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스테달산을 관통하는 피얼랜드 터널을 지나 헬레쉴트로 달려간다. 헬레쉴트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V자형 피오르인 게이랑에르 피오르 유람선을 탑승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폭포인 헬레쉴트 포센은 가슴이 후련하도록 넓은 바위에 물이 넘쳐 흐른다. 흐르는 물이 얼마나 맑은지 물속에 손이라도 담그면 속세에서 묻혀온 먼지가 떨구어질까 두려워 손 담그기가 주춤거려진다.
엄청난 크기의 유람선이 협곡까지 들어와 운행되고 있는데, 다양한 인종들로 갑판 위는 이미 초만원이다. 한글로 된 브로셔가 선실에 비치되어 있고, 우리말 안내 방송까지 나오니 갑판 위 좌석을 모두 선점한 유럽 관광객들을 쳐다보며 괜히 우쭐한 표정을 지어본다. 헬레쉴트에서 게이랑에르까지 가는 1시간은 그야말로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다. 선상에 오르면 마치 아이맥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압도적인 경관이 다가온다. 이런 마법 같은 풍경 때문에 게이랑에르 피오르는 200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노르웨이를 찾는 여행자 대부분이 버킷 리스트 1순위로 손꼽는 곳이다.
협곡 양쪽에는 빙하가 녹아내려서 만든 수많은 폭포들을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피오르 중간 즈음에서 만나는 7자매 폭포가 최고 명소다. 멀리서 폭포를 바라봤을 때 여인 7명의 머리카락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독특한 이름인데, 300m 높이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대단히 근사하다.
유람선 매점에서 우리네 컵라면을 닮은 ‘미스터리’ 라면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사서 먹는다. ‘미스터리’ 라면은 노르웨이에 귀화한 이철호씨가 창업한 라면 브랜드인데, 언젠가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라는 책을 통해 그를 만난 적이 있다. 6.25 전쟁 직후에 노르웨이로 이민을 온 그는 구두닦이와 조리사 등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불굴의 의지로 라면 사업에 도전하여 결국 대박을 터뜨린다. 노르웨이 이민자 가운데 최초로 국민장과 기사 작위까지 받았으며,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그의 성공담이 실릴 정도로 노르웨이 사회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1만 년 전 빙하가 빚어낸 절경인 피오르 해안, 빙하를 품고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산군, 코발트색 하늘이 바닷물에 오버랩된 지고지순한 물색은 지금껏 마주한 노르웨이의 대자연 중 어떤 풍경도 게이랑에르 피오르보다 경이롭지 못하다.
유람선 선상에서 보이는 해안가에는 싱그러운 초록으로 물든 그림 같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유람선 종착지인 게이랑에르 마을이다. 험한 산에 둘러싸여 있어 마을 뒤쪽으로 산허리에 가는 실 같은 도로가 나 있는데, 이 길이 달스나마 전망대로 올라가는 ‘요정의 길’이다.
게이랑에르 선착장 뒤로 빙하가 흘러내리는 저 산 너머엔 어떤 풍경이 있을까. 마을 뒤로 난 꼬불꼬불한 좁은 도로를 따라 산허리를 감아 도는 U자형 길로 끝없이 오른다. 일명 ‘요정의 길’이다. 한 구비 돌면 나오는 자작나무 숲, 폭포, 흰 눈을 머리에 인 설산, 잘 다듬어진 초원의 야영장 등 숲의 나라 노르웨이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연이다. 이 길은 노르웨이 피오르 풍경의 백미다. 협만은 산맥단층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사진 계곡과 평탄한 초원, 가파른 절벽이 수시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 장관을 만들어낸다.
가파른 비탈을 넘는 자동차 엔진 소리마저 숨이 찬다. 매년 이곳에서는 게이랑에르 프럼 피오르 투 서밋(Geiranger From Fjord to Summit)이라는 스포츠 이벤트가 열린다. 게이랑에르 마을에서 시작해 달스니바 전망대 정상에 이르는 21km 구간에서 하프 마라톤 대회, 자전거 대회, 경보 대회 등이 열린다고 한다. 이윽고 고개에 이르러 산정에 도달했나 싶은데 갑자기 넓디넓은 빙하 호수 듀프호가 튀어나온다. 호수에 비친 주위 산군의 무채색 반영이 너무나 아름답다.
호수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요금소가 나온다. 요금을 지불하고 좁고 가파른 경사 길을 몇 차례 아찔한 스릴을 경험하면서 오르면 1,500m 고지에 있는 달스니바 전망대에 이른다. 바람이 사락사락 구름을 쓸며 시야를 연다. 구름이 걷히자 대자연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개만 돌리면 우주의 또 다른 행성에 온 듯 생경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전망대에 서면 게이랑에르에서 전망대로 오르는 가는 실 같은 ‘요정의 길’ 끝에 유람선을 타고 온 게이랑에르 피오르와 유람선 선착장, 그리고 지나온 마을들이 아련하게 보인다. 주위의 빙하 호수, 폭포, 협곡, 절벽 등이 ‘요정의 길’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절경을 이룬다.
정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크고 허연 바위들. 그리고 그 바위에 붙어사는 연녹색 이끼무리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흑백으로만 덧칠되어 있던 황량한 풍경화에 이끼가 내는 초록의 색깔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앞서 다녀온 하당에르비다 국립공원을 온통 녹색으로 물들인 바로 그 이끼들이다.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고산 바위에 칼바람 견디고 핀 안타까운 이끼무리들 때문에 가슴이 저며 온다. 마치 외계에 온 듯 생전 처음 대해보는 낯선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어떤 글이나 말로 이런 느낌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전망 좋은 천 길 낭떠러지에 앉아 주위 광경을 둘러본다. 목가적인 게이랑에르 마을, 푸른 눈의 거대한 빙하, 파란 물감을 뿌린 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코발트빛 맑은 바다. 석양이 피오르를 둘러싼 설산들을 비추니 그 겹겹의 능선들은 살아 움직인다. 그림 같은 풍경들이 모두 달스나마 전망대의 조망을 위해 마련된 듯싶다.
마음 안에 그대를 숨겨둔 그리움이 어언 수십 년
그 그리움과 회포를 푸느라 한참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제 삶의 짐을 내려놓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백척간두에 앉아
붉은 태양이 피오르 깊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더 이상의 풍경은 세상에 없으리라.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