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펜이 칼보다 위험한 세상

박희정

사진=코스미안뉴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우리가 이 말에 환호했던 이유는 사람의 이성을 유린하는 무()의 폭력성보다 사람의 이성을 존중하는 문()의 힘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절실한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수십 센티미터에 불과한 펜대에 몇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펜촉이, 그것이 아무리 강한 쇠로 만들어졌다 한들 어떻게 검보다 강할 수 있을까?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는 것은 펜으로 상징되는 글과 언어가 칼로 제압할 수 있는 반경을 훨씬 넘어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이것이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진리의 빛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님의 말씀이 법이요 진리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에 그 명제를 의심하는 것은 동시대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할 때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외친 갈릴레오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온갖 조롱과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님의 말씀 중 진리가 아닌 것도 있다고 아뢴 선각자가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는 진보할 수 있었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는 인류의 고귀한 투쟁의 전리품이다. 무력과 폭력이 권력으로 이어지던 시대에는 왕위찬탈도 칼로부터 시작되었고 왕조의 지속도 무력의 뒷받침으로 가능했다. 이를 허물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찾아 민주주의 시대를 연 것은 펜의 힘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펜은 무력을 견제하는 차원을 넘어 권력을 창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얻고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유용한 무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펜의 칼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믿어왔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수많은 사례를 목도하고 있다. 야비한 저의를 그럴듯한 사이비 지성과 논리로 포장해 휘두르는 간교한 펜, 그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수와 정의를 보면서도 우리는 과연 펜의 우월성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사이비 논객들은 그럴듯한 논리로 세상을 조롱하고, 일상사를 과장하고 선동한 후 표현의 자유라는 성곽 안으로 숨어 버린다. 그 성곽은 성스럽기 짝이 없다. 그 성곽을 향해 돌팔매질하는 순간 비민주적 정신병자로 몰리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금기를 깨뜨릴만한 배짱이 없다. 설사 간혹 배짱이 있는 자가 나타난다 한들 성곽 속으로 몸을 숨긴 자들의 야비함을 뒤엎기에는 역부족이다. 언론인들이 정치적 야욕과 결탁하여 어느 순간 정치인으로 변신하고 물질적 탐욕에 눈멀어 어느 경제 집단의 충복으로 변신하는 것이 다반사인 시대에 살고 있다.

 

흉기화된 펜은 칼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이다. 우리는 환상적인 희망을 접어야 하는 순간이다. 맹목적 표현의 자유, 제동장치 없는 표현의 자유를 경계해야 한다. 펜촉에 독극물이 묻어 우리의 심장을 노린다고 할 때 그것이 칼이 아니므로 그냥 두고 보자고 주장할 수는 없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명제는 과거에는 그러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담고 있었다면 오늘날 정보화 사회에서는 현실화된 명제로 다가섰다. 한 문장의 기사는 동시다발적으로 세상에 퍼져나간다.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되는 그 생명력은 가히 천문학적 개념이다. 악의에 가득 찬 교묘한 표현 하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풍비박산 내기도 하고 사회를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제 펜은 칼보다 강한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넘어 흉기화된 펜은 칼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펜이 되었든 칼이 되었든 나쁘게 쓰면 흉기(凶器)가 되고 올바르게 쓰면 이기(利器)가 된다. 흉기와 이기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사용하는 이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에 표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 확고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은 우리에게 공영(共榮)의 길이냐 아니면 공멸(共滅)의 길이냐의 기로를 정하는 분수령과 다름없다.


표현의 방종에 맞서는 제도적 장치로는 형법상의 명예훼손죄, 모욕죄, 언론 관계법에 의한 언론중재, 방송통신심의, 재허가규제, 민사상 손해배상 등이 있다. 문제는 이들 제도적 장치도 정치적으로 오염되어 있다는 데 있다. 사법제도의 독립성도 의심받고 있고, 규제기구도 여야 정파간 나눠 먹기 식으로 위원들을 구성하다 보니 편파의 연장 선상에 불과하다. 결국 해결하는 것은 언론인 스스로의 자긍심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도그마로 자기 진영의 이득을 합리화하는데 앞장서는 사악한 지식인을 보면, 정의의 검이 생각난다. 정의의 검객, 협객의 검은 우리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펜이 칼보다 더 위험하다는 전제 아래 우리의 생각을 정비해야 한다.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 표현의 방종 속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으며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가? 역사는 희화화되고 멀쩡한 사람은 파렴치한으로 몰렸다. 어둠에 빛을 밝히고 위선의 썩은 곰팡이를 제거하는 그의 이름은 책임 있는 표현이다. 절제의 미덕이 표현의 방종을 대체하는 날, 이 세상은 한 걸음 더 행복한 사회로 들어설 것이다. 정의의 논객, 세상을 사랑하는 이의 필설이 기다려진다. [글=박희정]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9.03 10:13 수정 2021.09.0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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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