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대한민국의 『1984』, 당신이 윈스턴이라면?

박희정

사진=코스미안뉴스



소설 1984는 폐결핵에 걸린 작가 조지 오웰이 죽음을 앞두고 탈고한 것이라 한다. 어쩌면 작가의 유언 같은 이 소설의 결말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 윈스턴이 전체주의체제에 완전 백기투항 하는 것을 상징하는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다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소련식 체제를 혐오했던 조지 오웰은 죽기 전에 과연 남기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기에 인류의 미래를 이처럼 디스토피아로 그렸을까? 조지 오웰은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해 저주를 퍼부은 것일까?

 

소설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와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행복을 선호한다. 자유와 행복은 하나로 연결되어있으며 자유가 없으면 행복은 없다는 명제는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전체주의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 이유는 그 태도가 살기에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체제를 의심하고, 빅브라더가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윈스턴처럼 경찰에 잡혀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영원히 사라진다.

 

하지만 생각 없이 빅브라더를 맹신하는 사람은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소설의 표현처럼 인간은 누구든지 죽고, 죽는다는 것은 가장 큰 패배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당에 녹아들어 당이 된다면 그때에는 전능한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빅브라더교의 광신도 대열에 의식적으로 합류하지는 않지만 나 자신, 일신의 안전과 영달을 위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봐야 한다.


만약 당신이 침묵한다면 그것은 아마 대개 자조적 체념이리라고 생각된다. 인생의 쓴맛 단맛을 두루 겪은 사람은 대체로 이런 경향을 보인다. 인간의 탐욕적 이기심을 생각할 때 유토피아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피안의 세계라는 절망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마 조지 오웰도 그랬을 것이다. 누가 정권을 잡던 무엇을 내세우던 거기서 거기고 결국 서민의 입장에서는 지배자가 바뀐 것에 불과하며, 세상사라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열망과는 무관하게 굴러가는 것이란 패배자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침묵하는 지성인 대다수도 이런 입장이란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984는 가상의 나라로 오세아니아를 설정하고 있다. 극단적 전체주의 국가인 여기서는 당이 권력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통제한다. 그 정점에는 당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가공의 인물 빅브라더가 있고빅브라더를 정점으로 내부당원, 외부당원, 프롤(서민)이 계층구조를 이룬다. 시민들은 빅브라더가 그려진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통해 생활의 모든 영역을 24시간 감시받는다. 당의 방침에 어긋나는 모든 행동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일기를 쓰는 것도, 섹스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것도,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것도 다 처벌 대상이다. 체제유지 수단은 다양하고 교묘하다. 시민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역사와 기억의 집단적 왜곡이 끊임없이 자행된다.

 

사고 축소를 통한 우민화를 위해 어휘축소와 신어(newspeak)정책을 펼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당의 강령이다. 과거라는 것은 인간이 인식하기 나름이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인간의 인식을 조작 통제함으로써 결국 미래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체계이다. 내부소음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을 동원하며, 상호감시체제로 어린아이는 부모를 감시 고발한다. 또 텔레스크린에서는 시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송을 송출한다. 2분 증오는 빅브라더 사회에서 매일 진행되는 의식이다. 2분 동안 빅브라더에 반대하는 자들에 저주를 퍼붓는다. 증오를 이용해 소속감과 충성심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똑같은 슬로건을 외치고, 빅브라더를 믿고 사랑하는 일뿐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사람이 영양실조에 걸린 채 다 떨어진 신발을 질질 끌며 어슬렁거려도, 텔레스크린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

 

주인공 윈스턴은 역사조작을 주 임무로 하는 진실성이라는 부서에서 일하는 39세의 외부당원이다. 그는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당의 강령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다. 윈스턴은 자신이 증발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빅브라더에 대한 의심을 접지 못한다. 그의 이런 회의는 다음 행동으로 이어진다. 전체주의 체제에 회의하던 윈스턴이 자기와 같은 사고를 가진 여자 줄리아를 만나 사랑하고, 지하 투쟁단체인 형제단에 가입해 당을 무너뜨리려 하지만 함정에 빠져 사상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101호실로 끌려간 그는 지독한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굴복한다. 완전히 세뇌당해 당이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빅브라더가 아무리 절대자라고 해도 인간의 정신까지는 지배할 수 없다고 믿던 사내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진다. 소설을 읽으면서 극적 반전을 기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독자는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이 소설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보라. 굳이 이 지상 최악의 전체주의체제인 북한은 들먹일 필요 없다. 북한은 제쳐두고 한반도의 남쪽만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리고는 오늘날 상황을 표현하는 불편한 단어들을 떠올려보자.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키는 증오, 갈등, 대립, 적대감, 보수, 진보, 좌파, 우파, 대깨문, 달빛기사단, 일베충, 토착왜구, 적폐청산, 신적폐, 역사왜곡, 수꼴, 좌빨, 촛불, 개국본, 태극기집회, 절대악, 소멸대상, 저주, 광풍, 테러, 위선, 기레기, 지식 장사꾼, 내로남불, 탐욕, 위선, 사생활의 비밀을 위협하는 수많은 CCTV, 스마트폰, 위치추적, SNS, 신상정보 털기, 구성원을 좌절시키는 빈부격차의 심화, 경제난, 생활고, 실업자, 3포세대, 금수저, 흙수저 등등.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중 많은 것들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일부 인간이 탐욕 충족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란 점이다. 그들의 그 더러운 욕망의 충족 여부는 얼마나 패거리를 잘 짓느냐에 달려있다. 19841984년 오세아니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소설의 자조적 주장이나 비극적 추론에 동의하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작가가 인간 사회의 미래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런 역설법을 구사했을지언정 저주를 퍼부은 것이라는 비극적 상상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여 파블로프의 개가 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에, 역설적으로 자멸이란 결론을 던진 것이리라고 믿고 싶어진다. 빅브라더가 만들어 내는 1984는 바로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래의 우리 체제는 내 아들딸, 손자, 손녀가 살아갈 세상이다. 나 하나 탐욕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선행을 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다가올 세상이 유토피아에 가까울지 디스토피아에 가까울지는 순전히 인간하기 나름이다. 어떤 권력도 시민의 뭉친 힘을 이길 수 없다. 깨어있는 우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제는 생각이 정리된다. 작가는 우리가 빅브라더 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면 서로 힘을 합쳐 분연히 떨쳐 일어서야 함을 역설적으로 절규한 것이다. [글=박희정]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7.29 10:54 수정 2021.07.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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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