파 다 겪으면서 이제까지 언제나 신나게 살아올 수 있었으랴.
어쩌면 그 비결은 ‘어떻든 다 좋아’ 하는 식으로 미리 체념이라 해야 할지 달관이라 해야 할 지를 해온 까닭인지 모르겠다. 영어로는 'Anything is better than nothing'이라 할 수 있으리라. 성공이든 실패든 다 남는 장사라는 계산에서다. 어떤 경험이나 결과라도 무경험이나 무결과보다 낫지 않겠는가에서였다.
영어로 'Hope for the best and prepare for the worst' 란 말이 있듯이 무슨 일을 하든 나는 최선을 기대하기보단 처음부터 최악에 대비해 ‘밑져 봤자 본전 이상’이란 생각을 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안 태어난 것보다 그 얼마나 더 큰 축복인가란 생각에서 매사에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고 총체적으로 봐서 최악 중에 최악이라도 죽는 일밖에 더 있겠나. 게다가 설령 내세가 있고 천당과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지옥, 그것도 지옥의 맨 밑바닥에라도 갈 각오만 되어 있다면 두려울 게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였을까. 나는 일찌감치 내가 자살하는 방법까지 생각해 두었을 뿐만 아니라 실행에 옮겨 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위인전 같은 책을 탐독하면서 소영웅심에 불타 젊은 날 돈키호테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한답시고 엉뚱한 일을 시도했다가 좌절하고 엎친 데 덮친다고 첫사랑에 실연당해 동해바다에 투신까지 했었다.
그 방법이란 보트라도 하나 구할 수 있으면 망망대해로 노를 저어 가는 데까지 가보리라. 그렇지 않으면 헤엄쳐서 가는 데까지 가보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죽는 방법인 동시에 사는 방법이었다. 아마 그래서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는 것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