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거 좋아하면서 하자”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 3관왕이 된 안산(20) 선수가 경기 후 한 말이다. 그는 “좋아하는 거 좋아하면서 살자”가 그의 신조라고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양궁 2관왕이자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된 김제덕(17) 선수도 이겨도 져도 “파이팅을 외치면서 경기의 흐름을 즐기자”는 자세로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출전에 앞서 마음 다스리는 법을 써놓고 자주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우승의) 욕심을 갖자, 욕심에 앞서 자신을 믿자, 자신을 믿기보다 즐기면서 쏘자”라고.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 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공자의 말도 있지 않은가.
2011년 9.11 직후 뉴욕타임스에 희한(稀罕)한 전면광고가 실렸었다. 지면 한가운데 고인의 사진 한 장과 출생과 사망 일자와 함께 그 밑에 아직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놀이를 즐기라(Enjoy the Game)’는 ‘유언’이었다.
우리가 구름잡이라 할 때는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가 ‘구름(clouds)’이라 할 때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기보다 ‘데이터 구름(data clouds)’이나 ‘네트워크 구름(network clouds)을 말할 정도로 자연계와 기술계가 구분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2015년 출간된 ‘경이로운 구름(The Marvelous Clouds: Toward a Philosophy of Elemental Media)’에서 미국 아이오와 대학 커뮤니케이션 교수 존 다럼 피터스(John Durham Peters, 1958 - )는 클라우드가 우리의 새로운 환경으로 가까운 미래에 잡다한 모든 것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의 몸이 단말기가 되어 구름과 우리 몸 사이에 문서와 영상이 흐르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흔히 매체(media)가 환경 (environments)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역(逆)도 또한 진(眞)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2015년에 나온 ‘모든 것의 진화: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성되는가(The Evolution of Everything: How New Ideas Emerge)’와 ‘붉은 여왕(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 1994) 그리고 ‘유전체(遺傳體) 게놈(Genome, 1999)’과 ‘합리적인 낙관주의자: 어떻게 번영이 이루어지는가(The Rational Optimist: How Prosperity Evolves, 2010)’ 등 베스트셀러 과학 명저의 저자이면서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매튜 리들리(Matthew White Ridley, 1958 -)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과학이란 사실을 수집해 나열해 놓은 카탈로그가 아니고, 새롭고 더 큰 미스터리를 찾는 일 Science is not a catalog of facts, but the search for new and bigger mysteries.”이라고 말한다.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비숍 버클리라고도 불리는 George Berkeley/Bishop Berkeley 1685-1753)는 “세상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다(The world is all in our minds.”라고 했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뜻이리라.
우리 선인들은 인생이 하늘의 한 조각 뜬구름 같다고 했다. 구름이 있으면 천둥·번개도 있게 마련이다. 달라이 라마의 육성이 담긴 음악이 최근 빌보드 뉴에이지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앨범은 그 제목이 ‘내면세계(Inner World)’라는 만트라(Mantra) 진언(眞言)을 암송하는 명상음악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시선을 안으로 돌려 마음을 돌아보고 우주로 비전을 넓히라는 뜻이리라.
“네 세상은 너, 난 내 세상 Your world is you. I am my world.”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979-1955)의 ‘소나무 숲속 작은 닭들(Bantams in Pine-Woods)’에 나오는 한 시구(詩句)이다. 스티븐스는 낮에는 직장인 보험회사 일을 보면서 밤에는 어떻게 자신과 세상이 서로에게 의지하는지, 어떻게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세상을 자신이 창조하게 되는지, 평생토록 시작(詩作)을 통해 천착(穿鑿)했다고 한다.
2016년 출간된 미국 시인 폴 마리아니(Paul Mariani, 1940 - )의 평전 ‘The Whole Harmonium: The Life of Wallace Stevens”에 따르면 스티븐스에겐 뭣보다 신(神)의 죽음이 추상적인 개념이나 진부한 문구가 아닌 영구적인 도전으로 이를 그는 예술과 윤리적인 문제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뤘다.
우리가 스폰서로서의 신(神)의 후원 없이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자신의 삶의 의의를 우리가 찾아 만들어 낼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다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스티븐스 시(詩)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해법이란 한 때 종교가 맡았었던 역할을 이젠 시(詩) 혹은 더 넓게 우리의 상상력이 수행해야 한다는 거다. 이를 스티븐스는 ‘예술지고의 픽션 (supreme fiction of art)’이라 명명한다.
이 최상 지고의 픽션(supreme fiction)은 신화가 청소 제거되었으나 시어(詩語)로 승화된 현실로 우리를 돌려준다고 그의 ‘최고 픽션을 위한 노트(Notes Toward a Supreme Fiction)’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와 우리 이미지를 추방한 하늘의
더할 수 없이 아득히 먼 청결함으로
깨끗이 씻긴 해맑은 해라는 생각으로
바라볼 때 태양은 얼마나 깨끗한가.
How clean the sun when seen in its idea,
Washed in the remotest cleanliness of a heaven
That has expelled us and our images.
‘눈사람(The Snow Man)’에서 그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거기에 있지 않은 아무것도
그리고 있는 아무것도
Nothing himself beholds
Nothing that is not there and
Nothing that is.
마치 유체이탈(幽體離脫)이라도 하듯 초연한 경지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조한 스티븐스는 시인이라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하나의 우주를 창조한 마술사 아니 어쩌면 신(神)이었으리라.
이것이 어디 스티븐스뿐이랴. 우리 모두 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각자는 각자 대로 각자의 현실, 곧 자신만의 세상과 우주를 시시각각으로 창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우린 모두 코스모스바다에서 출렁이는 성신(星神/身) 코스미안임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어라.
1938년에 출간된 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하우징아(Johan Huizinga 1872-1945)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란 책이 있다. 이 ‘호모 루덴스’는 ‘유희의 인간’을 뜻한다. 인간의 본질은 유희를 추구하는데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창조 활동 곧 문화 현상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어차피 인생이 소꿉놀이 소꿉장난 같다면 이렇게 놀면 어떻고 저렇게 놀면 어떠리.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놀이와 장난을 할 필요도 없고 같은 길을 갈 이유도 없으리라. 그리고 매사에 너무 심각할 것도 없지 않을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그래도 각자는 각자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제 가슴 뛰는 대로 살아보는 것 이상 없지 않을까?
자, 이제 우리 모두 코스미안으로서 인생 아니 우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기 위해 지난 2020년 12월 28일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청춘별곡 3곡’ 우리 다 함께 합창해볼거나.
청춘별곡 3곡(曲)
“넌 동물이야”란 말이 왜 모욕적일까 하고 나는 의아(疑訝)해한다. 왜냐하면 만일 동물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너는 인간이야”라고 하는 게 그들이 가장 즐기는 모욕적인 말일 테니까. I sometimes wonder why “You’re an animal” is an insult; it seems to me that, if animals could talk, “You’re a human” would be one of their favorite insults.”
미국의 마술사(magician) 리처드 E. 터너 (Richard Edward Turner, 1954 - )의 말이다.
“어떻게 동물들이 사물들을 이해하는지 난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에겐) 말 아닌 언어가 있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언어를 알아듣는지 모를 일이다. 어쩜 모든 사물엔 영혼이 있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른 영혼에게 언제나 말할 수 있는가 보다. How it is that animals understand things, I do not know, but it is certain that they do understand. Perhaps there is a language which is not made of words and everything in the world understands it. Perhaps there is a soul hidden in everything and it can always speak, without even making a sound to another soul.”
이것은 영국 태생의 영국계 미국인 작가 프란시스 호지슨 버넷 (Frances Hodgson Burnett 1849-1924)의 아동 소설 작품 ‘어린 공주(A Little Princess, 1905)’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인간도 이렇게 서로 소통에 별문제 없고 자급자족(自給 自足)하는 동물의 일종인데 어쩌다가 별종(別種)의 코로나 변종(變種) 바이러스 같은 존재로 진화(進化) 아닌 퇴화(退化) 타락(墮落)하게 되었을까. 모름지기 ‘잘못된 가정/학교/사회 교육’ 때문이리라.
제1곡(曲): 경애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3신(信)
안녕하십니까.
오늘 (2020년 12월 7일자 ) 코스미안뉴스에 인용 보도된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고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7일 자신의 트위터에 "학교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다’라는 진리이다."라고 밝혔다.
뜻밖에 하루키 작가님 같은 동지(同志 kindred spirit)를 글로나마 만나 뵙게 되어 너무도 기쁜 마음과 감격에 벅차 지난 12월5일 코스미안 뉴스에 올린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2 신(信)에 이어 이렇게 제3신(信)을 또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진짜 ‘학교’는 인생 아니 우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애담스(Henry Adams 1838-1918)도 “카오스는 자연의 법칙이고 질서 -제가 의역(意譯/義譯)해 단어를 좀 바꿔 쓰자면-코스모스(Cosmos)는 인간의 꿈이다. (Chaos was the law of nature; Order was the dream of man.)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보스턴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에서 교육받고 역사를 가르친 그는 ‘헨리 애담스가 받은 교육(The Education of Henry Adams, 1907)’이란 그의 자서전 머리말에서 그가 받은 학교 교육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교육은 쓸데없을 뿐만 아니라 해(害)로운 것이었다고 했지요.
“우린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선행(善行)을 하면 저세상 영(靈)의 세계로가 다른 선인(先人/善人/仙人)들 을 만날 것이다. 그곳에 있는 저울에 네가 한 모든 일들을 달아 보고 네 악행(惡行)이 선행(善行)보다 무거우면 넌 그만이다. 바람에 흩어지는 숨 일 따름이다. 사는 동안 동정심(同情心)을 가져야 한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거든 자선(慈善)을 베풀라. 네가 주는 동냥으로 걸인(乞人)이 술을 사 마신다고 해도 네가 걱정할 일 아니다. 술 마시는 것이 네가 아니고 너는 이미 너의 선행을 한 셈이니까. 이 바쁜 세상에서 너는 긴장을 풀어야 한다. 잠시 앉아서 생각하는 동안 너는 사물(事物)을 똑바로 제대로 볼 수 있다. 삶이 무엇인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네가 정말 꼭 필요로 하는 것을 기도로 말하고 네 머리가 나쁜 생각 하지 못하도록 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리고 조물주(造物主) ‘와칸 탄카(Wakan Tanka)’와 접촉을 해야 한다. 그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고 그는 다 보고 계신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너는 너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삶이 뭐냐?’는 물음에 네가 답하는 것이다. 남이 너를 인도하고 지도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 너 스스로 해야할 일이다. 네 행동, 네 생각(生覺)과 사고(思考)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바로 네 자신 속에 있다.”
이것은 미국 남 다코타주(州) 우뚝 선 바위란 뜻의 인디언 보호 지역 스탠딩 록(Standing Rock Reservation)에 살던 한 다코타 인디언 마법사의 말이지요. 또 다음은 미국의 세균학자로 소아마비 예방접종 백신을 개발했고 후천면역결핍증후군 에이즈(AIDS) 예방접종약을 만들어 내기 위한 연구에 전념했던 조너스 솔크(Jonas Salk 1914-1995)의 말입니다.
삶의 의미란
인간관계를 통해 느껴지는 것…
다른 사람들
나의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 아닌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순간의
나로부터 어떻게
한 아이로서 한 어른으로
한 부모로 한 조부모로
그리고 결국 끝장에 이르러
한 조상으로
얼마만큼 성장하고
발전하며 변하는가
그런 관계에서
삶의 의미는
모든 관계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는 것
자식 낳아 키우고
가르치고 봉사하고
창조하고 그러는 데서
뿐만 아니라
배우는 데서
자연으로부터
현자(賢者)로부터
벗과 동배(同輩)들로부터
그리고 그 누구 무엇보다
그 언제까지나
끝없는
자아완성(自我完成)
자아실현(自我實現)
과정(過程)을 통해
날로 새롭게
나타나는 자신으로부터
지난 2019년 11월 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愚生)의 졸문(拙文) 하나 하루키 작가님과 나누고 싶어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리오니 망중투한(忙中偸閑)으로 일독해주십시오.
인생보고서
지난 2008년 미국 카네기 멜런 대학의 컴퓨터과학 교수 랜디 파우쉬(Randy Pausch 1960-2008)는 췌장암으로 47세에 타계하기 10개월 전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에서 뭣 보다 동심(童心)의 경이로움을 강조했다.
의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다 해도 이 세상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생물학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태어났지만 그래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입장에선 누구나 다 후손과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는 2011년 11월 29일자 칼럼에서 그의 요청에 응답한 수많은 70세 이상의 독자들이 보내온 ‘인생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공통된 교훈을 도출했다.
1, 연속과 단절
불행한 사람들은 시간을 연속된 흐름으로 보고 표류해왔나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몇 장으로 분류해 챕터 (Chapter)별로 각자의 삶을 재설정 정립, 스스로의 운명을 바꾸거나 개척해왔다.
2. 반추와 성찰
불행한 사람들은 언짢은 일들을 계속 반추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가 하면 그 반대로 행복한 사람들은 궂은일들은 속히 잊어버리고 용서하며 좋은 방향으로 되돌려 왔다.
3. 도로(徒勞)와 포기
불행한 사람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전혀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는가 하면, 행복한 사람들은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가능성에 도전한다. 특히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다.
4. 안일과 모험
미인은 용자(勇者)의 차지라는 말처럼 안일을 도모한 사람은 모험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만족해한다.
5. 반골(反骨/叛骨)과 수용(受容)
가정이든 회사든 사회든 제도권 밖에서 ‘이방인’으로 떠돈 사람 들은 불행하고 제도권 안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행복하다.
얼마 전 (2013년 1월 20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ZL Technologies 회사 공동창립자 겸 대표인 콘 리옹(Kon Leong) 씨는 젊은이들에게 아주 적절한 조언을 했다.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Try to find your sweet spot...The sweet spot is the intersection between what you’re really good at and what you love to do.
또 얼마 전 (2013년 2월 10일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Live Person 회사의 창립자 겸 대표 로보트 로카시오(Robert Lo Cascio) 씨는 자기 회사 사훈(社訓)에 입각해 신입 사원을 채용한다며 두 가지 사훈이 있는데 그 하나는 ‘공동소유인이 되는 책임감(Being Owners)’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봉사 정신(Helping Others)’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신입 사원은 이 회사 사훈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직하더란다.
일정시대 내가 국민(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인 여자 담임 선생님이 첫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학생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인으로서도 말이다. 그 말씀이란 세 가지 학생이 있는데 숙제나 공부를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낙제생, 시키는 대로 하는 모범생, 그리고 시키기 전에 본인 자신이 알아서 잘하는 우등생이라고 하셨다.
영어에 최선을 희망하되 최악에 대비하라(Hope for the best, prepare for the worst)는 말이 있다. 최선을 희망하는 낙관론자이다 보면 실망할 일이 다반사고, 최악에 대비하는 비관론자이다 보면 자칫 패배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낙관론자나 비관론자가 되기보다는 ‘만족론자(contentist)’가 되기로 작심했다. 결과가 어떻든 내 최선을 다해보는 그 자체에 만족하기로.
삶 그 자체가 목적이고 어떤 삶이든 열심히 살아보는 인생예술가(Artist of Life) 외에 다른 예술가가 있을 수 없으며 성공이란 결코 행선지 종착점이라기보다 여정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여정 그 자체가 전부로 곧 보답이고 보람이며 보상(Journey is the reward)이 아니랴. 따라서 언제나 어떤 경우에도 승자는 노력하고 패자는 불평(Winners Practice and Losers Complain) 하지 않던가. 대학 가야만 사람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인생대학’의 학생으로 평생토록 자신의 인격을 닦고 자아완성의 길을 가는 구도자(求道 者)가 될 생각을, 그리고 취직보다는 창직(創職)할 생각을 해볼 수 없을까.
언젠가 한국에서 ‘공부가 인생의 전부냐’는 항변의 유서를 남기고 남녀 중3생이 동반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뉴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 두 어린 목숨을 끊게 한 병들대로 병들고 삐뚤어진 우리 한국사회에 분통이 터졌다. 경기도 용인 N중학교 3학년생 15세의 유 모 군과 같은 반 14세의 한 모양이 남긴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쓸모 없는 2차 방정식의 값을 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의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주세요. 행복이 성적순으로 되는 세상, 공부만 하면 인간입니까?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고 싶습니다.”
이 두 어린 소년 소녀의 유서에서 우리는 그 어떤 철인 현인의 도통한 경지 이상의 해탈을 볼 수 있다. 이 순수하고 용기 있는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속물근성에 물들고 동화되기를 죽음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절규하면서 공부벌레로 살기보다는 인간으로 죽기를 선택했다. 그것도 서로 좋아하는 남녀로서 동반자살, 정사(情死)하면서 시체를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게 죽는 길을 택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도 애처롭고 안타까운 것은 이 어린이들을 보고 죽을 용기로 더 좀 용감하게 독창적으로 파격적으로 비세속적으로 살아보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없었음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의 사랑을 잃었을지언정 서로 사랑하는 짝끼리 죽음의 동반자가 되기 전에 삶의 동반자가 되어보라고 이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이 이들 주위에 하나도 없었음이다. 누가 타이르지 않아도 이들 본인 스스로가 그런 마음 먹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어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없다고 두 학생은 유서에서 말한다. 예부터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더러 부모 행복하게 해달라고 강요하기보다 자식의 마음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게 부모 된 도리일 텐데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진정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이 학교 공부보다 인생공부와 인간수업을 잘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보람되게 잘 살아주는 것이라고, 무엇을 하든 저 좋은 대로 저하고 싶은 대로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격려해주는 것이 참된 어버이 마음이란 것을 이 두 어린 마음속에 왜 진작 좀 더 일찍이 심어줄 수 없었을까.
세상사는 길이 이 세상사람 수만큼이나 다 다른 여럿인데 어떻게 이처럼 한 길밖에 없는 것 같이 이들을 세뇌시켰더란 말인가. 아무리 사(ㅅ)자 좋아하는 세태요 사회라지만 그 사(ㅅ)자라는 것이 다 시대착오적인 남존여비 관존민비사상의 잔재가 아니던가. 저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1925) 수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1856-1950)가 갈파했듯이 오늘날 ‘모든 전문적인 직업인들이란 일반 대중을 등쳐먹는 공모자들이다. All professions are conspiracies against the laity.’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사(ㅅ)자’님들을 떠받드는 세상 사람들이 또 한 공모자들 아닌가.
‘저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가 아닙니다. 이제 하늘 높이 날 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스럽고 건전한 소망과 꿈이었나. 그렇다면 이들을 입시지옥 성적순으로 도배된 공부방에 가둬 두지 말고 밖에 나가 씩씩하게 신나도록 뛰어놀면서 이들의 날개가 어서 크고 튼튼해져 세상을 높이 나는 법을 배우도록 해줬어야 한다.
타락한 어른들이 순수한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른들이 가르친다는 교육이 고작 각종 편견과 화석화된 고정관념뿐이니 우리 사회가 바로 되자면 어린이들이 어른을 깨우쳐 가르치는 역교육 현상이 일어나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 현존하는 몰인격 몰인성 몰개성 교육이 판치는 한 이솝 우화에 나오는 애꾸눈 원숭이들이 두 눈 가진 원숭이의 멀쩡한 눈 하나를 빼서 생 애꾸눈 원숭이로 만드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비행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나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의 동화 ‘황제의 새 옷(The Emperor’s New Clothes,’에 나오는 아이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제2곡(曲): ‘허깨비 굿타령'을 졸업하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트로트 가수 김수희가 불러 히트한 노래 '애모'의 이 가사를 노벨상을 비롯한 모든 상에 적용해보자. 지난 2018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트럼프 대통령이 거론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비보(?)에 수많은 작가와 출판사들이 비명을 질렀다는데 도대체 ‘상’이란 게 뭐기에 이렇게 야단법석일까.
어떤 ‘선물’이나 ‘상’은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즐겁고 흐뭇하며 행복하지 않던가. 그래서 선물이나 상은 언제나 남에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애인이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손자 손녀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사람이면 다 느끼는 일이다. 궂은 일은 차라리 내가 겪고 좋은 일만 네가 누리기를 빌면서 아무리 주고 또 줘도 부족해 더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우리가 어느 누구의 추천으로 상을 받아 남의 인정과 평가를 받아야만 자신의 존재 이유와 존재가치가 비로소 생기는 게 결코 아니다. '예술 작품'이란 것도 굳이 말하자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자연과 삶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물'보다 그 '그림자'를 더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있는지도 없는지도, 설혹 있다 해도, 어떤 분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중성인지 무성인지 모를 '신(神)'이란 존재에 대해 누구도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수가 없는데 그 누가 감히 주제넘게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으랴. 자신을 포함해 우주만물을 제대로 순간순간 사랑하고 섬기지도 못하면서 '허깨비' 같은 독선 독단적인 존재를 모시고 경배한다는 게 말이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온갖 '허깨비 굿타령'을 졸업하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홍익만물(弘益萬物)의 '인생학업(人生學業)'에 매진하는 일이 이 우주에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Why Am I Being Diminished When I Stand Before You?”
This is part of Korean singer Kim Soo-hee’s hit song lyrics.
Let’s apply this question to all kinds of prizes including the Nobel Prizes. Many publishers, writers and readers were reported to have been greatly disappointed by the earlier news that there would be no Nobel Prize for Literature to be awarded in 2018.
I was prompted by this little brouhaha to think about prizes in earnest.
Whatever the presents or the prizes might be, wasn’t it much more gratifying to give them than to receive them?
Come to think of it, giving them out to somebody is really giving them to oneself. Isn’t it?
Whoever your sweetheart is, be it your parents, siblings, friends, lovers, spouses, children and grandchildren, if you’ve ever really loved someone with all your heart and soul, you’d rather bear all the burden yourself to alleviate it from your loved ones whom you could never love enough.
Be that as it may, your self-worth and raison d’etre is not bestowed upon yourself only when you are recommended for recognition to be presented with a prize. Does it?
As it were, no matter how great they may be, for example, all works of art are nothing more than imitations of nature and life. How could we then value the shadow more than the real thing?
Furthermore, nobody knows for sure whether there is such a being called God or not. Even if such a divine super-being does exist indeed, nobody is sure whether it’s male, female, neuter, asexual, or what. How then could anyone say this or that about such an unknown and unknowable being?
How then could one worship such an unreal phantom-like beingㅡindoctrinated as all-knowing, almighty, all-present, all self-righteous ㅡ while failing to love and serve all things including oneself of the Cosmos from-to-in-the moment?
It behooves us, then, to mind our immediate business of learning diligently as life-long students of the School of Love. Thus enlightened altogether, we all may graduate to become Cosmians Arainbow of Love.
제3곡(曲):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코넬대 경제학과 교수 Robert H. Frank가 쓴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는 2016년 나온 책이다. 이 책이 2018년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란 제목으로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됐다.
노력했다고 다 성공하는 게 아니고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걸 여러 사례와 경제학적 모델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노력’이냐 ‘운발’이냐의 문제인데 나는 제3의 ‘대응방식’을 내가 적용해온 대로 제시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84년 동안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은 꿈도 못 꾼 일이다. 돌이켜 보면 60여 년 전 내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나 자신이, 아니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아니 우주 만물이 ‘코스미안’임을 깨닫게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이 한 송이 아주 작은 소우주 코스모스 꽃을 사랑하다가 대 우주 코스모스를 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노라면 우연히 전화위복이나 전복위화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복(福)’이나 ‘화(禍)’가 닥쳤을 때 이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대응하고 대처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않던가. 성공의 정상에서 자만하다가 추락하는가 하면 실패와 절망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비상할 수 있다. 그 예로 내가 직접 최근 겪은 한두 사례를 들어 보리라.
2017년 9월 자연과인문 출판사에서 ‘39프로젝트’와 ‘태미사변(泰未思辨)’이란 책 두 권이 동시에 나올 수 있도록 모든 기획을 총괄한 아주 유능한 서울대 재학 중이던 여학생에게 2018년 3월 옛 ‘사상계(思想界)’ 같은 지성 계간지 ‘코스미안’ 창간 프로젝트를 맡겼었다. 그런데 어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인지 몰라도 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무산(霧散)되는 바람에 훨씬 더 의미 있는 새로운 글로벌 인터넷 신문 ‘코스미안뉴스’ http://www.cosmiannews.com 를 2018년 7월에 창간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삶을 소재로 '자연과인문' 출판사와 코스미안 뉴스 대표 전승선 시인이 2018년 6월 출간한 소설 ‘코스미안’의 영문번역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영국의 데보라 스미스 양에게 적극 의뢰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게 되는 바람에, 내가 직접 영문으로 내용 일부를 수정 번역하면서 새로운 영문원고가 완성되었다. 이를 처음으로 ’Cosmiannews’에 연재하다가 영문판 ‘Cosmian’이 2019년 가을 그리고 그 후속편 ‘Cosmian Rhapsody’가 2020년 올가을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간되었다. 그리고 2019년 10월 27일 ‘코스미안뉴스’ 제1회 코스미안 상 시상식이 서울 세종 문화회관에서 열렸고 올해 2020년 가을에 있을 예정이던 제2회 코스미안상 시상식은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으로 거행되었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새옹득실(塞翁得失)이라고 영어로 표현해서 'If not this, someone or something better'를 찾다 보면 찾아지는 것 같다. 2018년 85세로 타계한 인도계 영국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V S 나이폴이 생전에 한 말이 떠오른다.
“난 내가 열고 싶은 문이 어떤 문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을 두드렸다. I knew the door I wanted, I knocked.”
이 말을 이렇게도 바꿔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엔 수많은 문이 있을 테니 이 문이 안 열리면 저 문, 아니면 또 다른 문을 노크해 보리라. 어떤 문이 열릴 때까지. There must be so many doors. If one door doesn’t open, I will knock another. If another door still doesn’t, I will knock yet another until one opens.’
스티브 잡스의 좌우명인 '여정 자체가 보람이자 보상이다(The journey is the reward.)라는 말처럼 우리도 여정 자체를 보람 으로 삼으면 긍정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다.
이를 내가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에 어떤 일이 언제 어디에서든 일어나려면 온 우주가 공모 해야 된다.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가 되리라.
어떻든 1993년 노벨 문학상 수상 미국 작가 토니 모리슨(1931-2019)의 이 말에 나도 동의한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선 세상의 아름다움으로 족하리라."
To the Successful by the Virtue of Competence and Endeavor
‘Success and Luck: Good Fortune and The Myth of Meritocracy’ by Robert H. Frank that came out in 2016 was translated into Korean and published in 2018 entitled (in Korean) ‘To the Successful by the Virtue of Competence and Endeavor.’
In this book, the author, a professor of economics at Cornell University, argues that the successful tend to underestimate the role that chance plays. The issue is whether it’s hard work or luck that decides the outcome. This may sound like there’s no other option, but I’d present the third option one can take. Whatever and how many options there are, what you decide to take is up to your choice. Isn’t it?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 four years, I’ve never even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macro-cosmos.
Although everyone encounters from time to time both blessings and curses in disguise, doesn’t it make all the difference depending, no matter whether it’s a ‘fortune’ or a ‘misfortune’, on what one makes it to be, after all.
We see all the time the fall of the most powerful and successful from the pinnacle of power and success, while some ‘hopeless’ and ‘helpless’ losers rise from the ashes of despair and failures, like a phoenix.
I’d like to share a bit of my most recent experience.
Following the publication of two books in September 2017, ‘39 Project’ and ‘Tae-Mi Sa-Byun (Dialectic Dialogue - Thought Romance Between An 80-Year-Old Man and A 24-Year-Old Girl)’, l commissioned this very promising young entrepreneur who had pulled off these two great surprise feats of publishing success to launch a new quarterly ‘Cosmian’ in the same spirit and vein of the now defunct very popular intellectual magazine ‘Ssassanggye (The World of Thoughts) in March 2018.
For totally unaccounted reasons, this new project was aborted. Instead, another much more meaningful and visionary global online newspaper The Cosmian News http:www.cosmiannews.com was launched in July 2018.
Early in 2018, my Korean publisher, Ms. Jeon Seungseon, Poet, Novelist and Playwright, started writing a nonfiction narrative of my life, ‘코스미안(Cosmian)’ in Korean , and it was published in June 2018. So I contacted Ms. Deborah Smith, the English translator of Korean novelist Han Kang’s novel ‘The Vegetarian’, which won 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in 2016.
Since my approach was unsuccessful, I decided to translate it into English myself, revising and rewriting it in my own words. It was being serialized in the Cosmian News and the English version ‘Cosmian’ was published in the fall of 2019 and ‘Cosmian Rhapsody,’ the sequel to ‘Cosmian’ came out this past fall, both in England and the U.S.
Furthermore, The First Cosmian Prize Award ceremony was held at Sejong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in Seoul in October 2019 and The Second Cosmian Prize Award ceremony took place on line in October 2020 due to the current Corona pandemic.
Therefore, as the saying goes, if not this, someone or something far better will turn up, sooner or later, if one never ceases to look for what one wants. I’m reminded of a comment confided by the late V. S. Naipaul (1932-2018), winner of the 2001 Nobel Prize for Literature.
“I knew the door I wanted, I knocked.”
He must have meant to say that there are so many doors. If one door doesn’t open, I’ll knock another. If another door still doesn’t, I’ll knock yet another until one opens.
At the same time, we’d better recall Steve Jobs(1955-2011)’s motto:
“The journey (itself) is the reward.”
It is tough to accept the hard truths of life but we all have to accept them anyway. One is that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 Won’t it be?!
Anyway, I concur with Toni Morrison (1931-2019):
"At some point in life world's beauty becomes enough"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