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철학에 대해 나는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생각했다. 어린 나를 놓고 집안 어른께서는 내가 문 씨 혈통의 일원 중 하나로 이 세상이라는 나왔으니 꼼짝없이 운명대로 살아가는 거라고 하셨다.
정말 케케묵은 소리라고 하면서도 늘 풀어내지 못한 혈통이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못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컸던 서대문구 냉천동 46번지 솜틀집 아들, 공 씨라는 친구는 영원불멸의 진리의 책을 남긴 공자의 자손이라는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어떤 때 보면 박식하기로는 공자보다 더 박식하고 자존감도 하늘을 찌르는 그 친구의 은 자존감을 세우는 친구의 거만함을 인정해 주어야 하는 걸까. 인터넷 세상에서나 전파가 가능한 일들을 전기도 전화도 없던 깜깜 절벽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공자는 지금 당장 한 말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말만 했을까.
자신이 회자 되는 것도 운명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도 운명이라는 입바른 소리를 어떻게 알고 했을까. 그때 공자가 심었던 콩밭에 콩이 지금까지 심은 그대로 자라고 있고 덩달아 팥도 자존감을 지키고 있으니 정말 심은 데로 진실은 나는가 보다. 두 눈으로 증명된 심은 데로 난다는 그 말 만큼은 참으로 재미있는 명답이다.
요즘처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군주와 신하가 지켜야 할 이야기가 단 한자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따라야 할 정도이니 놀랍지 아니한가. 저녁 먹고 모여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그 시대의 설전이 이제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건강에 대한 정보에서 명답을 찾으려 한다.
일전에 들었던 건강상식에서 당뇨병 환자 천 명의 당뇨증세가 천 가지로 각기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병에 똑같은 약을 사용할 경우가 있고 그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건강세미나에서 당뇨 환자는 입을 수도꼭지에 대고 산다는 특징도 낭설처럼 물을 거의 마시지 않는 당뇨 환자가 있는지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비만이 절대 아닌 썰매 꼬챙이처럼 마른 은퇴한 두 의사 부부가 서로에게 인슐린을 놓아 주면서 살아가는 시간도 무척이나 길다.
애절함이 묻어나는 구십 세의 노부부가 다정하게 당뇨를 친구로 산다. 혈관질환으로 죽음에 노출되어 산다는 말도 환자들의 숫자만큼 그 증세가 다르게 진행되어 간다. 채식주의라는 여배우가 뇌경색으로부터 목숨을 겨우 건진 이야기처럼 바로 내가 만나 본 지인의 증세는 오직 그 증세가 자신에게만 국한된 일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하며 무턱대고 같은 처방약이 정답이라고 하면 마치 맥도 잡아보지 않고 침을 놓으려는 한의사처럼 얼마든지 뒤바뀐 정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은 우주의 순환 기능을 위해 필수라는 말을 나도 잘 이해하며 즐겨 마신다. 그런데 당뇨 환자에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마치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시듯 나의 아버지께서는 물을 드시기를 몹시 싫어하셨다. 식사를 마치신 뒤 입가심으로 딱 한 모금 마신 것이 전부이셨다.
병아리보다도 물을 적게 드신다는 자식들의 성화를 외면하시고 구십 육 세까지 놀라운 장수를 하셨다. 드시는 물로는 몸의 발전기를 돌리는데 절대적으로 부족하실 것 같았지만 건강검진에서 티 하나 없으셨다. 그러시면서 일 년 중 유난히 매력 없이 어정쩡하게 쓸쓸한 달, 십일월에 일주일을 누워 계시다 폐렴이라는 병명을 유서처럼 침대 위에 남겨 놓으시고 떠나셨다.
정답이 없는 이 세상에 떠나시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만이 정답이다. 의사의 결정을 어기고 기적처럼 쾌차하여 오래 사는 사람을 보면 정답이란 붕어빵식 낭설일 수 있다. 세상 모든 병의 증세며 치료 방법이 정확한 표준치로 통일되어 치유될 수 없는 것이 낭설로 보면 정답이 없다는 소리는 맞는 것 같다. 평균치를 낸 숫자 정도가 겨우 정답의 체면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마치 박씨 성을 갖은 친구가 자신의 조상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박혁거세라는 썰을 알처럼 까대는 정답과 흡사하다. 그 후손들은 언제부터 부화를 멈춘 뒤 더 이상 태어날 수 없게 되었냐는 낭설을 즐기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도 내가 정답을 쥐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문헌대로라면, 당장 코 앞에 들이댈 수 있는 역사의 기록만이 확신이 서는 정답이다. 동성동본인 문씨 성의 문익점은 역사 속 인물이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에 아무도 의문을 달지 않는다. 중국 원나라가 분명 있었고 그곳으로 출장을 갔었다는 기록도 확실하고 그때 붓 뚜껑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것도 모두가 사실이다.
그때부터 고려사람들이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고 살 수 있게 한 의류계의 혁명가이다. 그전에는 비단은 왕족이 아니면 턱도 없는 소리였으니 저잣거리 서민들은 겨울에도 얇은 삼베 같은 옷을 입었어야 했을 거다. 목화가 재배되어 면옷이 일반 백성들의 혼수까지 거뜬하게 해결되고 평균수명이 십 년은 더 늘었다는 의류의 혁신이었다.
춥기만 하던 몸과 마음이 훈훈해지는 이야기를 놓고 누가 세상 속 정답을 부정하랴. 문익점이 원나라로 출장을 다녀오면서 고려인들로부터 시작된 건강한 대물림의 세상은 역사 이래로 이어져 왔다. 이보다 더 과학적인 근거가 어디 또 있을까. 아쉬움이 있다면 그때 면으로 지은 옷을 입은 고려 여인들이 패션쇼를 열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부터 세상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패션쇼의 무대였다. 이런 사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벌거벗고 살았을까 아니면 일본의 스모선수 차림으로 몸의 중요한 부분만 가리며 살아가거나 일반 백성은 추위에 떨며 살아가야 했을지 모른다.
정답이 없다는 문제를 풀어가는 게 인생이다. “목화 고마운 줄 모르는 이것들아 나의 조상 문익점이 없었다면 너희들은 아직도 벌거숭이로 덜덜 떨고 살았어”라는 말로 친구들의 기를 죽이던 재미있는 명답은 목화솜의 역사로 남겨지는 데 손색이 없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