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미주 뉴욕판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칼럼 <’공기’를 읽지 않는 일본 공주> 필자 이영희 한국 중앙일보 도쿄특파원은 칼럼 글을 이렇게 맺고 있다.
“‘공기를 읽는 것’은 일본인의 미덕이자 한계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라는 학자는 『공기의 연구』라는 책에서 공기를 ‘개인의 선택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공기를 읽지 않기로 결정한 공주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정체된 공기에 둘러싸인 듯한 일본 사회에도, 왕실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음을 보여주는 신호 같아서다.”
이달 말 자민당 총재선거와 이어지는 중의원 선거 등 일본은 바야 흐로 ‘정치의 계절’이지만 정작 요즘 가장 궁금한 일본인은 이 사람 이다. 무려 4년에 걸친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해 안에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한 일본 왕실의 마코(眞子·29) 공주다. 마코 공주는 현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조카, 즉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文仁) 왕세제의 큰딸이다.
지난 2017년 가을, 마코 공주가 대학에서 만난 동갑 남자 고무로 게이(小室圭)와 약혼을 발표할 때만 해도 상황은 괜찮았다. 하지만 고무로의 ‘복잡한 가정사’가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고무로의 어머니가 동거하던 남성에게 4000만원을 빌려 갚지 않았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고무로 가족의 ‘깔끔하지 않은’ 온갖 사생활과 돈 문제가 터져나왔다.
일본인의 고무로 모자(母子)에 대한 반감은 상상 이상이다. 결국 결혼은 연기되고 고무로는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지난 수년간 거의 매주 관련 뉴스가 주간지를 장식했다. 최근엔 고무로가 뉴욕의 로 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 취직하기 위해 허위 이력서를 썼다는 폭로 까지 나왔다. 한 조사에선 응답자의 97.6%가 마코 공주의 결혼에 반대했다고 하니, 온 국민이 공주의 부모 입장이 돼 “이런 집안과 결혼시킬 수 없다”고 나선 셈이다.
물론 ‘기분 문제’만은 아니다. 왕실 유지에는 막대한 세금이 들어 간다. 현재 법으로 여성 왕족은 결혼과 함께 왕적을 박탈당하지만, 품위 유지를 위해 최대 1억5250만엔(약 16억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이 역시 세금이다. 국민 덕에 존재하는 왕족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쏟아진다.
놀라운 것은 마코 공주다. 나라 전체에 “이 결혼 반댈세”라는 ‘공기 (空気·분위기)’가 꽉 찼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돈이 문제라면 지원금은 받지 않거나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세금으로 치러지는 성대한 결혼식도 하지 않고 혼인신고만 한 후, 남자친구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 신혼 살림을 차리겠다고 선언했다. 전통과 의례가 모든 것인 일본 왕실에서 “다 필요 없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외치 는 공주가 등장한 것이다.
‘공기를 읽는 것’은 일본인의 미덕이자 한계다. 야마모토 시치헤이 (山本七平)라는 학자는 『공기의 연구』라는 책에서 공기를 ‘개인의 선택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공기를 읽지 않기로 결정한 공주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정체된 공기에 둘러싸인 듯한 일본 사회에도, 왕실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가 왔음을 보여주는 신호 같아서다.
이영희 도쿄특파원
2016년 12월 자연과인문에서 출간된 우생의 졸저拙著 <생의 찬가>를 나는 이렇게 ‘여는 글’로 시작했다.
차심이라는 말이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들어가
그릇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이상과 같은 손택수 시인의 ‘차심’ 부분을 인용한 후 2016년 4월 13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시로 읽는 삶] 칼럼 ‘사물들의 마음’에서 필자 조성자 시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 잔의 차에도 차심이 있고, 한 송이 꽃에도 화심이 있으며, 땅에 지심이 있다. 마음이 금을 메워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마음이란 상당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사물과 잠깐만 눈을 맞춰 봐도 모든 사물에는 마음이라 칭할 수 있는 그만의 성질 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2016년 4월 14일자 중앙일보 일간 스포츠지 [갓모닝] 칼럼
‘예지몽豫知夢 경험 있다면 당신도 영능력자靈能力者’에서 필자 차길진은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의 몸은 수분이 정확히 71.5%를 차지한다. 지구도 물이 71.5%를 차지한다. 인간 몸의 경혈은 365개, 지구는 1년에 365일을 공전주기로 갖는다. 우리 몸은 하나의 작은 지구요, 우주인 셈이다. 우리 몸의 신비도 우리가 다 알지 못하듯 지구의 신비도 또한 인간이 아는데 한계가 있다.”
만물의 마음을 읽지는 못할 망정, 그 억만 분의 일이라도 찰나적 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게 ‘영적靈的 능력能力’이라 한다면 우린 모두 영적 능력자라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사물의 물질적인 표면에 눈이 멀지 않는다면 말이다.
흔히 우리는 매사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 먹는다 기보다 어떤 마음 ‘심心’을 심느냐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심는 마음이 품는 마음이 되고 품는 마음이 만물을 낳는 마음이 될 테니까.
아름다운 마음을 심고 품어야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할 수 있지 않으랴. 이렇게 마음 심기, 품기, 낳기의 ‘기氣’는 아무런 형체도 없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우주에 가득 차 있어 자유자재로 구름처럼 떠돌다가 비도 되고 바람도 되며 수많은 별들이 되는 게 아니던가.
모든 일과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우리가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기氣를 숨, 생명이라고도 하고 영혼靈魂이라고도 하며 가장 아름다운 말인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공중에 떠도는 이런 기 ‘공기空氣’를 읽지 않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어찌 밤낮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작용인 숨을 한 순간인들 쉬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우리의 생명이자 영혼인 우주 의 숨 공기, 곧 ‘사랑’을 그 누가 그 어떤 새장 같은 틀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자, 이제 2020년 3월 27일자와 5월 29일자 그리고 12월 5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아래와 같이 옮겨 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인곡(人曲) <‘아리랑’부터 불러보리>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생겼는가. 우주 속에 내가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내 몸이 소멸되면 내 마음과 정신도 없어지는가. 육체와 영혼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거창한 문제에 만인이 만족할 만한 해답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해답을 찾아볼 수밖에 없으리라.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무궁무진 무한한 이 우주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풀어보기 위해 태어난 신비스러운 우리 자신들이 아닌가. 이토록 신비로운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해답을 찾는 일이 언감생심이라면 신곡(神曲)이 아닌 인곡 (人曲)부터 지어 부른,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포크 스타 밥 딜런(Bob Dylan 1941 - )의 1970년대 대표적인 반전시위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Blowing in the Wind,’ 아니 그보다도 2012년 유네스 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정감 넘치는 ‘아리 랑’ 가락이 그 바람개비 풍향계(風向計)가 될 수 있으리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란 노래를 들으면 한국에 살고 있든 해외에 살고 있든 우리 모두가 다 가슴이 찡해지지 않는가. 이는 비단 한국인의 경우일 뿐 아니라 인류가 다 그러하리라.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되지 않았는가. 2011년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 세계 유명작곡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아름다운 곡 선정하기 대회에서 지지율 82%라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아리랑이 선정됐는데 선정 과정 중에서 단 한 명의 한국인도 없었고 이들은 놀라는 눈치였다는 보도였다.
“아리랑의 시원과 비밀을 풀자면 지상이 아니라 천상의 세계까지 찾아봐야 할지 모른다. 아리랑은 인간만의 노래가 아닐 수 있다. 인간 태초의 소리가 담겨 있다는 아리랑은 어쩌면 외계인과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일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는 아리랑이 남과 북은 물론이고 지구인과 외계인과의 소통까지 가능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 처음 내뱉는 옹알이가 ‘아리, 아리랑’이 되었듯이 아리랑이 우주에서 통할 원초 적 언어라면 아리랑을 매개로 우주 저 반대편과 통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015년 12월 22일자 중앙일보 일간스포츠 [갓모닝] 칼럼
‘을미년, 우리 의식을 깨우게 한 아리랑’에서 차길진(1947-2019) 후암미래연구소 대표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인생의 한을 흥겹게, 때로는 구슬프게 승화시켜왔다 면 옛날얘기는 그만두고 지난 한 세기만 돌아보더라도 너무도 한 많은 세월이 아니었나.
뉴욕타임스는 2015년 12월 19일자에서 한국에서 그 당시 논란 을 빚고 있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대서특필했고, 이 보도를 계기로 뉴욕한인학부모 협회는 박 교수의 해임을 대학 당국에 촉구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주한미군을 따라다니는 ‘담요부대(Blanket Corps)’로 불린 한국인 매춘부들에 비교하는가 하면 가난에 의한 자발적 지원이고 일본군과 동지 같은 관계를 형성했었다는 등의 책 내용이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처럼 당쟁만 일삼다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 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젊은 남자들은 징병으로, 나이 좀 든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려나가 개죽음을 당하거나 혹사당하다 병사 하지 않았는가. 동시에 생과부가 된 여인들은 어떻게든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야 했고, 어린 아가씨들은 강제였든 아니었든 생존 수단으로 성노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2차 대전 종전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남북으로 갈려 동족상잔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총부리를 서 로 겨누고 있지 않는가. 또 월남전에는 일종의 용병으로 참전해 무고한 생명들을 살상하고 자신들의 목숨도 바치지 않았는가.
과거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는 데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 전쟁도 잊은 채 저마다 밥그릇 싸움에만 이전투구라니 아, 슬프도다! 돈으로 선진국이 된들 정신이 썩으면 얼마나 버틸까. 법 이전에 정직하게 도덕과 양심으로 살아가는 나라가 되려면 잘못을 알면서도 외면하지 말고 투표 때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주는 국민이 돼야 하리라.
자, 이제, 시야를 한반도, 동서양을 넘어 온 지구촌으로 돌려 보리 라. 우리는 모두 오디세우스의 후손이고 단테의 후예가 아닌가.
8살 된 베아트리체를 우연히 보게 된 9살의 단테는 평생 베아트 리체를 기억하고 사랑하기 시작한다. 귀여운 아이 베아트리체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다음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죽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베아트리체 이지만 그녀를 잊을 수 없었던 단테는 그녀를 위해 ‘신곡(神曲)’을 쓴다. ‘신곡’에 등장 하는 베아트리체는 더이상 아름다운 인간이 아닌 사랑-자비-성령 그 자체다. 8실짜리 아이가 신(神)이 된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애창되는 미국 포크송 ‘메기의 추억’이 있다. 원제목인 ‘메기, 그대와 내가 청춘이었을 때(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란 시는 이렇게 끝맺는다.
사람들은 내가 나이 들었다고 말하지요
내 걸음걸이는 예전에 비해 느려졌다오
시간이란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죠
얼굴에는 내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사연이 적혀 있다오
(중략)
우리가 같이 한 시간들
함께 부른 노래들은 이미 흘러간 시대의
낡은 것들이라 사람들은 말하지만
메기, 당신은 우리가 젊었을 때 그 시절 그 모습으로
여전히 아름답게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다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시는 체험이라고 했다. 토론토대학에 재직하던 조지 존슨은 학생이던 메기 클락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다. ‘단풍잎’이라는 자신의 시집에 폐결핵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위한 사랑의 시를 바친다. 이 시에 친구인 제임스 버터필드가 1864년 곡을 붙였으나 메기는 23세의 나이로 떠나 이 사랑의 노래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야 희미한 옛 생각
동산 수풀은 없어지고
장미화는 피어 만발하였다.
물레방아 소리 그쳤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고향을 떠난 나그네들이다. 모든 인간의 고향은 바다였고, 바다의 기원은 지구란 행성을 만들어 낸 우주의 티끌이며, 이 티끌은 빅뱅(Big Bang)에서 시작되었다면, 우리말 로 해서 하늘과 땅이 교합해서 생긴 우주 만물의 영원한 고향은 하늘의 정기를 받은 ‘코스모스바다’이리라. 이 코스모스 바다로 날아가는 우리 모든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노래가 바로 우리의 인곡(人曲)인 ‘아리랑’이리.
[이태상의 항간세설] ‘코스미안은 사랑의 화신이어라’
큰 그림이 숙명이라면 작은 그림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 가운데 지구라는 별에, 수많은 생물 중에 인간으로, 어떤 나라와 사회 그리고 지역에, 어느 시대와 시기에, 어떤 부모와 가정환경에, 어떤 신분과 여건에, 어느 성별 로 태어나느냐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 고 대응하는가가 운명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숙명(宿命)의 ‘숙(宿)’은 머무를 숙 자(字)이고 운명 (運命)의 ‘운(運)’은 흐를 운 자(字)인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고정된 게 숙명이고 변하는 게 운명이란 뜻이 아닌가. 영어로는 destiny, doom, fate, fortune, lot 등의 단어가 사용된다. 영어 노래 제목 에도 있듯이 ‘넌 나의 운명(You Are My Destiny)’이라고 할 때 는 ‘넌 나의 종착지’란 의미에서 ‘넌 나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캐나다 가수 폴 엥카(Paul Albert Anka, 1941- )가 부른 노래 가사 첫 구절을 우리 한 번 함께 음미해보리라.
넌 나의 숙명
You are my destiny
그게 바로 너야 나에게는
That’s what you are to me
넌 나의 행복
You are my happiness
그게 바로 너야
That’s what you are
영어로 ‘It was my fate to be or to do’라 할 때 ‘내가 어떻게 되거나 뭘 하게 될 운명 또는 숙명이었다’고 하는가 하면, ‘운명의 총아’라 할 때는 ‘a child of fortune’이라고 행운아幸運兒란 뜻 이고, ‘누구와 운명을 같이 한다’ 할 때는 ‘cast one’s lot with some- one’이라고 내 몫(my lot)을 누구에게 건다고 한다. 그리고 ‘He met his doom bravely.’라 할 때처럼 ‘doom’은 불행한 종말을 가리킨다.
최근 영국에 사는 친구가 영국 여왕(Queen Elizabeth II, 1926 - )의 어렸을 때부터 찍힌 사진들을 동영상으로 보내온 것을 보고 나는 이렇게 한마디 코멘트를 답신으로 보냈다.
“왕관의 노예로 90여 평생을 살고 있는 모습 보기 정말 딱하다”
물론 세상에는 이 영국 여왕의 신세를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겠지 만 나는 사랑을 위해 대영제국의 왕위를 버린 윈저공(Duke of Windsor, Edward VIII, Former King of the United Kingdom 1894-1972)을 떠올렸다.
조지 5세(George V1865-1936)의 아들로서 1936년 4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미국의 이혼녀 심슨부인(Wallis Simson1896-1986)과의 사랑 때문에 퇴위한 에드워드8세 얘기다. 당시 라디오를 통해 퇴위를 발표한 그의 퇴위사를 옮겨본다.
“오래 고심 끝에 몇 마디 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난 언제나 아무 것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진 헌법상 밝힐 수가 없었다. 몇 시간 전에 왕이자 황제로서 내 마지막 임무를 마쳤고 이젠 내 아우 요크공이 왕위를 계승했음으로 내가 할 첫 마디는 그에 대한 내 충성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를 나는 충심으로 하는 바이다.
백성 모두가 내가 퇴위하게 된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결심 하는 데 있어 지난 25년 동안 웨일즈 왕자 그리고 최근에는 왕으 로서 섬기려고 노력해온 이 나라와 제국을 잠시도 잊지 않았음을 알아주기 바라노라.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뒷받침 없이는 왕으로서의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 말을 백성들이 믿어주기를 바라노라. 또한 이 결정은 나 혼자 한 것임을 알아주기를 바라노라. 전적으로 나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 었음을.
내 곁에서 가장 걱정해준 사람은 마지막까지 내 결심을 바꿔보려 고 애썼다는 사실도. 무엇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최선이겠는가. 이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 결심을 나는 하였노라.
이렇게 결심하기가 좀 더 쉬웠던 것은 오랫동안 이 나라의 공적인 업무수행 교육을 잘 받아왔고 훌륭한 자질을 겸비한 내 아우가 즉시 내 뒤를 이어 제국의 발전과 복지에 아무런 차질이나 손실 없이 국사를 잘 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많은 백성들도 누리지만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축복, 처자식과 행복한 가정을 내 아우는 가졌다는 사실이었노라.
이 어려운 시기에 나의 어머님 국모님과 가족들로부터 난 위안을 받았고, 내각 특히 볼드윈 수상이 항상 나를 극진히 대해 주었으 며, 각료들과 나 그리고 나와 국회, 우리 사이에 헌법상 어떤 이견 도 없었노라. 내 선친에게서 헌법에 기준한 전통을 이어받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었노라.
내가 웨일즈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 대영제 국 어디에 거주했든 간에 가는 곳곳마다 각계각층 사람들로부터 받은 극진한 사랑과 친절에 깊이 감사하노라.
이제 내가 모든 공직에서 떠나 내 짐을 벗었으니 외국에 나가 살다 가 고국에 돌아오려면 세월이 좀 지나겠지만 언제나 대영제국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언제라도 황제 폐하께 공인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섬길 일이 있다면 주저치 않을 것임을 천명하노라.
자, 이제, 우리 모두 새 왕을 맞았으니 그와 그의 백성 모두에게 행복과 번영이 있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노라. 백성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왕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At long last I am able to say a few words of my own. I have never wanted to withhold anything, but until now it has not been constitutionally possible for me to speak. A few hours ago I discharged my last duty as King and Emperor, and now that I have been succeeded by my brother, the Duke of York, my first words must be to declare my allegiance to him. This I do with all my heart.
You all know the reasons which have impelled me to renounce the throne. But I want you to understand that in making up my mind I did not forget the country or the empire, which, as Prince of Wales and lately as King, I have for twenty-five years tried to serve.
But you must believe me when I tell you that I have found it impossible to carry the heavy burden of responsibility and to discharge my duties as King as I would wish to do without the help and support of the woman I love.
And I want you to know that the decision I have made has been mine and mine alone. This was a thing I had to judge entirely for myself. The other person most nearly concerned has tried up to the last to persuade me to take a different course. I have made this, the most serious decision of my life, only upon the single thought of what would, in the end, be best for all.
This decision has been made less difficult to me by the sure knowledge that my brother, with his long training in the public affairs of this country and with his fine qualities, will be able to take my place forthwith without interruption or injury to the life and progress of the empire. And he has one matchless blessing, enjoyed by so many of you, and not bestowed on me, a happy home with his wife and children.
During these hard days I have been comforted by her majesty my mother and by my family. The ministers of the crown, and in particular, Mr. Baldwin. the Prime Minister, have always treated me with full consideration. There has never been any constitutional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m, and between me and Parliament. Bred in the constitutional tradition by my father, I should never have allowed any such issue to arise.
Ever since I was Prince of Wales, and later on when I occupied the throne, I have been treated with the greatest kindness by all the classes of the people wherever I have lived or journeyed throughout the empire. For that I am very grateful.
I now quit altogether public affairs and I lay down my burden. It may be some time before I return to my native land, but I shall always follow the fortunes of the British race and empire with profound interest, and if at any time in the future I can be found of service to his majesty in a private station, I shall not fail.
And now, we all have a new King. I wish him and you, his people, happiness and prosperity with all my heart. God bless you all! God save the King!”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1 December, 1936
그럼 (만으로) 나이 94세인데도 자식이나 손주에게 물려주지 않고 백발에 왕관을 쓰고 있는 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윈저공의 경우는 왕관의 노예가 아닌 사랑의 노예였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권력이나 명예나 재산의 노예가 되기보다 사랑 의 노예가 되는 게 비교도 할 수 없이 그 얼마나 더 행복한 일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왕위까지 버릴 수 있었을까.
그런데 사랑보다 더 무서운 건 생각하기에 따른 사상과 믿기에 따른 신앙이란 허깨비들이 아닐까.
지난 2016년 5월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됐었는데 범인은 정신 병력을 가진 30대 남성으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밝혔 단다. 따라서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혐오의 근본 원인을 좀 찾아보자.
영어로 여성혐오는 misogyny라 하는데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 한다는 뜻 말고도 성차별을 비롯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적 도구화까지 다양하다.
서양에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둥, 아담에게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낙원에서 쫓겨나도록 한 것도 여성 인 이브라는 둥, 구약성서 창세기 설화가 있는가 하면, 봉인 된 판도라의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죽음과 질병, 질투와 증오 같은 재앙을 불러온 것도 최초의 여자 ‘판도라’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지 않은가.
동양에서도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어 우리 한국에서는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까지 있어 오지 않았나.
중국에는 전족(纏足)이라고 계집아이의 발을 어려서부터 피륙으 로 감아 작게 하던 풍속이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 등 온갖 폐습이 있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중동에선 여성들만 히잡을 착용, 마치 닌자처럼 복면을 하고 다녀야 하고, 아프리카에선 여성에게만 하는 검열 삭제라고 여성 생식기를 못 쓰게 만드는 미개한 짓거리가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래 “My my my Delilah Why why why Delilah”라는 팝송의 후렴구 ‘Delilah’는 웨일즈 출신 가수 톰 죤스(Tom Jones, 1940- )의 노래로 웨일즈인들에게는 국가에 해당하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행사에선 ‘떼 창’을 했었는데 그 노랫말은 한마디로 하자면 ‘데이트 살해’다. 사랑한 여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고 칼을 휘두르는 내용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마녀사냥의 사냥개나 숙명이든 운명이든 모든 신화와 전설과 인습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모든 걸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의 노예가 되어보리. 남녀 불문하고 우리 어서 남신(男神)은 그 씨를 말려버리든가 흔적도 없이 화장해 버리고 여신(女神) 시대로 천지개벽하자는 뜻에서 정현경의 ‘여신의 십계명’을 받아 우리 모두 지켜보리라.
여신은 자신을 믿고 사랑한다.
여신은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일을 한다.
여신은 기, 끼, 깡이 넘친다.
여신은 한과 살을 푼다.
여신은 금기를 깬다.
여신은 신나게 논다.
여신은 제멋대로 산다.
여신은 과감하게 살려내고, 정의롭게 살림한다.
여신은 기도하고 명상한다.
여신은 지구, 그리고 우주와 연애한다.
정녕코, 코스미안은 사랑의 화신(化神/化身)이어라.
[이태상 칼럼]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에게 띄우는 제2신(信)
안녕하십니까.
저는 트위터에 문외한(門外漢)이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2020년 12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인용 보도된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글을 읽고 2년 전에도 공개서신을 드린 적이 있는 독자 로서 이렇게 다시 몇 자 적습니다.
"외모는 딱 내 취향인데 인격은 그렇지 못한 여자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참 서글퍼진다. 보고만 있어도 서글프니 깊이 엮이면 훨씬 더 서글플 것이다라고 하루키는 자신의 트위터에 밝혔다.”
이것이 어디 ‘여자’에게만 적용(適用)되는 일이겠습니까. ‘남자’ 에게도, 모든 인간에게 해당(該當)하겠지요. 그리고 ‘인격(人格)’ 이란 고정(固定)된 것이 아니고 유동성(流動性)이 있어 ‘신격 (神格)’으로 승화(昇華)할 수도 수격(獸格)으로 전락(轉落)할 수도 있지 않던가요.
벌써 두 분 다 세상을 떠나셨지만 나에게는 누나가 둘 있었습니 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국민학교(초등 학교)만 겨우 마치면 집에서 살림이나 배워 시집가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누이들은 집안 식구 아무도 모르게 중학교 입학 시험을 치고 돈 안 드는 사범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에서 소풍 가는 전날 밤이면 누이들은 밤을 꼬빡 새워 8.15 ‘해방’ 후 배급된 미국의 구호물자 설탕 가루로 눈깔사탕을 만들어 소풍날 친구들에게 팔아 용돈으로 쓰곤 했지요. 작은 누이는 영양 실조로 자고 나면 얼굴이 퉁퉁 붓기까지 했습니다. 밥솥 누룽지 조차 누이들에게는 차례가 못 갈 정도였으니까요.
노래를 잘하는 큰누이는 교회 성가대원으로 다른 교회로 독창 하러 불려 다니기도 했는데 성가대를 지휘하는 찬양대장이던 목사님 아드님과 연애한다고 어머니가 누이 머리칼을 가위로 다 잘라버려 머릿수건을 쓰고 학교에 다닌 때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하고 큰누이는 국민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6.25 사변 때 타이피스트로 미군부대에 취직, 거기서 한국군 통역장교이던 매형을 만나 식도 못 올린 결혼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출신인 매형이 고시 공부하겠다고 군에서 일찍 제대하고 공부하는 동안 다시 교편생활로 돌아간 누이가 여러 해를 두고 힘겹게 생활을 꾸려나갔죠. 설상가상(雪上加霜) 으로 몸이 약하던 매형이 결핵 폐병까지 앓게 되자 남편의 법학 책값뿐만 아니라 약값까지 누이가 마련해야 했습니다. 누이의 극진한 간호로 매형의 병은 완쾌되었으나 운(運)이 없었는지 매형은 고등고시(高等考試) ‘고시(高試)’에 번번이 낙방(落榜)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5·16 쿠데타가 나자 혁명 주체세력이던 같은 경상도 고향 친구들의 천거로 발탁되어 감투를 하나 쓰게 되자 그토록 점잖고 가정적이던 남자가 돌변(突變), 처자식들을 버리고 바람이 났습니 다. 그때 나에게 하소연하러 찾아오신 누님을 나는 위로해드리기 는커녕 몹시 섭섭하게 해드렸던 것이 아직까지도 나의 마음에 걸립니다. ‘매형이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참았었지, 나 같으면 옛날에 바람이 나도 수백 번 났을 거라’며 누이 보고 제발 살림 살이와 애들 키우는 데만 정신 팔지 말고 얼굴과 머리도 좀 잘 다듬고 옷차림에도 신경 쓰시라고, 말과 행동을 좀 더 부드럽고 아름답게 하시라고, 그리고 매형의 몸과 마음과 혼을 누이의 극진 한 사랑과 정성으로 사로잡아 보시라고, 냉정하고도 건방지게 나는 한바탕 훈시(訓示) 아닌 훈시, 설교(說敎) 아닌 설교를 해댔 지요.
그러면서 어려서부터 들어온 아버님 이야기를 누님께 상기시켜 드렸답니다. 아버님께서는 다음날 출장을 떠나시면서도 어서 주무시라고 해도 그 다음날 기차에서 주무시면 된다고 하시면서 바느질하시는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늘에 실을 꿰어주시며 어머님과 함께 밤을 꼬박 새우시곤 했다는 얘기를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님 이 잡숫고 난 다음에야 남기신 반찬을 애들에게 주셨다고 할 정도 로 어머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아버님을 위해 드렸었기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생과부가 된 큰 누이는 어린 자식들 넷을 데리고 갖은 고생하며 살다 못해 하와이에 사는 작은 누이 초청으로 미국 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지요. 그러자 때마침 그동안 썼던 감투가 떨어져 나가 ‘별 볼 일 없게 된’ 매형은 다른 여자가 낳은 딸 아이 하나까지 데리고 누이와 함께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나보다 두 살 위의 작은 누이는 유학 중에 미국의 동양학자와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한국주재 미 공군 근무를 마친 후 1963년 네덜란드 라이덴대학에서 ‘몽고의 한국 침략(Korea, The Mongol Invasion)’이란 학술논문(저서)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프린스턴대학의 첫 한국 학 학자로 재직했습니다. 그 후로 하와이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동서 문화센터의 한국학회를 창설한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학자로 그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도 능통했지요. 그는 한국역사 (A History of Korea)’라는 영문으로 쓴 첫 한국역사책을 집필 했고, 전(前) 고려대학교 총장 유진오 박사가 지어준 한국 이름 ‘현순일(玄純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남편의 연구논문 작성에 내조하면서 영한 회화사전 ‘EVERYDAY KOREAN: A Basic English-Korean Wordbook’도 펴내며 바삐 지내던 누이가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시간이 좀 나자 부동산 매매 라이센스를 얻는 공부를 해 부동산 중개인 리얼토 (Realtor)가 되었습니다.
본래 말수가 적고 빼어난 외모에다 마음 씀씀이 크고 신의가 두터 우며 침착한 성품 때문인지 누이는 부동산 세일즈를 썩 잘했습니 다. 부동산 중개 커미션 수수료 (그 당시) 6%에서 소속된 브로커 회사에 3% 떼어주고 남는 3%로 누이가 한 주에 버는 돈이 대학 교 교수 남편의 일년 연봉보다 많아지자 남편이 자존심이 상했는 지 아니면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는지 저명한 학자로서의 경력과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부동산 중개업 브로커 라이센스를 취득해, 누이와 같이 부동산 중개업 회사를 하나 차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 주택 세일즈만 하던 누이의 평판이 좋아지자 큰 개발업자들이 경치 좋은 해변에 콘도미니엄 분양 맨션아파트 등 수백 채씩 짓기 시작하면서 그 세일즈를 누이한테 다 맡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이가 받아오는 세일즈 계약금으로 콘도 건설공사를 마칠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큰 콘도단지, 고급별장, 호텔 등을 취급하면서 누이네 세일즈가 날로 늘어났습니다. 미국 본토뿐만 아니라 유럽, 남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으로부터 걸려오 는 국제 전화 한 통으로 큰 덩어리 부동산 매매가 이루어지게까지 되었지요. 남편은 사무실만 지키고.
누이는 오십여 명의 리얼토를 거느리고 백방으로 뛰었지요. 이처럼 몇 년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뛰다 보니 누이네는 억만장자에 가까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계모 밑에서 자라다 소년 시절 집을 뛰쳐나가 상선 (商船) 선원(船員)으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미국 정부 장학 금으로 명문대학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 톱클래스 동양학자가 되었던 남편이 돈 쓰는데 신바람이 났습니다. 주말이면 라스 베이거스에 가서 하룻밤에 몇만 불, 몇십만 불, 몇백만 불씩 날리 며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누이는 돈 벌기에 정신없었고 남편은 돈 쓰기 바빴지요. 보다 못해 남편에게 거의 모든 재산을 떼어주고 이혼한 누이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사업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떼어 받은 재산을 몇 년 안에 다 탕진하고 알거지 신세가 된 전(前) 남편이자 애들 아버지가 하도 가련하고 비참해 보여 인정이 많았던 누이는 다시 남편으로 서가 아니고 애들 아빠로 집에 들였는데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변(變)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밤 이상한 꿈을 꾸었지 요. 누이가 가파른 비탈길에서 누이 자신이 몰던 차에 깔려 죽는 꿈이었습니다. 잠을 깨서 이상하다 했는데 전보를 받았습니다. 노모(老母)를 작은 누이가 모시고 있었기에 연로(年老)하신 어머님이 돌아가셨구나 하고 전문(電文)을 읽어본 나는 기가 딱 막혔지요. 꿈에서처럼 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통보였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하고 후에 큰 누이한테 서 들으니 작은 누이는 아침 일찍 애들이 다니는 호놀룰루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나의 큰 외조카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동급생이 었음)에 데려다주고 아침나절에 변을 당했는데, 고급별장을 짓는 어느 바닷가 절벽으로 오르는 아직 포장 안 된 비탈길에서 누이는 자신이 몰던 차에 자기가 깔려 죽어 있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이 오후에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다. 1982년 일입니다.
이 일을 당하기 전에도 작은 누이가 그 당시 콜로라도주 (州) (州) 덴버(市)시에 사시던 큰 누이에게 전화로 전(前) 남편 빌 (William의 약칭Bill)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 같다고 말했었 답니다. 어떤 때는 작은 누이의 자동차 트렁크에 살인용 (殺人 用 ) 독(毒)가스 같은 것을 채워놓기도 했다면서 틀림없이 작은 누이가 전 남편의 청부살인(請負殺人)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 같다고 큰 누이는 내게 말했습니다.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3년 후 큰 누이 꿈에 굉장히 크고 화려한 대저택 아름다운 수많은 꽃이 피어 있는 정원에 아들 둘하고 같이 있는 작은 누이가 보이더랍니다. 두 조카도 옛날과는 달리 아주 화평(和平)한 얼굴을 하고 있더랍니다. 반갑고 부러운 마음에서 큰 누이가 작은 누이에게 “얘, 태순(泰順)아, 나도 너의 집에 와 살 수 없겠니? 너의 집 방도 많은데, 나 방 하나만 쓰게 해주렴”이라 고 했더니, “언니, 그러면 좋을 텐데 이 집에 들어오려면 패스포트 가 있어야 해” 하더랍니다.
이 꿈으로 미루어 보아 두 조카까지 그들 아버지가 누이가 두고 간 재산이 탐나 또 역시 청부살인을 시키지 않았을까? 잠시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작은 누이가 죽기 전에 전 재산을 두 아들에게 준다는 유언장을 만들어 놓았었다지만 미성년이던 애들의 생부 ( 生父)로서 그들의 법적인 후견인이었을 테니까 애들이 둘 다 죽 고 나면 그 재산이 애들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후로 조카들과도 소식이 끊겨 여러 해를 두고 백방으로 찾아보던 중 최근에서야 연락이 되어 내 둘째 딸 수아가 칼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찾아가 제 두 사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한창 사춘기 때 엄마 아빠가 다투는 걸 보면서 심한 조울증을 앓게 된 형을 동생이 잘 보살피고 있더랍니다. 작은 누이가 세상 떠난 지 10년 후 1993년 나의 전(前) 작은 매형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두 분의 명복을 함께 빌었지요.
이어서 나의 ‘세 어머니’ 이야기도 좀 해 보겠습니다. 94세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말년에 나는 시설 좋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대인 양로원(Nursing Home)에 모셨는데 별세하시기까지 정신도 말짱하셨습니다. 매주 한두 번 방문했는데 어머님께서 마지 막 숨을 거두시기 한 주 전에 “태상아, 네 외할머니 너한테 안 오셨니?”라고 물으시더군요. 그 당시 나는 흑인들이 많이 사는 뉴저지주(州) 오렌지시(市)에서 가발(假髮)가게를 하나 하면서 가게 뒤에 있는 헛간 같은 곳에 군용(軍用) 야전침대(野戰寢臺)를 하나 놓고 혼자 지낼 때였습니다.
“어머님,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나는 반문(反問)할 수밖에 없었 습니다. 외할머니를 뵌 적도 없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으니까요.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외할머 니가 내게 오셨길래 난 괜찮으니 태상이한테 가셔서 수발 좀 들어 주시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찾아뵈었을 때 어머님께서 ‘네 외할머니께서 다시 오셨기에 난 정말 괜찮으니 제발 태상이한테 가서 좀 돌봐주시라’고 했다는 말씀이셨습니 다. 그런지 이틀 만에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에 계신 동안 어머님을 극진히 간호해준 한국인 간호사가 내가 세 번째로 결혼해 31년째 같이 살고있는 현재 나의 아내 입니다. 어쩌면 내 외할머니께서 XX이라는 여인으로 나에게 나타나 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XX는 인천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오빠 한 명이 있었지만 장녀(長女)로서 어머님과 남동생 그리고 여동생 둘을 돌보는 소녀가장 (少女 家長 )이 되었답니다. 고학(苦學)하며 중학교를 마치자 학비가 안 드는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해 간호사가 되었지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하던 똑똑하고 예쁜 XX은 부반장을 하던 남학생을 그가 공군사관학교에 다닐 때부터 사귀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XX이 서독 파견 간호사로 2년 계약하고 떠나 게 되었습니다. 서독에 가서도 휴일도 없이 낮번 밤번 이중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버는 돈을 다 한국으로 송금했고 남자친구와는 편지로만 서로의 그리움을 달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나가자 XX는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공군 소위와 결혼하게 될 텐데 남자 쪽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지라 더 이상 친정을 도울 수 없는 까닭에서였다고요. 더구 나 바로 밑의 여동생이 사춘기 때부터 정신이상이 생겨 경제 적인 부담이 커지고 있을 때였답니다. 깊은 고민 끝에 그야말로 심청 이가 따로 없다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첫사랑까지 포기하고 친구 의 소개로 (그 당시)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병사를 만나 결혼 해 미국으로 오게 되었지요.
후일담(後日談)이지만 깊은 실연(失戀)의 늪에서 빠져나온 남자 친구는 XX를 이해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민 후 다시 XX를 만나보고 평생의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공군소장까지 되었다가 퇴역했습니다. 한편 XX는 결혼한 남편이 미군에서 제대하고 직장을 가지려 하는 것을 만류 해 대학에 진학시켰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미국의 간호사 자격증도 없이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 보조원으로 밤낮으로 일하면서 딸 둘을 낳아 키우다 보니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였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 신문 기자가 된 남편이 술친구 부인과 바람이 났답니다.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XX는 어린 딸 둘을 데리고 뉴욕으로 올라 와 머리 싸매고 영어사전으로 단어 하나하나 뒤져가면서 의학서적 을 독학으로 외우다시피 해서 정식 간호사 Registered Nurse가 되었지요. 이혼하면서 전(前) 남편으로부터 받기로 된 양육비도 한두 달 받다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큰딸은 정신과 전문의 그리고 작은딸은 교육자로 아주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애들한테는 어려서부터 아빠에 대한 좋은 점만 얘기해주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빠와 가까이 지내도록 방학 때마다 아빠의 새 부인한테 줄 선물까지 들려 보내곤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시댁 식구들 경조사까지 꼭 챙기면서 친하게 지내오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을 다 미국으로 초청해 오빠와 남동생은 세탁소를 경영케 하고 막내 여동생은 공부시켜 시집 보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정신장애자들 보호시설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쯤 해서 지지난해 가을 (날짜는 정확히 기억 안 납니다만) 코스 미안뉴스에 올린 하루키 무라카미 작가님에게 드리는 제1신(信) 으로 올가을 출간된 영문판 ‘코스미안 랩소디 (Cosmian Rhapsody)’에 실린 글 ‘An Open Letter to Mr. Haruki Murakami’를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립니다. 이 우생(愚生)의 졸문(拙文)을 아직 못 보셨을 경우, 망중투한(忙中偸閑)으로 일독해주십시오.
Dear Mr. Haruki Murakami,
Today I read your interview article with Sarah Lyall of The New York Times (October 10, 1018) and I was impressed. I agree with you that “a book is a metaphor.” You expressed my cherished thoughts so poetically.
I do like your statement very much : “If you close your eyes and dive into yourself, you can see a different world. It’s like exploring the cosmos, but inside yourself.” Wow, you were speaking for me too!
All the while, living my life for eighty-two years, I’ve never dreamed that there would be a day like today, one day. Looking back, had I not lost my first love almost sixty years ago, I could not have come to realize that I, and all others, all beings, are “cosmos” born “arainbow of love” from the Cosmos. A young boy who happened to fall in love with the micro-cosmos of a flower ended up embracing the whole of the macro-cosmos.
Your answer was: “I don’t have to dream, because I can write,” when you were asked at the end of the interview: “What do you dream about?”
You said: “I’m a realistic person, a practical person, but when I write fiction, I go to weird, secret places in myself. What I am doing is an exploration of myself - inside myself.”
In my case, I didn’t have to write fiction, because I’ve been living my dreams, being aware from early on that facts were stranger than fiction and that life itself was but a dream.
As published author of 27 books (including 5 translations: Thomas Mann’s ‘Transposed Heads’ and Kahlil Gibran’s ‘The Prophet,’ ‘The Garden of the Prophet,’ ‘Spirits Rebellious,’ and ‘The Nymphs of the Valley”) - all in Korean except three in English, ‘Cosmos Cantata,’ ‘Cosmian’ (published in 2019)’ and ‘Cosmian Rhapsody’ (published in 2020) - all based on my own life.
I couldn’t agree more with Ralph Waldo Emerson when he said: “Use what language you will, you can never say anything but what you are.”
Ever since my earliest childhood, I aspired to write on the invisible sheet of life with the pen of living in the ink of blood, sweat and teardrops of love, and I’m still striving on.
I am writing this letter, seeking your help, perchance, through your huge readership, in reaching out to find a Japanese lady whom I have forsaken almost fifty years ago and to whom I’m dying to extend my belated apologies and explanation before I expire, if I could by any remotest chance.
Unlike you, I’ve usually been an unrealistic and impractical person except as to this lady, which became my lifelong regret and shame. I don’t know if there is a similar saying in Japan as in Korea: ‘Make sure you build a Great Wall with a lady even if you sleep with her only for one night.’
In 1970, I visited Japan for the first time to attend a busi- ness conference in Tokyo. Capitalizing on my off duty free time for a couple of days, I went to Kyoto and Nara for sightseeing after visiting the Osaka Expo. Upon arriving at the Kyoto train station, I approached a young lady in the plaza and making use of my poor Japanese, I asked her for some directions.
As it turned out, she was at the train station plaza to meet her sister, and saying a goodbye to her sister, to my infinite surprise, she offered to be my guide for the day. How could I resist this undreamed of ‘romantic tour’ with such an attractive young lady? As if in a sweet dream, the whole day passed by in a blink of an eye. Even more surprising was her kind invitation for dinner at her home. After dinner with her friends and me, she accompanied me to the train station. She even came down to the platform to see me off after buying me some cookies and candies from the gift shop at the station.
I was taking the night train for Tokyo to fly back to Seoul the next morning. During the short flight, I was in agony, not knowing what to do. It may have been just a friendly goodwill kindness on her part, nothing more and nothing less. But as far as I was concerned, this was a case of ‘all or nothing’ and ‘now or never.’
I did not let her know that I was a married man with two children. Since she didn’t ask me, I felt it’d be presump- tuous and rude of me to tell her I was not available. More likely, though, how I wished that I were a ‘free man!’ After much struggle between my head and my heart, just moments before disembarking from the airplane, I tore up and threw away the note she handed me with her name and address written on it. I justified and rationalized my action by telling myself: “It’s all for her. I don’t want to give her any ‘false hope.’ The sooner she forgets about me, the better off she will be to find a suitable, unattached, eligible bachelor.”
Burning that bridge to her once and for all had to be the best decision that I could make for her, even though it was the worst for me, I thought.
Tragicomically enough, soon after my return home, my wife and I got divorced due to our irreconcilable differences. Our marriage was an accident in the first place. We had sex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one night without having had a date. In those days, ‘one-night-stand’ was unheard of. I felt responsible and we married.
As soon as we got divorced, we learned that she was pregnant with our third child. So we remarried for the sake of the children. After trying harder eighteen more years, we got divorced again for the second time, twenty years after our first wedding.
In my earliest days, I started devouring great people’s biographies and reciting their sayings. Thus brainwashed and hypnotized, I convinced myself that I was a big fire, not a small one easily extinguished even by a breeze, like an eternal star that starts to shine as soon as the sky is dark enough, or like a kite that rises highest against the wind, not with it.
I forced myself to live by ‘sollen’ in Geman meaning ‘ought to be’ in English. However, I’ve come to realize, only after so many trials and errors, that one cannot go against the nature of things, that is, ‘sein’ in German meaning ‘to be’ in English. What will happen, will; what will not, won’t, no matter what. I’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for anything to happen anytime anywhere, the whole Cosmos has to conspire.
If I had failed to build the Great Wall of our blink-brief romance half a century ago, I pray, with your assistance, I might be able to rebuild the bridge between us, at long lastㅡ even if it may be between our tombstones with a copy each of the Japanese edition of my book in Korean ‘우린 모두 성신(星身/神) 코스미안이다 We all are Cosmians born as star body/soul (published in 2020) and of ‘Cosmian Rhapsody’ in English,(published in 2020), to be laid at hers for a bouquet, if you are so kindly inclined to translate these two books, my 26th and 27th.
Gratefully,
Lee Tae-Sang
정녕, 누구와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것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길 없지만 사랑의 사자(使者) 큐핏의 수많은 화살을 한 가슴에 연거푸 맞고 신음(呻吟)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이 사랑의 독침(毒針)을 맞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나도 실연 (失戀)의 가시덤불 속에서 남몰래 소리 없이 몸부림 맘부림 치면 서 피눈물 흘려 왔습니다. 붉은 피가 창백해지도록 말입니다.
작가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쓰도록 맵도록 새콤달콤한 사랑의 미약(媚藥)을 맛보고 이 사랑의 마술(魔術)에 한 번 걸리면 아무도 그 마법(魔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만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하라 이같은 사랑의 절대적인 지상명령(至上命令)을 거역할 수 없 지 않던가요.
사랑과 삶이
또 죽음까지도
연인들에게는
같은 이상(理想)
같은 현실(現實)
같은 진실(眞實)
다시 말해
섹스와 사랑과 삶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인종과 국적, 신분과 계층, 재산과 학벌, 또는 연령, 모든 것을 초월하는 연인들의 정사(情事)는 물론 때로는 정사(情死) 까지 가능한가 봅니다.
그렇다면 이 어인 일일까요?
장밋빛 인생은
가시덤불
장밋빛 사랑은
꿈속의 사랑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어째서일까요?
스탕달(Stendal)이란 필명의 프랑스 작가 마리-앙리 벨(Marie-Henri Beyle 1783-1842)이 그의 소설 ‘연애론(On Love)’에서 말했듯이 네 살, 내 살 모르도록 네 몸, 내 몸, 네 마음, 내 마음, 따로 없이 한 몸 한 맘으로 한데 꼭 붙어 한 덩어리로 희희낙락 (喜喜樂樂) 즐겁게 노는 남녀 쌍쌍이를 보고, 사랑의 신(神)인지 여신(女神)이 배가 아파 괴로워했겠지요. 신성(神聖)한 하늘나라 대궐에서 신들이 벌이는 패권(覇權) 다툼보다 비속(卑俗)한 세속 (世俗)의 속인(俗人)들 오막살이 사랑놀음, 사랑놀이가 훨씬 가 좋아 보였을 테니까요.
인간들이 이렇게 행복하다 보니 신들을 찾거나 섬기려 들지 않 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보다 못해 심술이 난 사랑의 신인지 여신이 시기심과 질투심에서 인간 남녀 쌍쌍이를 죄다 분리(分離) 시켜 세상에 흩뿌려버렸겠지요. 옛날부터 한 나라의 통치자나 세계 강대국이 백성과 약소국가들을 이간(離間)시켜 내분(內紛) 과 분쟁(紛爭)으로 이들을 거세(去勢)시켜 가면서 통제(統制)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리해서 우리 인간 모두가 다 이산(離散)가족이 되어 누구나 다 반쪽으로 사랑 때문에, 사랑에 굶주리고, 사랑에 병들고, 사랑에 미쳐 그토록 고통을 당하고 슬픔을 참아내며 각자 잃어버린 제 짝을 찾아 헤매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좋거니, 그래도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미칠 바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미치느니 차라리 사랑에 미쳐보리라고…
망언다사(妄言多謝)
2020년 12월 5일
미국 뉴저지주(州)에서
이태상(李泰相)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