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소감]
평소 '따뜻한 세상'을 꿈꿔 온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주제가 "인문칼럼" 이라는 것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 조금이라도 따뜻한 면이 있다면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배려를 실천하셨던 지하에 계신 어머니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족으로 덧붙인다면 35년째 써 오는 일기 덕분이기도 하겠지요. 졸필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부드럽고 따뜻한 세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금상 당선작] 혼란의 시대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세상에 존재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역사다. 또 눈에 보이는 그것 하나의 의미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긴 세월 동안 온 세상에 족적을 남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세상, 즉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반복되는 역사에서 끝없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나라 안으로는 백척간두의 조선을 살린 이순신 장군이 그렇고 밖으로는 3천 년 통사를 혼자 그려내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한 사기(史記)를 저술한 사마천이 그렇다.
미증유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세상이 혼란스럽기 이럴 데 없다. 우리가 언제부터 숫자에 이렇게 민감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관련 통계에 예민하고, 자영업자며 소상공인들은 제한된 영업시간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라고 신음하고 있는데 진보와 보수로 나뉜 정치권은 오직 내년의 대통령 선거만 보고 정치싸움에 열을 올리기에 바쁘고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와중에도 불구하고 택배기사들은 마스크를 한 채 무더위를 뚫고 각자의 사연이 담긴 물품들을 배달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니고 교통경찰관은 이글거리는 한증탕인 아스팔트 도로를 지킨다. 모두들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한 몸짓이다. 그들의 이러한 몸짓은 누가 그들을 ‘꽃’으로 불러주길 바라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동안 해야할 의무이고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자연스런 방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고귀한 자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신분이 귀한 사람들이 평소에 누리는 것만큼 위기의 순간에는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한 위험을 감수하고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를 늘 나라 밖에서 끌어와 들었지만, 우리에게도 귀한 신분에 따른 사회적 책임을 다한 조상님들이 수없이 많았다.
평시에 모은 재산을 가뭄에 풀어서 백성을 구휼하여 살린다거나 정승을 여러 번 역임하면서도 초가집 한 칸이 전 재산으로 청렴을 실천한 분도 있고, 전란이 일어나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사재를 털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지킨 의병장들도 대부분 그 시대를 누린 양반 신분이 많았다. 그처럼 평시에는 ‘에헴~’하며 지내다가도 백성이 어렵거나 나라가 위태로우면 스스로 앞장서서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내어놓아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나라가 외부의 침략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엔 그야말로 이름 없는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고장을 지키기도 하고, 때로는 피난민들까지 의병들을 뒤에서 도우면서 승첩(勝捷)에 기여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그 누구의 요구나 지시도 없이 오직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백성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보다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의병장의 위치에 까지 올라 자신의 몸을 던져 역사에 기록되기도 한다. 이처럼 귀한 신분을 지닌 숱한 위인들의 실천도 있었지만 나라가 망할 위기가 오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백성들이 나서서 목숨을 걸고서 나라를 구하고 지켰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한 성공이나 그 성공한 사람에 대한 박수에는 인색해져 갔다. 사소한 것에도 자신의 이룸은 우쭐거리면서도 타인의 실수를 은근히 바라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져 있는 것이다. 특히, 공공성이 높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지상파 방송에서의 오락프로그램은 ‘타인의 실수를 경쟁적으로 잡아내어 함께 웃기’가 대부분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야말로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식이다. 그것은 ‘본질’을 잃어가는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잃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웃들과 어울려 함께 살기보다는 피동적인 삶에 익숙해가는 방증이기도 하다.
들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그들의 존재 의미만큼 한낱 미물인 그들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할 일을 다 한다. 겨우내 얼음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도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무더위를 넘기곤 홑씨를 날려 보낸다. 그리고 작은 돌멩이는 성곽을 이루는 큰 돌을 받쳐 견고함을 더하여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다.
오늘 서산으로 진 태양이 내일이면 동녘 하늘에서 또 쉼 없이 떠오르듯 인류의 역사도 계속된다. 임진왜란 시에 이순신 장군은 억울한 모함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걸어 나올 때 백척간두에 처한 나라를 절대 열세의 전황에서 명량대첩으로 일구어 내고, 전쟁 막바지의 노량에서는 고귀한 가치관을 발산시켜 철군하려는 적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전투를 대첩으로 이끌고 순국하여 우리 역사를 이어지게 하였으며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현재까지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 역사서라고 일컬어지고 우리민족 고조선 역사의 일부까지 기록하고 있는 사기(史記)는 평범한 역사가의 후손인 사마천이 사형선고를 받고는 목숨보다도 더 치욕스러운 (자기의 성기를 잘라내는) 궁형(宮刑)을 선택하고 그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면서 3천여 년을 관통하는 ‘사기(史記)’라는 옥고를 펴내어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 즉, 책임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고귀한 가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곧 이순신 장군과 사마천이 처음부터 고귀한 사람이었다기보다 선공후사의 자세를 견지하고 목숨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면서까지 자신의 책임을 다하였기 때문에 고귀해진 것이며 바로 그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세상을 이대로 방치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할 곳이고, 우리 후손들이 자손만대로 영원히 살아가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특정한 신분을 가진 고귀한 사람들만의 몫으로 만들어지고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화려한 날들만이 역사가 아니듯 역사를 만드는 것도 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책임을 다하여 개개인이 각자의 의무를 다할 때 우리 모두가 고귀해질 것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특정한 신분과 관계없는 제대로 된 모두의 세상이 될 것이다.
조동화님의 시에 보면 ‘~~네가 꽃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에 대한 응답이다. 결국 꽃을 피우는 작업, 책임을 다하는 실천은 누구에게 미룰 문제가 아니다. 내가 먼저, 우리 모두가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함께 하여야 할 일이다. 창밖에 서 있는 꽃대가 비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꽃을 피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훌륭한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보다 각자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자. 혼란의 시대인 작금에 있어서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가끔씩 언론에 회자되는 ‘타인의 위험을 보고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보통사람들’을 보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타인의 실수를 들추어내거나 비방할 필요 없이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면 된다. 즉, 우리에겐 누구나 가진 감추어진 강점(재주)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어 상황에 맞게 자연스럽게 세상에 유익하도록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재주를 찾아내어 격려해 주고, 이웃들의 장점에 박수를 쳐 주는 것이다.
고귀함이란 태어날 때부터 숙명처럼 구분되어진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기 나름에 따라 스스로를 고귀하게 할 수도 그렇지 않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고귀한 존재가 되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미루며 때를 놓치면 고귀해질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우를 범할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