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이 열정을 불태우고 미련 없이 가고 있다. 풀잎에 이슬 맺히는 백로(白露)도 지났다. 맹렬하게 내리쬐던 여름 햇빛이 서늘한 바람 타고 한결 누그러지면 우리 마음에는 습기가 찬다. 가을은 약간의 우울을 허락하는 계절이지만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우울의 강도가 더 심해질 수 있다. 고독과 외로움을 쉽게 타는 ‘가을 남자’가 되기 싫어 친구들과 강화도 마니산으로 향한다.
산행 들머리인 마니산 관광단지에는 평일 오전이라 등산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전국체전 성화 채화 기념물과 참성단 모형물을 지나 잘 꾸며진 공원으로 들어선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체온과 QR코드를 체크해야 등반이 가능하다. 오늘은 능선 코스인 '단군로'를 따라 정상에 올랐다가 암릉구간을 지나 함허동천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단군로'는 숲이 깊고 산길이 완만하다. 등산을 시작하는 초입, 조금만 오르니 발아래로 토실한 도토리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세월을 묵묵하게 버텨온 듯한 고목들이 길을 내준다. 땅 위로 차고 오른 굵고 투박한 나무뿌리가 뒤엉킨 오르막길을 계단 삼아 걷는 숲길이 고즈넉한 오솔길처럼 포근하고 정겹다. 흙과 바위틈 사이로 올망졸망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과 풀들이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미소짓는다.
능선길의 웅녀 계단을 지나 어느 정도 오르니 능선 너머로 장화리 바다가 다가선다. 탁 트인 산마루에 서니 시원한 바람과 손에 닿을 듯 구름이 머리 위에 있다. 내 안에 구름을, 또 구름 안에 나를 실을 수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해풍을 맞으며 마니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암릉 주능선에서 아슴아슴 조망되는 서해 풍광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이다.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 계단이 372개인 '삼칠이'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며 바라보이는 석모도와 신도·시도·모도, 그리고 서해의 섬들, 끝없이 펼쳐진 강화갯벌은 가히 압권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안 석양의 낙조도 장관이다.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정물(靜物) 같다.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건강한 자연을 만나고, 그 자연은 흘린 땀만큼 아름다운 경관으로 보상을 해준다.
드디어 참성단이 보이고, 입구에서 '계단로'로 올라오는 삼거리가 나온다. 아쉽게 참성단은 보수정비 공사 중으로 오를 수가 없다. 풍수 전문가나 기(氣) 수련가들은 '기가 솟구쳐 올라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사람에게 활력이 생기는 곳'으로 '마니산'을 첫손에 꼽는다.
단군왕검은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인 이곳에 참성단(塹星壇)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강화도의 고유 지명인 마이(摩利) · 혈구(穴口)와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참성단은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가 채화되는 곳으로 등산객들만이 아니라 일반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표식에는 나무 기둥에 해발 472.1m 마니산(摩尼山)이라 쓰여 있다. 강화도에서 제일 높은 산에 서니 사방에 거칠 것 없는 풍경이다. 마니산은 백두산. 묘향산, 태백산과 함께 단군왕검의 전설이 얽힌 강화도의 명산으로, 이 산에서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정상의 헬기장에 서서 한참 동안 서녘의 다도해와 북녁의 광활한 강화벌을 가슴에 가득 담는다. 지저귀는 산새들의 안내를 받으며 바싹 다가온 가을 내음 만끽하면서 함허동천 방향으로 하산한다.
능선을 걷다 보면 나무와 바위로 우거진 숲에 세워진 '참성단 중수비'를 만난다. '단군이 제사 지내던 곳이니 후손들이 수천 년 동안 우러러볼 곳이어서 중수한다'라고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정상에서 보면 마니산 주변은 온통 간척한 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니산은 오래전에 고가도라 불리던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강화도와 합쳐져 지금은 강화도와 한 몸이 된 것이다.
하산 길은 능선 곳곳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모양의 너럭바위들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갖가지 재미있는 형상을 한 모양의 바위에 나만의 이름을 붙여가며 능선 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상에서 정수사, 함허동천으로 향하는 능선의 등로는 날카롭지 않되 우람하고, 기묘함이 없되 중후한 암릉으로 부드럽고 너그럽고 덕스런 모습이나 감히 넘보지 못하는 위엄을 과시한다. 짜릿하게 발아래 펼쳐지는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 폭의 멋진 동양화로 변신하여 가슴 가득 스며든다.
암릉 사이로 난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정수사와 함허동천 가는 길이 나오고, 함허동천으로 내려가면 다시 능선길과 계곡 길로 나뉘고, 계곡 길로 접어들어 청량감을 주는 물소리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계곡 아래로 넓은 함허동천 야영장이 나온다.
함허동천은 조선시대 승려 ‘기화‘의 당호이다. 그는 근처에 있는 사찰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면서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해진다. 함허(涵虛)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 동천(洞天)은 "산과 물에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니 한 마디로 여기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그러고 보니 마니산은 단군의 홍익인간과 부처의 자비가 어우러진 유서 깊은 명소임이 분명하다.
산행 날머리인 함허동천을 나와 근처에 있는 행자골 벌판을 걷는다. 시원한 가을바람과 함께 가을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너른 벌판을 걸으니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가을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을에는 모든 것이 풍성하다. 가을 들녘에 서서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아 낱알이 영글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올 가을애(愛),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답답함과 짜증을 느낀다면 마니산에 오르면서 청명한 하늘 아래 하얀 구름과 진초록빛 산이 만드는 절경 속에 나를 물들여 보는 건 어떨까?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