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한산대첩과 견내량의 역사

사진=코스미안뉴스


2021년 10월 1일 다시 견내량을 찾았다. 족히 20번은 들렀던 곳인데 매번 갈 때마다 견내량 풍경은 새롭다. 이번에는 전망대 휴게소에 새로 설치한 한산대첩과 관련한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한산대첩을 이해하려면 견내량(見乃梁)을 알아야 한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반도가 만들어낸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300~400m의 좁은 해협이다. 육지와 섬 사이가 좁아 조류가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곳에는 유체역학인 '베르누이의 정리'에 의해 물살이 급히 흐른다.


이곳은 평소에 부산, 창원, 통영 방면으로 항해하는 많은 선박으로 붐빈다. 견내량 해협 양쪽 입구에는 작은 섬들이 산재하고 물살이 거셀 뿐 아니라 바다 밑에 암초가 많아 옛날부터 해난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1971년 4월 8일 거제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통영과 거제도 사이를 나룻배나 도선으로 왕래하였다. 지금은 신거제대교 다리가 하나 더 생겼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통영시 용남면 신촌 부락과 거제시 사등면 견내량 부락이 지근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무신정권 때인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거제도의 폐왕성(지금의 둔덕면 거림리)으로 귀양온 고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견내량은 임금인 전하가 건넜다 하여 지금도 전하도(殿下渡)라고 부른다.


고려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모시고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거제시 둔덕면 곳곳에 살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한산도 두억포에 있는 통제영을 지키는 통성을 견내량의 덕호리에 쌓아 중요한 방어진지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1419년 5월, 조선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 수군의 주력군을 거제의 견내량에 집결시켰다. 227척의 배와 17,285명의 수군이 이 좁은 해역에 집결하였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류에 의해 물살의 방향이 바뀐다. 썰물을 기다렸다가 그 물살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가조도와 칠천도가 있는 괭이바다 쪽에서 통영 쪽으로 썰물이 빠져나갈 때 배를 몰아 한산도, 비진도를 지나 구을비도나 홍도 쪽으로 내려가서 쿠로시오해류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의 대마도 정벌군은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부산포가 아닌 견내량에 집결했던 것이다.


견내량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가는 관문이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곡창 호남을 지키기 위해 한산도에 통제영을 차리고 이곳 견내량을 지켰다. 이런 사연은 1593년 7월 16일 이순신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히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 견내량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괭이바다나 진해만, 부산포 쪽의 왜군을 치기 위해 출동을 하거나 귀환할 때 거제도 남단을 돌아 우회하는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 이 견내량을 지나다녔다.


신거제대교 아래 마을인 통영시 용남면 견유부락도 예전에는 '견내량' 마을이라 불렀으며 거제시 사등면 쪽 '견내량' 마을과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은 한시(음력 보름 또는 그믐 때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클 시기) 때에는 물이 홍수진 냇물처럼 급히 흘러간다. 그래서 지역민들은 여기를 '갯내"또는 '개내'라고 불렀는데 식자들이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연서 견내량(見乃梁)이라  했다.


'갯내'라 할 때 '개'는 바다를 말하고 '내'는 냇물을 의미하며 '량'은 협소한 물길을 뜻한다. 그러니 '갯내량'은 바다에서 물이 냇물처럼 흐르는 좁은 협수로가 된다. 동력선이 아닌 배가 이곳의 물살에 밀리면 좌초하기 쉬운 지형이다.


1592년 8월 13일(양력)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73척의 함대가 여기 견내량에 집결하였다. 당포 목동 김천손의 제보를 기초로 작전계획을 수립한 이순신 장군은 다음 날인 8월 14일 왜군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했다.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학익진과 당파전술로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이다.


이곳 견내량에서 해전이 일어난다면 접근전의 대혼전이 불가피하다. 왜군이 아군의 배 위로 올라와 등선육박전이라도 펼치면 조선수군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포격전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이순신 장군은 이 협소하고 험난한 물길보다는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를 전장으로 택했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싸우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대표적 사례다. 오늘도 한가로이 다릿발 사이로 배들은 왔다갔다하지만 이곳 견내량은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글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이봉수 기자
작성 2021.10.02 10:44 수정 2021.10.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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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