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깊어진 짙푸른 가을 하늘, 선선하게 불어오는 강바람, 가슴이 뻥 뚫릴 듯 시원하게 뻗은 한강, 한눈에 담기는 웅장한 북한산, 이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가을 최고의 나들이 명소이자 힐링 포인트 ‘행주산성’을 찾는다.
요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하고 있는 ‘행주산성 역사누리길’은 행주산성 입구와 행주산성역사공원에 있는 고양시정연수원을 잇는 역사가 담긴 길이다. 산길과 강변길을 한 바퀴 순환하는 4km 코스인데 2시간이면 넉넉하게 걷는다.
오늘은 행주산성 입구인 대첩문에서 출발해서 토성을 거쳐 행주대첩비에 오른 후, 진강정 뒤로 내려와 수위관측소에서 한강을 낀 수변누리길을 따라 고양시정연수원이 있는 행주산성 역사공원까지 걷는다.
행주산성 대첩문을 지나 산성 내부로 들어서자 우뚝 선 권율 장군 동상이 탐방객을 반긴다. 동상 뒤편에는 행주대첩 당시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치열한 항전 모습이 담긴 부조물이 조각되어 있다.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곳이다.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2,300여 명의 정예병과 승병, 의병, 부녀자 등 총 3,000여 명이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진 역사적인 전승지이다. 특히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날라서 싸워 ‘행주’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적송과 반송이 우거진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가 나온다. 잠시 사당에 들러 참배를 한 후 본격적으로 토성을 향해 오른다. 회화나무와 물푸레나무, 신갈나무가 우거진 행주산성 토성 길은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하나같이 나무들은 굵은 밑동에 푸른 이끼와 덩굴들을 고즈넉이 감고 있어 행주산성의 유구한 역사를 실감 나게 한다. 나지막한 토성 위로 난 숲길은 푹신하고 감촉이 좋아 걷기 편하고 발걸음도 가볍다. 토성 주위는 아름드리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줘 한낮의 따가운 햇살에도 숲속은 서늘하다.
부드럽고 완만한 산등성이를 잇는 400m 가량의 토성을 복원하는 공사 중에 삼국시대의 기와와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토성을 지나면서 이 작은 산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생결단의 결기로 싸웠던 병사들과 치맛자락으로 돌이라도 날라야 했던 민초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가파른 데크를 올라 영상교육관인 충의정에 닿으면서 그동안 울창한 수목에 가려져 있던 한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덕양산은 높이가 124m밖에 되지 않지만 정상에 서면 어느 산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조망을 품고 있다. 한반도 역사의 중심인 한강 하구의 진산(鎭山) 북한산의 장엄한 모습과 수도 서울의 젖줄 한강의 유장한 물줄기,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창릉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가히 감동적이다.
그런가 하면 고양 땅 곳곳의 나지막한 야산과 농경지, 그리고 빠른 속도로 여백을 지워가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도로들은 고양 땅에서 전개된 역동적인 변화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우뚝 솟아 있는 행주대첩비를 바라본다. 권율 장군이 왜병을 격퇴한 승전을 기념해 1602년(선조 35) 세운 비에는 행주대첩의 세세한 과정과 권율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첩비 왼편으로 주황빛 방화대교와 푸른 한강 물이 어우러진 멋스러운 풍광이 펼쳐진다. 남산과 상암 월드컵 경기장, 성산대교, 관악산 등 서울의 서쪽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첩비 아래로 내려서면 한강과 인근 서울, 김포시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팔각정자 ‘덕양정’이 있다. 정자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역사누리길 방향으로 가면 또 하나의 정자 ‘진강정’이 호젓하게 자리하고 있다. 한강으로 내려가는 산길로 접어들면 가꿔지지 않은 숲속에 원시가 살아 숨 쉬는 작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혼자 걷기 좋은 좁은 오솔길은 잡다한 생각을 정리하기 좋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번다한 일상을 잠시 잊고 건강한 사유와 소소한 힐링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덕양산에는 가을 야생화인 개망초가 지천이다. 한낮의 볕으로 물든 따뜻한 숲. 길이 외지지만안내판이 잘 마련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강가로 내려오는 좁은 숲길은 가파른 곳에서는 조심해서 내려와야 한다. 이윽고 길 끝에서 선물 같은 한강의 풍경과 만난다.
수변누리길이 끝나는 언덕 위에 자리한 팔각정 초소 전망대는 한강 변 철책선의 초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철책을 철거하면서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통일, 평화를 상징하는 목적으로 남겨둔 건물은 전망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작은 북카페가 있어 느긋하게 쉬어가기도 좋다. 이곳에서는 좌로부터 방화대교와 개화산, 행주대교, 행주나루 등이 차례로 보인다. 행주대교 너머 붉게 물드는 석양을 감상하기 좋은 명당으로 입소문이 난 곳이기도 하다.
전망대에서 숲속의 계단 길을 따라 내려오면 ‘행주산성역사공원’에 도착한다. 덕양산 아래에 있는 한강 변 공원으로 발을 담글 수 있을 정도로 한강 가까이에 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과 조각공원, 휴식 공간 등이 있고, 노을 지는 한강과 아름다운 조명으로 반짝이는 방화대교, 행주대교를 품은 한강의 야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행주대교까지 반잠수정을 타고 침투해오는 무장간첩들 때문에 강변은 철책으로 가로막혀있어 강가로 내려설 수 없었다. 한강 경계 임무를 띠고 이곳에 근무했던 1981년 기자의 군 생활 시절, 중대 본부가 있던 자리에 행주산성역사공원이 들어섰다. 그래서 여기 올 때마다 분단의 빗장을 열고 진정한 평화가 오기를 염원하고 있다.
행주산성 주변에는 행주서원, 행주성당 등 다양한 명소가 있고 무엇보다 이미 소문난 장어구어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 국수 맛집들이 즐비해 있어 한강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차 한잔이나 식사를 하기에도 제격이다.
‘추석(秋夕)’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가을 저녁’, 나아가서는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라는 뜻이다. 올 추석 연휴에는 행주산성과 한강 바로 옆에서 풍요로움과 넉넉함의 상징인 ‘한가위 보름달’을 만끽하기를 추천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곳으로 오려면 능곡역 또는 화정역에서 011 버스를 타고 행주산성 입구나 고양시정연수원에서 하차하면 된다.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네비에 ‘행주산성주차장’이나 ‘행주산성역사공원 주차장’을 치면 된다. 행주산성 주차장은 종일 주차에 2천원, 행주산성 역사공원 주차장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