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자꾸 늘어 간다고, 이러다가 혹시 치매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얼마나 자신을 우울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인은 내게 말했다. 그 말에 순간 나의 기억에 대한 반란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잠자코 정신을 가다듬고 들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서 있어도 자신이 무엇이 필요해서 그 앞에 서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지인의 말을 거들어 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놈의 냉장고가 문제라고만 짧게 생각했다. 내가 생선회 두 어 점을 먹기 위해 평소 마음에 두었던 앙증맞은 간장종지에 고추냉이를 한 줄 짜 놓은 것까지는 분명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기억도 선명했다. 곧바로 알래스카 여행에서 보았던 연어 떼들이 생각나고 손에 잡힐 듯 머리 위로 얕게 나르던 갈매기 떼들이 부리던 극성스러운 날갯짓도 뚜렷이 생각났다. 등이 푸른 연어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곳으로 찾아가는 강줄기를 따라 오르는 중이라는 말을 들으며 인간 만큼 월등하다고 했던 생각도 그대로이다.
마냥 바라보던 신비로운 연어들의 푸른 등 빛만을 유독 지켜보았던 기억들 모두를 철저하게 기억나게 했다. 다시 가고 싶은 멋진 기억 속에 무리하게 빠져있었던 까닭인가 보다. 그 다음 생선을 한 점 집어 고추냉이 간장을 찍으려 할 땐 종지에는 간장이 아닌 올리브 기름이 부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겪은 난감한 상황을 그 지인에게 말해 주어야 했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들을 지인처럼 깜빡한다는 나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시절을 가리지 않고 생리처럼 오고 가던 가난했던 어린시절 기억들은 아주 오래전에 멈춰진 기억들이다. 요즘의 갖가지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마다 그 옛날 아이스케키 하나도 어렵게 먹을 때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의 기억들도 이제는 내 손에서 놓아 준 추억이다.
느끼고 싶지 않던 온갖 기억들과 함께 성장해야만 했던 그런 날들의 시간도 모두 만료된 기간이다. 6월이라는 여름날 세상이 전쟁 여운의 끝자락에 아직 머물러 있던 그 날도 오늘의 6월처럼 온갖 떼를 쓰며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완전히 끝이 났는지 알 수 없던 그때에도 우거진 녹음 사이로 영문모를 산새들은 슬피 울어 대었을 그 여름이다.
나를 낳으시고 집 앞으로 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기저귀를 빨러 나가셨던 어머니는 찬물에 손을 넣으시는 순간 산후풍을 일으키시며 그 자리에서 혼절을 하셨다던 그날에도 여름은 똑 같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한 세상에서 나를 낳으신 그 여름을 어찌 잊을 것인가.
세상 모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기억해야 하는 그 고통의 아픔도 가는 세월 속에 묻혀서 모두 끝이 났다. 해마다 찾아오는 여름이 내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답고 소중한 6월의 여름이다.
그것은 평생 앓으며 대가를 치른 지금의 내 모습이다. 해마다 나를 낳으셨던 6월만 되면 어머니는 한 달을 꼬박 앓아누우셔야 했다. 내가 드린 깊은 아픔이었다.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는 세월을 따라 어머니가 떠나시듯 나도 자리를 털고 일어설 만큼 성장을 했다. 세월이 치유해 준 아름다운 영혼의 기억이 되었다. 한해가 시작될 때마다 달력에서 없애 버리고 싶던 그 6월이었다.
한 칸 건너뛰고 7월이 곧바로 오기를 기다리며 앓던 나의 6월은 더 이상 슬픈 달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강한 6월의 아집 하나면 나에게 치매는 도저히 찾아올 수 없을 거라고 아주 쉽게 말해 주었다. 그렇다, 내가 만약 치매를 앓게 되어도 내가 승화시켜 놓은 6월은 꼭 기억해야 한다.
기억이란 어디에 머물러 있다가 왜 제때 찾아오지를 못하는 것일까. 약물치료도 정신과 치료도 그 어떤 의술로도 속절없는 기억병이라고 한다. 악마가 붙은 까닭이라면 신앙의 도움을 받아 치유를 받을 수 있을 텐데 그 어떤 푸닥거리도 도울 수 없는 공포의 병이다. 자연 속 모든 사물에는 자신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영혼이 머물고 있다는 원시적인 믿음에도 이런 쓸모없는 병이 있었을까.
방금전 내가 무엇을 했는가는 기억으로 되돌릴 수 없어도 수십 년 전의 아픈 기억들은 가끔씩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바로 내가 해야될 한가지 6월의 여름날 기억 하나를 간직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 기억 하나 외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신의 공포병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상실하는 것보다 내게 찾아오는 그 6월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상실감이 두렵다.
미신에게 배운 주술로 치매를 끼어들 수 없게 할 수는 없을까. 내면에 숨어있는 온갖 갈등을 내려놓는 무의식의 세계를 파괴하는 정신질환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그 어느 것으로도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질환을 위해서 지금 맹 연구중이라는 제3세계의 AI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기대하고 있다.
나의 두뇌에 인공 칩을 끼워 넣는 세상이 곧 올 것이다. 치매가 찾아와도 그 칩에 저장된 나의 기억들은 안전할 테고 끝내는 치매도 극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려놓은 슬픈 세상 속 그림들, 굶주림, 눈물, 전쟁 속 여름날에 철없이 흐르던 시냇물 소리가 시처럼 아름다운 나의 기억들은 평생을 두고 대가를 치른 나의 몫이다.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인공지능 속에 모두 들어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내게 말한 냉장고 사건 말고도 틀림없이 몇 개는 더 있을 것 같은 그 지인에게도 빨리 말해 줘야겠다. 어제 먹은 점심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해 줘야겠다. 이제 내겐 잊고 싶은 기억이란 없다. 모두 멈춰진 채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기억들뿐이다. 기억장치인 인공지능으로 모두 간직할 수 있다고 말 해 주어야겠다. 참 다행이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