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들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가을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무량수전, 안양문,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혜곡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을 읽으며 머리글에 매료되어 읽고 또 읽었다. 그 글을 읽은 지가 아마 2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도대체 어떤 멋을 품은 장소기에 이런 표현이 만들어지는 것인지 부석사란 사찰에 대한 궁금함은 늘 나를 갈증 나게 했다.
그렇게 글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 네 번씩 찾아간 부석사는 만날 때마다 최순우 선생의 글 이상으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옮길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짝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지난 추석 연휴 또 부석사를 찾았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다. 의상은 당나라로 유학 가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화엄사상을 널리 알리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선묘 낭자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났을 무렵, 등주라는 어느 바닷가 불교 신자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 주인의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고백을 했으나 의상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선묘에게 불교를 전했다. 의상의 뜻을 알게 된 선묘는 의상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도왔다. 공부를 마치고 신라로 돌아가게 된 의상은 선묘의 집에 들러 인사를 마치고 떠났다. 의상이 떠난 것을 알게 된 선묘는 급히 가보았지만 이미 저만치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의 소지품을 담은 보따리를 배를 향해 던지고 ‘스님 무사히 돌아가 불교를 넓게 펼치게 해 세요’라고 빌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선묘는 용으로 변해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용이 된 선묘는 계속 의상을 보호했다. 의상이 건립한 부석사 뒤 큰 바위가 절을 덮칠 것 같자 스님들이 놀라 모두 도망갔다. 그때 선묘가 바위를 들어 올려 의상은 안심하고 화엄경을 매일 강의하자 사람들과 스님들이 다시 찾아와 부석사는 널리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이후 선묘의 사랑이 깃든 절에 바위가 떠 있다고 하여 부석사(浮石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위, 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이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 적고 있다. 무량수전 위에는 의상대사의 배를 호위했던 선묘의 전각이 있다. 부석사에 갈 때마다 꼭 그 전각에 들린다. 사람의 사랑이 어떤 경지까지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양문 옆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스라한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 있던 관광객의 대화가 가슴에 와 박힌다.
“언니 세상사 모든 욕심이 다 사라지지?”
“응”
“언니 이곳을 뜨기가 싫지”
“응”
‘응’이란 대답만 하고 먼 산을 보고 있는 언니라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 떠 있는 바위도 까치발을 하고 흘러가는 소백산 능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사 욕심이 다 사라지게 한다는 소백산 능선을 바라보며 나도 그곳을 뜨기가 싫어 한참을 서 있었다. 선묘의 사랑이 용이 되고, 선묘의 사랑이 기적이 된 부석사에서 호젓하고도 스산하고 희한한 아름다움에 말문이 막혔다.
[서재심]
시인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코스미안뉴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