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충과 효 그리고 인격에 반해서 20여년을 이순신 마니아로 살아가고 있다. 이순신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이 한산도에서 압송되어 서울의 옥에 갇혔을 때 충무공을 구명하기 위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던 약포 정탁에 대한 궁금증을 늘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약포 정탁의 고향 예천을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순신을 죽음에서 구해 낸 약포 정탁이 살았던 예천은 소백산맥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안동시를 두고 남쪽으로는 의성군과 상주시가 있다. 서쪽은 문경시와 접해있고 북쪽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리고 금천과 내성천, 낙동강이 모여 흘러가면서 너른 들판을 이루고 있다.
육지 속의 아름다운 섬 회룡포를 보고 약포 정탁을 모시는 정충사(靖忠祠)를 찾아갔다. 정충사(靖忠祠)는 약포가 말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약포가 머물렀던 골목을 걸어 올라가면서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갔던 아이들에게 풀어 놓았다.
“충무공이 한산도에서 압송되었을 때 약포 정탁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순신이 부산포로 가서 싸우지 않은 것은 마땅히 큰 잘못이지만 통제사를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손실이다. 재주와 기술이 있는 사람은 아껴야 하는데 통제사는 재주와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니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글을 썼는데 그 상소문을 신구차라고 한단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찾아간 정충사는 코로나19 상황이라 그런지 사당은 문이 굳게 닫혔고 사당 주변은 개망초들만 객을 반기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사당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예천에는 개망초가 많구나, 회룡포에도 흐드러졌더니만’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만약 약포 정탁이 없었다면 충무공 이순신은 1597년 한양으로 압송되어 어찌 되었을까? 참으로 아찔한 일이다. 정충사 한자를 찾아보니 ‘정(靖) :부드럽고, 고요하고, 편안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회룡포를 감싸는 삼강을 보면서 참 부드럽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면서 봤는데 옛사람들의 생각도 같았던 모양이다.
약포 정탁도 부드러우면서 강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물처럼 부드럽고 고요하고 편안했던 사람이었기에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장군 같은 분들이 모함으로 사형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구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 남해에는 이가락이란 마늘가공공장이 있다. 이 마늘가공공장의 대표가 약포 정탁의 14세손이다. 언젠가 이락사관광안내소에서 충무공 이순신해설을 듣고 이가락 대표께서 자신이 약포 정탁의 후손이라는 말을 했다.
임진왜란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 일본은 조선수군의 매운 맛을 단단히 보고 떠났다. 그런데 그런 남해 매운 마늘을 가공해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이가락 마늘가공식품 대표가 약포 정탁의 14세손이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남해의 매운 맛을 톡톡히 본다. 그리고 참 기가 막히게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 핸드폰에서 카톡 소리가 요란하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인터넷 동호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약포 정탁이란 닉을 쓰는 분이 보낸 카톡이다. 제목이 ‘이순신과 함께 한 인물 연구’란다. 세상살이 참 신기하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